인터뷰

‘90년대 3대 생산국’ 20만원 대 한국 시계의 부활 찬가

더 비비드 2024. 6. 27. 15:13

많은 아이디어가 발상의 전환이나 우연에서 시작되지만, 상품으로 시장에 나오려면 부단한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행은 엄두내기 어려운데요. 나만의 아이디어로 창업을 꿈꾸는 여러분에게 견본이 될 ‘창업 노트 훔쳐보기’를 연재합니다.

한국이 스위스, 일본에 이어 한때 시계 3대 생산국이었던 적이 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당시에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도 시계를 만들어 해외에 수출했고, 금은방에선 몇몇 국산 브랜드의 시계가 예물로 사랑받기도 했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기술력은 스위스의 명품 브랜드에 밀리고, 가격은 중국의 저가 시계에 밀리면서 한국 시계 산업의 위상은 이제 예전에 훨씬 못미친다.

시계 산업 불모지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어진 한국에서 최근 새로운 시계 브랜드가 등장했다. 경진건(63) 가디우스 대표가 이끄는 드레스 워치 브랜드 ‘커스벤’이다. 경 대표를 만나 창업 계기를 들었다.

중저가 맞춤 시계 브랜드 '커스벤'의 아라베스크 컬렉션을 들고 있는 경진건 가디우스 대표. 아라베스크 컬렉션은 오토매틱(배터리 없이 신체 진동으로 작동하는 방식) 시계 라인으로, 케이스 색상과 스트랩을 바꿔서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더비비드

◇명품시계와 스마트워치 사이 틈새 노리는 브랜드

커스벤은 클래식한 디자인의 드레스 워치 전문 브랜드다. 홈페이지에서 내 취향대로 맞출 수 있다. 커스벤에서 미리 정해둔 옵션이 몇가지 있다. 14종의 제품 컬렉션이 있는데, 각각 시계 케이스 2개, 다이얼 6개, 핸즈 6개, 스트랩 18개, 버클 4개 중에서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조합할 수 있다. 경우의 수로 따지면 10만종 이상의 시계 종류가 나온다. 국내 자체 조립 공장을 두고 있어 커스텀 시계를 주문해도 3일이면 제작이 가능하다. 선택을 잘 못하는 소비자를 위해선 20종의 베스트셀링 조합을 출시해 판매하고 있다.

스위스·일본산 무브먼트, 이탈리아산 가죽, 0.7mm 두께로 도금한 의료용 스테인리스 케이스, 사파이어 글라스 등 수백, 수천만원 시계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원·부자재를 썼다. 오토매틱 시계 중에선 ‘아라베스크’ 컬렉션이, 쿼츠 시계 중에선 문페이즈 기능이 있는 ‘그리피온’, ‘빌리포스’, ‘마그레프’ 컬렉션 등이 인기다. 모양새는 명품 시계인데 20만원 중반대에서 50만원대인 가격이 강점이다.

(왼쪽부터) 커스벤의 '크레스비' 컬렉션 시계와 '아라베스크' 컬렉션 시계. 아라베스크 컬렉션은 배터리 없이 신체 움직임으로 작동하는 오토매틱 시계다. /더비비드

◇호시절 이끌던 시계·주얼리 브랜딩 전문가

시계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1985년 아주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아남산업에 입사했는데, 시계사업부에 배치됐다. 시계의 생산 기획, 조정, 물류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제조 라인을 담당하면서 스위스나 일본으로 출장을 다니며 시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시계를 사랑했지만 국내 시계 유통 구조에 대해선 의문이 많았다. “1980년대만 해도 시계 브랜드 매장이 따로 없어 금은방에서 팔았어요. 같은 시계인데도 금은방마다 가격이 다르고, 유리 전시장을 통해 구경해야 해서 고가의 상품이라는 인식이 생겨 있었죠. 진입 장벽이 높아 대중화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유통·소비 구조가 시계 산업의 발전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자상거래가 발달한 시절도 아니었으니까요.”

(왼쪽부터) 아남산업의 시계 신사업부 재직 시절 영국 런던 해로즈백화점(해롯백화점)앞에서 찍은 모습,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현재 경 대표의 모습. /경진건 대표 제공, 더비비드

정면 돌파를 위해 이랜드 그룹 신규 사업부로 자리를 옮겨 시계 브랜드를 만들었다. “당시 스카우트 조건이 ‘15억원의 사업비를 직접 운영해도 된다’였어요. 1년간의 준비 끝에 탄생한 브랜드가 ‘로이드’입니다. 업계 최초로 시계 매장을 프랜차이즈화하고 가격 정찰제를 도입했죠. 본사에서 바로 소매점으로 제품을 공급하니 같은 품질이어도 30% 이상 저렴했어요. 덕분에 젊은 소비자도 시계 매장에 찾아와 부담 없이 구경하고, 제품을 사 갔죠.”

이랜드 신사복 브랜드 대표까지 지내다 회사를 나와 시계·주얼리 브랜드 컨설턴트로 일했다. 국산 주얼리 브랜드 ‘제이에스티나’도 그의 작품이다. “’로만손’이라는 국내 시계 브랜드가 여성 주얼리 브랜드 론칭을 의뢰해왔어요. 백화점 입점을 목표로 잡고 브랜드의 왕관 모양 로고까지 직접 디자이너들과 협의하며 3년 동안 준비했죠.”

창업 초기 서울 서초구에 있던 커스벤 쇼룸의 모습. 지금은 경기도 안양으로 옮겼다. /경진건 대표 제공

2019년 가디우스를 창업하고 2020년 시계 브랜드 ‘커스벤’을 내놨다. ‘돈이 되겠다’싶어 시작한 사업은 아니다. “2000년대 이후 명품 시계 시장은 점점 커지고, 중저가 국산 브랜드들이 빠르게 망해갔어요. 수천만원짜리 명품 시계와 10만원 이하 저가 시계 사이에서 살만한 시계가 없어졌죠. 한때 시계의 대중화를 꿈꿔 브랜드까지 론칭해본 입장에선 아쉽더라고요. 시장이 작아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맞춤 시계를 갖고자 하는 수요는 분명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한국 원조 시계쟁이의 마지막 태엽 감기, ‘커스벤’ 시계 개발 노트

커스벤의 '아라베스크' 컬렉션. 배터리 없이 사람의 동작만으로 동력을 얻는 오토매틱 시계다. 덕분에 뒷부분을 투명하게 구현할 수 있다. /더비비드

1. 양극화된 시계 시장, 텅 빈 중저가 시계 시장 공략

브랜드의 특성과 수요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시작했다. 가격대는 20만~60만원 사이로 설정했다. “‘짝퉁’이라고 불리는 가품 시계를 몇십만원씩 주고 사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 가격대가 구매자가 편하게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이라고 생각했어요. 예물 시계로 고가의 제품을 사더라도, 직장에 매일 차고 다니다 흠집 날까 걱정하잖아요. 물건을 모셔두기만 하는 건 제품 취지에 어긋나죠.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찰 수 있는 시계를 지향했습니다.”

시계의 주 소비층이자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는 40~50대 남성을 공략해 ‘맞춤 제작 시계’로 차별화하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전자상거래로 유통 구조가 재편되면서 실현할 수 있게 됐죠. 이젠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어 매장에서 전시하지 않아도, 웹 사이트의 그래픽으로 제품을 보여준 뒤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시계 케이스 시제품 제작 과정. 약간의 틀어짐으로도 오차가 생기기 때문에 온도와 습도까지 정해두고 제작해야 한다. /경진건 대표 제공

2. 시계의 고급스러움은 다이얼로, 특색은 핸즈로 구현

명품 시계와 일반 시계의 차이는 시계의 얼굴인 ‘다이얼’에서 나온다. 다이얼이 화려해야 비싸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이얼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 “주요 브랜드는 시계 다이얼을 아직도 손으로 그려가며 디자인해요. 미술 작품처럼 말이죠. 그래서 시계 디자이너를 채용할 때, 면접 대신 ‘시계 다이얼’을 그려보게 했습니다. 채용 기준은 비례와 균형감이었죠. 균형과 각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시간이 달라지잖아요. 균형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을 찾은 겁니다. 숫자의 두께, 배치 간격, 글씨의 굵기, 케이스의 크기와 용두(손목시계에서 태엽을 감거나 시각을 조정하는 꼭지)의 배치까지 모두 보면서 각도까지 정확하게 그리는 사람을 찾았어요.”

시계 디자이너와 경 대표가 직접 시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브랜드의 통일감은 시곗바늘인 ‘핸즈’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시계를 볼 때 튀는 것 없이 편안해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보기 때문이죠. 눈이 편안한 푸른 녹색빛의 다이얼을 주로 제작했고, 빛의 반사로 다양한 색감을 내는 ‘썬레이’ 가공법을 택했어요. ‘핸즈’도 자체 제작했습니다. 커스벤의 ‘C’ 철자 두개를 겹쳐 왕관처럼 보이게 한 로고인데요. 커스벤의 시계라는 통일감을 주기 위해 직접 금형을 만들어 제작했습니다.”

커스벤의 시계 다이얼을 디자인하는 모습. /경진건 대표 제공

3. 제품의 완성도는 브랜드의 거울

비싸 보이기’만’ 하는 제품이어선 안됐다. 완성도 있는 마감을 위해 고품질의 부품을 한국에 들여와 직접 조립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만, 홍콩, 일본, 스위스 등 시계 부품 제작으로 유명한 공장에서 양질의 부품을 조달했다. “공장 정보를 알려면 시계 박람회를 가보면 됩니다. 매년 스위스 바젤과 제네바에서 열리는 시계 박람회가 제일 유명하고,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개최해요. 박람회에는 브랜드뿐만 아니라 제조 공장 관계자도 만날 수 있어요. 부품의 품질과 만듦새를 만져보고 거래할 수 있죠.”

커스벤의 시계 장인이 시계를 조립하고 있다. /커스벤

일관된 품질 관리를 위해서 ‘메이드 인 코리아’는 필수였다. 아남산업에서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를 ‘모셔 와’ 성수동에 제조 공장을 마련했다. “70대와 50대 시계 조립 장인 두 분이 커스벤의 시계 제작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조립 설비가 국내에 있으니 제품 보수도 바로 가능하고, 맞춤 시계 제작 주문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죠. 맞춤 시계는 빠르면 하루, 늦어도 사흘 안에는 제작이 가능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 보 앞서야

양극화 된 시계 시장에서 명품 수준의 중저가 시계 수요가 분명이 있다고 확신한 경진건 대표. /더비비드

약 1년 6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0여종의 시계로 2020년 ‘커스벤’을 출시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만 3억5000만원의 매출을 냈다. 최근 대만과 일본에서도 판매를 시작했다. “스마트 워치가 인기인 시대라지만 시계의 고유한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어요. 한 번 써보고 또 샀다는 소비자 후기를 볼 때 가장 뿌듯하죠. 올해에는 오토매틱 시계 라인을 추가해 선택지를 넓혀보고 싶어요.”

‘반보만 앞선다’는 전략과 철학으로 여기까지 왔다. “트렌드를 미리 읽는 능력이 너무 많이 앞서면 시장을 개척해야 해서 고생합니다. 그렇다고 유행만 따라가면 선두 주자가 될 수 없죠. 딱 1~2년 앞선 유행을 알아보는 게 중요한데요. 결국 한국보다 규모가 큰 해외 시장을 면밀히 봐야 합니다. 일본 등에선 이미 맞춤 시계와 합리적 가격대의 시계들이 인기를 얻고 있어요. 직접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고, 눈으로 여러 제품을 보면서 감을 익혀야 합니다.”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