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3살 포항공대생이 중소기업 생산직 알아보고 다닌 이유

더 비비드 2024. 6. 27. 14:55
생산 기능직 전문 채용 플랫폼 '고초대졸닷컴'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디플에이치알의 박중우 대표. 고초대졸닷컴을 운영한다. /더비비드

“3개월 동안 기자에 빙의한 삶을 살았죠. 450명 넘는 구직자를 대면하거나 유선으로 인터뷰하며 취업 준비의 고충을 면밀히 들었어요.”​

디플에이치알의 박중우(23) 대표는 시장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창업을 시도했다가 사업 아이템만 몇 번째 갈아엎었다. 절치부심 시장 조사에 이를 갈았다. 하루에 5000개씩 올라오는 채용 공고를 분석하고 사회초년생 450명을 직접 만나고서야 제대로 된 아이템 발굴에 성공했다. 박 대표를 만나 생산 기능직 전문 채용 사이트 개발기를 들었다.

◇대회 상금 보고 모였다가, 세상에 없던 것 만들었다

디플에이치알은 생산 기능직 전문 채용 웹서비스 ‘고초대졸닷컴’을 운영하고 있다. 고초대졸닷컴은 기존 채용 플랫폼과 달리 생산직 관련 채용 정보만 확인할 수 있어 타깃 이용자층을 줄인 것이 특징이다.

생산직의 경우 직장이 서울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아 통근버스 지원 여부, 기숙사 여부, 교대 근무 형태 등 정보가 입사 지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기존 생산 기능직 관련 채용공고에서는 이런 정보를 쉽사리 보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구직자는 카페 등 커뮤니티에서 알음알음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고초대졸닷컴 서비스 화면. /디플에이치알

박 대표는 생산 기능직을 위한 플랫폼은 없다는 점에서 착안해 고초대졸닷컴을 만들었다. 40만건의 공장 데이터를 구직자가 보기 쉽게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성비, 통근버스, 기숙사, 노조, 연봉, 근무 시간, 교대근무 형태 등의 정보를 세세하게 제공한다. 모든 정보는 무료로 열람 가능하다.​

회원가입 시 어학 점수·대외활동·인턴 경력 등을 기재해야 하는 4년제 대학 졸업자 중심의 기존 채용 플랫폼과 달리 자격증·고교내신·출결사항 등으로 정보 기입 항목을 구성했다. 기업의 생산직 인사담당자는 구직자를 검색할 수 있는 창구가 생겨 채용 속도를 올릴 수 있다.​

2021년 8월 서비스를 시작한지 4개월 만에 월간 활성 방문자수가 3만명을 넘었다. 현재 매월 6만명의 구직자가 고초대졸닷컴을 찾고 있다.​

업계에선 생산직 채용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한다. 아이디어를 인정받아 지난 10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에 올랐다. 팁스,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스마일게이트 등 투자사로부터 3억원의 투자금 유치에도 성공했다.

(왼쪽부터)창업들과 상경했을 때 모습, 창업대회에 출전해 수상한 모습. /박중우 대표 제공

박 대표는 포항공대 산업경영공학과를 다니다 3학년을 마치고 ‘창업 휴학’을 했다. “학교 홍보대사 모임과 축구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3명과 함께 창업했습니다. 학과 수업에서 배운 코딩을 연습하기 위해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나간 게 시작이죠. 처음엔 상금이나 받자는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카페 추천 앱, 식당 리뷰 분석 프로그램 등 다양한 아이디어로 대회에 도전했다. 번번이 낙방하다 처음 상을 받은 아이템이 있었다. 영상 창작자를 위한 ‘효과음 자동 삽입 프로그램’이었다. “1인 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전문 편집자가 아니어도 자신의 영상을 직접 가공하는 유튜버가 늘었어요. 편집 효율을 높이려는 수요가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영세한 유튜버를 타깃으로 효과음 검색 및 자동 삽입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했죠. 이 아이디어로 모의 IR 대회에서 600만원의 상금을 받았습니다.”

대회에서 수상까지 했지만 사업화에 실패한 첫번째 아이템. /박중우 대표 제공

대회에서 상만 타면 시장성이 검증된거라 생각했다. 창업 멤버 4명 모두 휴학하고 서울에 임시 숙소를 구해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돌입했다. 막상 실행하고 보니 아이템 구체화가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았습니다. 국내에 1만명 넘는 구독자를 가진 채널이 2020년 기준으로 2만개도 안됐죠. 시장 조사를 미리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어요.”

◇사회초년생 직접 만나보면서 느낀 것

상금으로 받은 돈은 숙소 겸 사무실의 월세로 소진되고 있었다. 아무런 성과 없이 학교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원점에서 다시 사업 아이템을 모색했다. “지난 10년 간 나온 전세계 유니콘 스타트업을 조사했어요. 한국에 적용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서요. 미국의 ‘핸드쉐이크(Handshake)’라는 앱을 알게 됐습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 타깃의 구직 앱이었죠. 핸드쉐이크의 사례를 보며 한국 채용 시장에서도 타깃을 좁혀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 대표와 창업 멤버의 모습. /박중우 대표 제공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사전 조사를 했다. “통계청의 자료를 살펴보니 5인 이상 민간사업체의 미충원 인원이 점점 늘고 있었어요. 반면 대졸 취업률은 바닥을 기는 상황이었죠. 교육부의 자료를 보니 2020년 4년제·전문대·일반대학원 졸업자를 모두 합친 대졸자 취업률은 65.1%에 불과했습니다.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11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라더군요.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각한 거죠.”

500곳 이상의 기업 인사팀에 무작정 메일을 보내 인터뷰를 요청했다. 답신이 온 30개 기업의 채용 담당자를 인터뷰하니 한 가지 공통적인 답변이 있었다. “생산직종은 항상 구인난이라더군요. 구인 정보를 알리는 방법이 채용 사이트에 올리는 것 뿐인데 적합한 구직자에게 공고가 닿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통계는 채용 담당자들의 설명과 달랐다. “2020년 기준 생산직 구인 수요는 69만명이었습니다. 반면 생산직 구직자는 91만명이었죠. 구직자가 더 많은 상황인데도 기업이 구인난을 겪는 건 정보의 불균형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450명의 사회초년생에게 직접 연락해 인터뷰를 했다. “주변 지인을 시작으로 온라인과 전화 설문을 통해 의견을 물었어요. 현 채용 플랫폼에 대한 불만, 채용 정보 획득 방법, 구직 경로 등을 물었죠.”

사업초기 사전 조사를 거친 과정을 설명하는 박 대표. /더비비드

생산 기능직종을 구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보였다. “생산 기능직 구직자의 경우 채용 웹사이트보단 카페나 오픈채팅방 등의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많이 얻는다고 답변했습니다. 기존의 채용 사이트는 모든 직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교대 근무 여부, 통근 버스 운행 여부 등 생산 기능직에서 필요한 특수 정보를 모아서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죠.”


생산 기능직으로 범위를 한정한 채용 사이트를 만들기로 했다. “결심하고 일주일도 안 돼 ‘고초대졸닷컴’을 열었어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제공하는 40만건의 공장 데이터에서 공장 규모, 기숙사 등 시설 정보를 추출해 검색할 수 있게 했죠.”​

단순히 웹사이트만 연다고 구직자가 몰릴 리는 없었다. 멤버들과 함께 생산 기능직 커뮤니티 사이트를 띄워놓고 채용 정보를 있는 대로 모았다. “초반에는 정보를 스크랩하는 일만 온종일 했어요. 웹사이트의 구색을 갖춘 뒤에는 커뮤니티와 주변 지인, 인터뷰에 응했던 채용 담당자에게 직접 사이트 개설 소식을 알렸죠.”​

◇매월 6만명 방문하는 웹사이트로 성장

은행권청년창업재단의 창업경진대회 발표사로 나선 디플에이치알. /디캠프

기존에 없던 생산 기능직 전용 채용 정보 서비스가 생긴 데다 정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는 입소문에 이용자가 몰렸다. 지금은 매월 6만명 넘는 구직자가 고초대졸닷컴을 이용한다. 구직을 위해 사이트에 가입한 누적 회원수는 2만5000명이다.​

생산직 구직자가 한 데 모여있는 웹사이트가 있다는 소문은 기업 인사 담당자 사이에서도 퍼졌다. 디플에이치알이 직접 정보를 모으지 않아도 기업에서 공고 업로드 요청이 들어온다. 채용 공고 등록용 메일을 통해 기업 인사 담당자가 공고 양식을 전달하면, 디플에이치알이 최적화 작업을 거쳐 채용 공고를 띄운다.​

최근엔 한국폴리텍대학교, 인덕대학교, 한영대학교, 국제대학교 등 18곳의 전문대학과 협약했다. 재학생에게 채용 정보를 제공하고, 구인 기업에 재학생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디플에이치알의 박중우 대표. 창업은 사회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강조했다. /더비비드

주 수익원은 고초대졸닷컴 웹사이트 내 배너 광고다. 내년 상반기 앱 출시와 함께 수익 구조를 다각화할 계획이다. “일자리-구직자 매칭 서비스나 합격 스펙 데이터 관리, 현직자 기업 리뷰, 구직자 멘토링 서비스 등의 부가 서비스를 추가해 입지를 굳힐 예정입니다.”​

창업은 사회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강조했다.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보이죠. 이젠 생산 기능직 채용 정보를 보기 좋게 가공하는 것을 넘어, 근무 환경 개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어요. 구직자가 많은데도 기업들이 구인난을 겪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생산 기능직의 인식 개선과 근무 환경 개선이 모두 수반돼야 해요. 일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고초대졸닷컴을 통해 기업을 홍보하는 사례가 늘면, 생산업 전반에 자정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