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론치 모니터 ‘레인지엑스’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앞만 보고 달렸다.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하며 10년을 살았다. 결과는 대장암이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회의감이 몰려왔다. 생각을 고쳤다. 재앙을 전환점으로 여기기로 했다.
레인지엑스의 박진규 대표(48)는 성공이 보장된 길만 걸었다. 그러다 고비를 겪고 갈 길을 개척하는 삶을 택했다. 구력 20년 차 골퍼의 순정을 담아 골프 연습기를 개발했다. 창업 전이나 후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가 모토인 그가 만든 연습기는 어떤 모습일까. 골프 임팩트 소리가 끊이지 않는 연습장에서 그를 만났다.
◇오로지 팩트(fact)로 실력 보여주는 골프 연습기
골프공이 발사되는 정보를 인식하는 모든 기기를 론치 모니터라고 한다. 레인지엑스는 론치 모니터 개발사다. 레인지엑스의 론치 모니터는 대형 키오스크와 센서, 스윙 카메라 2개, 오토티업기로 구성돼 있다.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하면 두 대의 카메라가 작동해 공의 궤적을 분석한다. 분석 결과는 키오스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오스크는 스마트폰처럼 터치 스크린으로 조작 가능하다.
키오스크 화면은 개인 맞춤형으로 꾸릴 수 있다. 키오스크의 화면부는 상단과 하단으로 분할돼 있다. 상단은 전후면 스윙 영상, 공 분산, 임팩트 포인트 등 9가지 시각 정보 중 2개의 선택지로 채울 수 있다. 레슨 전과 후나 골프 프로와 내 스윙을 세팅하면 영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영상 다운로드도 가능하다.
키오스크 하단부에는 7가지의 볼 데이터, 11가지의 클럽 데이터, 9가지의 비행 데이터(flight data) 등 총 25가지의 데이터를 띄워준다. 간단한 조작으로 원하는 항목만 배치할 수 있다. 특정 데이터의 수치를 변경하면 그 외 데이터 항목들이 연동 돼 예상치를 제시한다. 예컨대, 볼 스피드를 높이면 그만큼 거리가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다 객관적으로 골프 실력을 향상할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콘텐츠도 탑재했다. 비교(comparison) 탭을 선택하면 남녀 투어프로와 남녀 일반 골퍼, 초보 골퍼 등 다섯 집단의 평균치와 이용자의 기록을 비교할 수 있다. 골퍼들의 눈높이에 맞춘 섬세함 덕분에 골프 마니아 사이에서 ‘골프 덕후 최고의 장난감’이라고 불린다.
레인지엑스를 이용하면 골프 프로들은 보다 체계적으로 레슨을 할 수 있고 이용자는 수치를 확인해가며 스스로 훈련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국 50곳의 매장이 레인지엑스 론치 모니터를 설치했다. 신용보증기금이 우수 기술 기업에 부여하는 ‘퍼스트 펭귄’ 기업에 선정된 데 이어 미국과 싱가포르까지 진출했다.
◇암을 기회로 삼은 남자
잘 나가는 엘리트의 삶을 살았다. 버지니아 주립대 졸업 후 리먼브라더스와 메릴린치 등 유명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M&A 자문 업무를 담당했다.
파죽지세였던 삶에 돌연 제동이 걸렸다. “2012년 건강검진을 하다가 대장암을 발견했어요. 수술을 받고 치료하는 동안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강도 높은 삶을 감당할 체력과 의지가 있을까 의문이었어요. 결이 다른 길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죠.”
스마일게이트로 이직해 재무와 해외사업개발을 담당했다. 우연한 기회로 창업 생태계에 스며들었다. “스마일게이트의 자회사인 지스윙이라는 스크린 골프 회사의 대표직을 맡게 됐습니다.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가 의도치 않게 작은 회사의 대표로 2년간 활동했죠. 지스윙은 프렌즈 골프의 전신 격인데요. 이곳에서 처음으로 창업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스크린 골프 시장을 경험했습니다.”
대표가 돼 보니 골프 시장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도심의 야외 연습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골프 인구는 나날이 늘어 연습 공간이 필요한데 땅값 인상 등의 이유로 골프 연습장이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었어요. 결국 레슨장이나 연습장이 접근성이 좋은 도심의 실내 공간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전세계 대도시 공통으로 이런 현상을 겪고 있었어요.”
‘부족함 없이 연습할 수 있는 실내 연습장은 없을까’. 호기심이 창업의 단초가 됐다. “실내로 가려면 어떤 형태든 기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스크린골프 기계는 목적에 맞지 않고, 수입 장비는 너무 고가인데다 다루기 어려워요. 전문가용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타이거 우즈가 아니라 골프를 즐기는 일반인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장비는 사실상 없는 상태였어요. ‘실내 연습장은 앞으로 활성화될 텐데 마땅한 연습 기계가 없네. 내가 만들어볼까’. 이 생각이 시발점이었어요.”
◇ 골프, 기계 분야 최고의 전문가만 영입
무작정 불확실성에 뛰어드는 대신 돌 다리도 두드려보는 전략을 취했다. 창업 전 핵심 인력을 설득하기 위해 삼고초려했다. “지스윙에서의 경험 덕에 어떤 기술과 인력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기능을 수행할 인력을 포섭하는데 주력했어요. 세계적인 골프 물리학의 대가 카이스트 기계공학과의 이종원 명예교수님과 4D플렉스(plex) 영화관을 개발한 후 CJ CGV에 매각한 김의석 박사님을 힘들게 섭외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분들이라 영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6개월간 두 분을 쫓아다니며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제 진정성을 보여드렸죠.”
2016년 법인을 설립하고 론치 모니터 개발에 착수했다. “뭘 만지기만 하면 고장 내는 엄청난 ‘똥손’(손재주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입니다. 기계 만지는 걸 두려워해요. 저 같은 기계치도 쉽게 만질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터치 스크린 방식의 직관적인 사용법을 차용하기로 했죠.”
카메라로 공을 인식하는 카메라 타입의 분석 메커니즘을 적용했다. “골프 연습기 시장은 카메라 타입과 레이더 타입으로 양분돼 있는데요. 레이더 타입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레이더 타입은 실외에서 훨씬 정확합니다. 실내에선 한계가 있어요. 레이더 타입으로 공의 스핀량을 확인하려면 공에 은박지를 부착하거나 타이틀리스트에서 출시한 RTC(Radar Capture Technology)라는 볼을 써야 하는데요. 가격이 바싸서 RTC로 매장을 운영하는 곳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실내 환경에서는 카메라 타입이 더 정확하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실내 연습장에서 모니터 너머 공의 궤적은 분석의 정확도가 판가름하는데요. 스핀량을 정확히 알아야 궤적을 제대로 추적할 수 있습니다. 이때 레이더보다는 카메라 방식이 스핀량을 보다 정확히 추적합니다.”
카메라 방식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자체 실험도 진행했다. “스윙 시 1분에 4090번의 백스핀(back spin)을 발생시키는 골퍼가 있다고 가정할게요. 이 골퍼가 클럽 헤드에 박스 테이프를 붙이고 다시 스윙을 합니다. 마찰력이 줄었으니 스핀량도 줄어야겠죠. 놀랍게도 대부분의 레이더 기반의 경쟁사 제품으로 하면 동일하게 4090번이 나옵니다. 공의 움직임을 단순히 예측하기 때문이죠. 저희 제품으로 하면 스핀량이 1328회로 줄어 있습니다. 스핀과 움직임의 추이까지 정확히 ‘계산’한 결과물이죠.”
포착력이 좋은 카메라를 탑재했지만 단가는 낮췄다. 성능이 높지 않은 카메라를 여러 개 묶어 고성능 카메라 수준의 결과물을 도출하는 기술이 그 비결이다. “적은 비용으로 사양이 뛰어난 측정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눈을 찌푸리면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잖아요. 그 원리처럼 공이 발사되는 순간 공의 움직임을 카메라 여러 대로 집중 촬영해 정확도를 높였습니다. 이 기술로 한국, 미국, 중국, 일본에 특허 등록을 했습니다. 가격은 해외 고가 장비의 절반 수준입니다. 훨씬 상용화에 유리하죠.”
◇ 골프 프로들이 먼저 찾는 연습기로 자리매김 후 해외 진출
2년 반에 걸쳐 레인지엑스 론치 모니터를 개발했다. 처음엔 판매 대신 렌탈 방식으로 공급했다. “제품이 어떻게 활용되고,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지 충분히 증명하고 판매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설치한 매장이 수익을 내지 못하면 좋은 제품이 아니니까요. 제품의 안정성과 시장성부터 검증하기로 했습니다.”
서울 대치동에 레인지엑스 1호점을 열었다. “운영이 잘 됐습니다. 늘 붐볐죠.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부족했던 탓인지 ‘골프 붐이라서, 주변에 아파트가 많아서, 레슨 프로가 뛰어나서’ 잘 되는 거라는 평가가 귀에 들어왔어요. 잘 되는 이유를 하나만 콕 짚어 말할 순 없지만 그 핵심에 기기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골프 인구가 밀집된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매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직영점이 6곳이지만 정점일 때는 11곳까지 운영했어요.”
골프 프로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골프 프로 같은 전문가 집단이 레인지엑스를 먼저 찾습니다. 레슨 중 자세를 지적했는데 수강생이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합니다. 자신은 잘 따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론치 모니터를 사용하면 더 이상 ‘느낌’에 의존해서 레슨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세나 구질이 개선됐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프로들 사이에서 론치 모니터는 강의력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전문가 집단의 선호도는 힘이 있습니다. 골프 진성층을 끌어올 수 있으니까요.”
해외에서 먼저 제품력을 알아봤다. 미국의 LA와 싱가포르에 진출했다. “아직 해외에 나갈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해외 클라이언트들이 먼저 찾았습니다. 현지에서 무조건 성공한다며 장비를 달라고 요청해서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갔죠.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2주간 자가격리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 말이죠. 날씨가 좋은 LA에서 실내 연습장이 잘 될까 의문이었는데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LA매장 덕분에 미국 전역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매장의 점주는 수익성이 뛰어나다며 아세안 지역 총판권을 받아갔습니다.”
◇골프 연습계의 ‘수학의 정석’이 목표
5년간 제품의 연속성과 수익성, 내구성을 충분히 검증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작년부터 기기 판매를 시작했다. 직영점은 되레 줄이고 있다. “매장 운영이 제품 고도화에 큰 역할을 했지만 메인은 아닙니다. 솔루션 공급이 저희 회사의 본질이죠. 이제는 제품을 다양한 곳에 설치하는 것에 집중할 때입니다. 미국의 다른 도시뿐만 아니라 일본과 태국에 진출할 예정입니다. 사업주의 수익을 올릴 콘텐츠도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고 있죠.”
골프 연습계의 ‘수학의 정석’이 되는 게 목표다. “골프 연습과 레슨의 기준점이 되고 싶어요. 저희 제품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센서, 골프 물리 알고리즘, 소프트웨어까지 외부에 맡기지 않고 자체 개발했기 때문에 좋은 기획이 생기면 바로 반영할 수 있어요. 소비자와 시장의 변화를 끊임 없이 수용할 수 있죠. 골프에 열정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쉽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박 대표는 인생의 시련이 긍정적인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시절에도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고 힘든 일도 마음가짐에 따라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거든요. 과거와 현재 중 언제가 더 보람 있다고 말할 순 없어요. 다만 의도치 않게 암이란 걸 발견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열정이 끊어 오른 건 사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에 의미를 두고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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