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체 약물접합체 바이오 벤처 ‘앱티스’ 창업가 정상전 교수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전 이제 ‘대표’ 아닙니다.”
통성명하기도 전에 정상전 교수(57)는 스스로 ‘대표가 아니다’라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2024년 2월 8일 바이오 벤처기업 앱티스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앱티스는 동아쏘시오홀딩스의 계열사 동아ST와 인수합병했다. 그 과정에서 정 교수는 ‘대표’ 대신 이사회 의장직을 맡았다.
웃고 있었다. 대표 자리를 벗어던지니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앱티스를 이끌며 그동안 어떤 연구를 했는지 묻자, 맛있는 케이크를 앞에 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정 교수를 만나 학자로 살아온 38년과 대표로 살아온 8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공부’가 좋았어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들어맞았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친구가 약대를 간다더군요. 약대를 졸업하면 약사밖에 길이 없을거라 생각했어요. 물어볼 곳이 없어서 동네 약국을 찾았죠. 부부 약사가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약대 진학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더니 약사 외에도 공무원이 되거나 제약회사에 들어가거나 연구원이 될 수도 있다며 응원해 주셨죠. 솔깃했습니다. 그렇게 1986년 성균관대 약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생활은 만족 그 자체였다. “1년 중 일주일 정도 고향에 내려가는 걸 제외하곤 학교 안에 있던 연구실에 콕 박혀 있었습니다. 특히 화학 실험을 좋아했어요. 비커에 스포이트로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실험을 수도 없이 했죠. 부모님께선 아들이 약사가 될 거라고 기대하고 계셨지만, 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어요. 화학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하는 분야로 진로를 구체화하고 포항공대 화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했어요.”
처음 보는 연구 장비와 시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았어요. 신약 개발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장비가 갖춰져 있었죠. 특히 실리콘 그래픽스란 장비는 신세계였습니다. 단백질 구조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시뮬레이션처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죠. 그 장비를 본 순간 단백질 구조를 기반으로 약물을 설계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화합물의 기능을 평가해 보는걸 ‘활성 평가’라고 하는데요. 단백질 구조를 기반으로 약물을 설계한 다음 제약회사에 보내면 3~4개월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입니다. 궁금함을 못 이겨 전화하면 ‘활성이 안 좋다’는 단순한 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연구의 재료가 되는 효소도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새 약물을 만들어도 표적이 되는 효소가 새롭지 않으니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웠죠. 앞으로 원하는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선 바이올로지(생화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미국 샌디에이고 스크립스 연구소에 이어 하버드대 화학과에서 포스닥(Post-doc, 박사후연구) 과정을 밟았다. “이미 화합물 합성에 있어선 10년 넘는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었지만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교수님이 요청한 물질은 누구보다 빠르게 만들어 제출했죠. 크리스마스 연휴도 반납하고 6개월간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2000년 12월, 지도교수님이 ‘지금부터 당신이 하고 싶은 연구는 다 하라’고 하더군요. 노력을 인정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비로소 생화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합성한 물질을 단백질에 포함시킨 복합결정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신약 개발의 핵심 기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2001년 초부터 저보다 족히 10살은 어린 대학원생에게 그 기술을 배웠습니다. 꼬박 6개월 동안 씨름하면서 원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었죠. 실험이 성공했을 때 그 대학원생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더군요. 정말이지 너무 기뻤습니다.”
◇항체 기술 개발에 올인
2003년 9월 귀국과 동시에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이 됐다. 주 연구 주제는 나노바이오(Nano-bio·바이오 물질을 나노미터 크기의 수준에서 조작·분석·제어하는 과학기술)였다. “Y모양으로 생긴 항체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이었죠. 항체 한 분자가 10~15㎚(나노미터) 정도인데요. Y자 모양이 걸쳐지거나 거꾸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100㎚ 지름인 용기에 일정한 양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항체를 나란히 세우는 기술을 개발하는 게 우선 과제였죠.”
수년간의 연구 끝에 항체 정렬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특정 펩타이드가 항체의 Fc(불변부위)에 결합한다는 점을 활용한 기술이다. “항체 정렬 기술을 개발하고 보니 ADC(antibody-drug conjugate)에 눈길이 갔습니다. ADC는 항체-약물 결합체를 몸에 주입한 다음, 타깃이 되는 암세포를 만나면 약물이 암세포와 결합하면서 항암효과를 내는 치료제입니다. 다만 독성 강한 약물이 암세포와 만나기 전에 혈관에 퍼지면 환자에게 치명적이에요.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의 머리카락이 쉽게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죠.”
핵심은 링커(linker·항체와 약물의 결합을 돕는 물질)라고 봤다. “항체 정렬 기술의 핵심은 항체의 다리를 강하게 결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약물을 붙이면 효과적인 ADC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죠. 이제 이 기술을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지를 고민할 차례였습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창업을 해 보고 싶다는 꿈을 품으며 몰래 모아왔던 비상금 5000만원이 있었어요. 지금이 바로 도전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는 배달 기사
2016년 8월 1일 ‘앱티스’ 법인을 설립했다. 온전히 ‘항체기술(Anti-body technology)’이란 뜻만 담았다.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면 돈은 따라올 거란 생각에 ADC 링커 개발에 더욱더 몰두했습니다. 기존 링커는 항체-약물을 결합할 때 항체의 변형이 필요해요. 그 과정을 없앴습니다. 값비싼 맞춤 양복 대신 기성복을 찾아 입듯 어떤 항체든 결합할 수 있는 링커를 개발했죠. 앱클릭(AbClick)이란 이름도 지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연구를 했지만 사업에 있어서만큼은 풋내기였다. “이제 양산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진 희망적이었죠. GMP(제조품질관리기준)기관을 찾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제약회사에 물어봤더니 비웃음만 샀죠. 앱클릭을 생산할 시설을 마련하려면 최소 수십억원이 든다고 하더군요.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누가 그 돈을 투자하겠느냐는 거죠.”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연구를 하는 일본인 교수가 나타났습니다. 전 아직 제조의 문턱도 넘지 못했는데, 그 연구진은 제조는 가능했지만 또 다른 벽이 있었어요. 링커의 핵심 구성성분인 펩타이드를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문제였죠. 그날 숙소에서 밤새 그림을 그렸습니다. 펩타이드가 일종의 배달 기사처럼 물건만 배달하고 나면 사라지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직접 설계한 그림을 한국의 연구원에게 보내 실험을 부탁했어요. 그로부터 한 달 뒤, 설계한 그대로 작동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날 듯이 기뻤습니다.”
앱티스는 2017년 서울바이오허브의 ‘바이오스타트업 챌린지’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간 교수 출신 창업가로서 여러 힘든 점이 있었지만 특히 홍보가 어려웠어요. 바이오스타트업 챌린지 덕분에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밴처캐피탈에서 먼저 연락을 받기도 하고 특허청의 지원 프로그램에도 선정됐죠. 연구 자금이 똑 떨어졌을 땐 정부의 실용화 과제를 소개받아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앱티스는 같은 해 서울바이오허브 입주까지 한 후, 아기유니콘기업에 선정되는 등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기술 완성도와는 별개로 사업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투자가 2년 정도 끊기면서 회사 잔고가 바닥을 찍었습니다. 앱클릭 기술을 상용화하려면 임상시험 경험이 많고 제조 능력을 갖춘 기업에 기술을 넘기는 방법 뿐이라고 판단했죠. 2022년부터 앱티스를 인수합병할 길을 모색했어요. 4곳의 제약·바이오 관련 기업에서 제안받았습니다.”
◇줄다리기 끝에 맞잡은 두 손
1년이 넘는 줄다리기 끝에 2023년 12월 동아쏘시오홀딩스의 계열사인 동아ST가 앱티스를 인수했다. 2023년 초 최종 투자 유치 당시 기업 가치를 645억원으로 평가받은 바 있으나 구체적인 인수가격을 밝히지는 않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린 결정입니다. 동아쏘시오홀딩스의 다른 계열사인 에스티팜은 화합물을 대량 생산하고 에스티젠바이오에서 항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으니, 우리가 가진 링커 기술과 만나면 함께 성장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어요. 교수의 직업병이 있어요. 알려줄 수 있는 건 뭐든 다 가르쳐주고 싶은 본능이 있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뭐든 전수해 줄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에 대한 관심은 저버릴 생각이 없다. “외국의 제약회사와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제약회사는 갈 길이 멀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규모에서부터 차이가 커요. 신약을 만들기 위해선 임상 1상에 들어가는 데까지 최소 250억원이 듭니다. 성공 확률은 10% 남짓이니 신약 하나에 2500억원이 드는 셈이죠. 국내 기업은 외국 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신약 개발 투자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규모를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인수합병입니다. 참신한 기술을 가진 바이오벤처기업과 자본력을 가진 중견기업이 손을 잡는 겁니다. 앱티스와 동아ST의 인수합병이 좋은 사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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