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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수포자가 숫자에 눈 뜨고 개발한 것 "당신의 일이 요즘따라 부진한 이유"

AI 기반 재무보고서 생성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AI 기반 재무관리 플랫폼 아이씨를 개발한 에이미 리 대표. /더비비드

성공적인 CEO들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일기쓰기’다. 일기는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문제를 직시하다 보면 좋은 결정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기록의 힘이다.

재무제표는 기업의 일기다. 그동안의 거래 내역, 성과, 지출 등을 이 고스란히 담긴 성적표이기도 하다. 기업의 회계장부에는 꼭 필요했던 지출과 불필요한 지출이 모두 담겨있다. 잘 활용하면 이정표가 된다.​

에이미 리(24) 대표 역시 좋은 결정의 단초가 기록에 있다고 봤다. 인공지능(AI) 기반 재무관리 플랫폼 아이씨(AICY)를 개발한 계기다. 에이미 리 대표를 만나 재무 기록이 기업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들었다.

◇ ‘숫자’에 눈 뜬 수포자

에이미 리 대표는 토론토대에서 역사학과 인문학을 전공했다. /에이미 리 대표 제공

에이미 리 대표는 토론토대에서 역사학과 인문학을 전공했다. 스스로를 ‘수포자’(수학포기자)라고 소개했지만 휴학 중 공인관리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갓 스무 살이 됐을 때 PR회사에서 인턴 AE로 근무하며 금융권 클라이언트를 담당했다. 스타트업, 사모펀드, NGO 등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며 견문을 넓혔다. 이후 ERP(회계 프로그램) 개발 스타트업의 IR 부서에서 2년간 일했다.

- 역사학을 전공했는데 회계사 자격증을 택한 이유는요.

“역사학은 너무 재미있었지만 이걸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요. 공인회계사였던 아버지 권유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해보니 역사와 회계 모두 ‘기록의 학문’이라는 점에서 결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회계는 기업의 역사이자, 유일하게 검증 가능한 기록이거든요.”

에이미 리 대표는 역사학과 회계 모두 '기록의 학문'이라고 말했다. /에이미 리 대표 제공

-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했네요.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회계사이자 창업 1세대이십니다. ‘스티브 잡스가 되고 싶다면 대학을 중퇴해야 한다’는 말을 딸에게 하시는 그런 분이셨어요. 학업보다는 경험과 도전을 강조하셨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덕에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창업 계기가 궁금합니다.

“두번째 회사에서 IR 활동을 하면서 해외의 벤처투자사(VC)를 만나고 다녔는데요. 이때 VC들이 투자사로부터 재무제표를 제대로 공유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재무 정보를 알아야 투자사별 성과를 취합해서 포트폴리오를 관리할 수 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죠. ‘기업의 재무정보를 정리해서 리포트를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투자하겠다’고 제안한 VC도 있었어요. VC들이 겪는 불편점을 개선해보기로 했어요.”

◇ 이렇게 중요한데 방치되고 있었던 뜻밖의 데이터

아이씨를 소개 중인 에이미 리 대표. /더비비드

VC를 타깃으로 재무 정보를 넣으면 자동으로 리포트를 생성하는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다. 2022년3월 법인을 설립하고 사명과 서비스명을 아이씨(AICY)로 지었다. AI로 효율성(efficiency)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다. ‘이해한다’는 의미의 영어 ‘I see’의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개발에 착수하니 기업 재무회계 담당자들이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알고 보니 기업단에서부터 재무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VC가 정제된 정보를 공유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 대상으로 노선을 전환하기로 한 계기다.

- 아이씨는 어떤 솔루션인가요.

“회계정보를 업계에서는 ‘기장 데이터’라고 합니다. 기업들은 오라클, 경리나라 같은 ERP에 기장 데이터를 입력하는데요. 입력된 기장 데이터는 엑셀 파일로 추출할 수 있습니다. 아이씨는 엑셀 파일을 따로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업로드하면 3분 안에 데이터를 추출해서 이를 기반으로 재무 분석 리포트를 만들어주는 솔루션입니다. 리포트는 월 단위로 만들 수 있어요. 현금 흐름, 매출 추이, 공헌이익, 손익분기점 여부 등을 시각화해서 보여줍니다. 재무 지표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죠.”

아이씨는 웬만한 erp와 호환된다. /아이씨

- 이런 솔루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재무정보는 기업 설립일부터 폐업하는 날까지 일련의 과정을 모두 설명하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매출이 발생해도 영업이익이 적자라면 재무제표 분석으로 원인을 파악할 수 있죠. 기업의 모든 거래 건을 꾸준히 추적하고, 관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들인 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이상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지 않은 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에요. 동시에 주식시장 내에서 다른 이해관계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공통의 룰(rule)이기도 하죠. 이 룰에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뽐낼 수 없어요.”

- 그렇게 중요하면 알아서 관리하지 않을까요.

“생각보다 많은 기업이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성장이 절실한 초기 스타트업의 상황은 더 심각해요. 이들에게 회계는 1년에 한번 있는 세무 신고용 절차에 불과합니다. 좋은 경영을 위해서 해야 하는 회계를 세무 신고 때문에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왼쪽부터) 아이씨로 뽑아낼 수 있는 재무 리포트와 시각화 대시보드. /아이씨

- 초기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하면 시장이 너무 작지 않나요.

“중견기업이나 대기업 실무자들의 수요도 확인했습니다. 실무자들은 분석 리포트를 만들 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칩니다. ERP로부터 전체 데이터를 다운로드한 다음에 필요한 데이터만 따로 추출해야 합니다. 해당 데이터를 또 다른 액셀 파일로 옮겨서 정리하고 계산해야 하죠. 반복 작업에 너무 긴 시간을 투입하는 겁니다. 아이씨를 이용하면 공인회계사가 정리한 수준의 인사이트를 쉽고 빠르게 도출할 수 있습니다. 전문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어요.”

- VC에서 기업 대상으로 타깃을 바꾸면서 달라진 점은요.

“처음엔 자기자본이익률, 자기자본부채비율처럼 전문가가 알법한 용어를 총망라했습니다. VC가 타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기업 대상으로 노선을 트니 ‘너무 어렵다, ‘보다 쉽게 보여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때부터 정체성을 바꿨어요. 사용자가 원하는 지표만 골라서 리포트를 만드는 식으로 서비스를 기획했습니다. 재무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보고서를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주는데 방점을 찍었죠.”

◇ 팁스 선정된 초기 스타트업의 무서운 저력

아이씨의 팀원들. 상단에서 오른쪽 인물이 에이미 리 대표다. /아이씨

2022년 말 베타 서비스 론칭 후 2023년 한 해 동안 검증 기간을 거쳤다. 400곳이 넘는 기업을 대상으로 무료 체험을 진행하면서 피드백을 수렴하고, 부족한 점을 개선해 나갔다. 작년 9월 아이씨 정식 버전을 출시했다.

아이씨는 재무의 불모지로 꼽히는 한국 시장에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 지난 6월 중소벤처기업부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TIPS)에 선정됐고, 같은 해 10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에 진출했다.

- 아이씨만의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첫번째는 확장성입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ERP도 끌어올 수 있습니다. 글로벌 진출에 용이하다는 의미죠. 두번째는 콘텐츠의 범용성입니다. 저희는 세무 분야는 관할하지 않아요. 경영자를 위한 관리회계에 포커스를 두고 있죠. 세무까지 건드릴 경우 국가마다 다른 규제를 적용해야 해서 해외 진출이 어려운데요. 전세계 공통인 관리회계를 다루기에 해외 진출 시 현지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솔루션 그대로 미국 스타트업에 적용하라고 해도 할 수 있어요. 마지막은 효율성입니다. 사용자가 해야 하는 업무의 대부분을 자동화했습니다. 극적인 효율성을 보여줘야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50%를 대신하는 걸로는 부족해요. 99%를 대신해야 변화를 일으킬 수 있죠.”

에이미 리 대표는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재무 데이터를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비비드

- 아이씨에 대한 시장 반응이 궁금합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솔루션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재무정보는 망해봐야 보인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여러 번 창업해본 분들이 저희 서비스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어요. 온갖 청신호와 적신호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니까요. 투자자나 심사위원들로부터 ‘해외 시장에서의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팁스 투자 심사를 수월하고 통과한 것 같아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거의 못 들었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2024년은 버티는 해가 될 거란 말이 돌아요. 초기 스타트업으로서 재무적인 성과를 내면서 생존하는 한 해를 보내려 합니다. 손익분기점을 넘겨서 외부 투자 없이도 자체 생존하는 스타트업이 되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관리회계의 발상인 해외에 진출하려 합니다.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했어요. 해외에는 이미 재무 정보를 활용한 소프트웨어가 많은데요. 그만큼 도전해 볼만한 일이 많지 않을까요.”

- 회계전문가로서 동료 창업가들을 위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스타트업 빙하기 이후 투자자들이 과거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생존 능력을 증명해야 투자 받을 수 있다는 의미죠. 그 출발은 숫자를 관리하는 겁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특히 재무 데이터를 신경 썼으면 해요. 매출만 보지 말고 비용과 이자 수준도 따져봐야 합니다. 방치하고 있다가 나중에 큰 코 다칠지도 몰라요.”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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