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한 계약 관리 솔루션 프릭스 개발한 래티스 강상원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첫 달 무료 이벤트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다음 달 결제일 전까지 해지하지 않으면 계약이 자동으로 갱신된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치 이용료가 결제돼 버린다. 허무한 소비가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일은 기업 간 거래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담당자가 퇴사하거나 다른 팀으로 옮겨갈 때 특정 계약 관리를 놓치면 불필요한 비용이 나간다. 심한 경우 계약 사항을 이행하지 않아 소송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변호사 출신인 강상원 래티스 대표(35)는 계약 관리만 제대로 해도 많은 분쟁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봤다.
◇변호사의 눈에 띈 불편함
2007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로스쿨법(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그 영향으로 일찍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2학년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해 2011년 차석으로 합격했다. 2013년 사법연수원 43기로 들어가 2014년 1월 수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판사나 검사가 될 생각뿐이었어요. 군 생활을 하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군법무관으로 26사단, 서울중앙지검 등에서 복무했는데요. ‘공직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상상했더니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더군요. 민간 영역에선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판사나 검사가 아닌 변호사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2017년 제대 직후 법무법인 김앤장에 입사했다. “김앤장은 변호사 수만 700~80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데요. 전 주로 M&A(인수합병)와 파이낸스 분야를 맡았습니다. 비즈니스 거래 절차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률적 이슈를 분석하고 거래 구조를 설계하는 등의 일을 했죠. 정시 퇴근은 고사하고 자정 퇴근도 감지덕지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마음 한편엔 늘 ‘창업’이 있었다. “일은 평생 할 텐데 기왕이면 내가 설정한 목표를 갖고 싶었습니다. 변호사로 창업하는 가장 빠른 길은 로펌 개업이었어요. 2018년 동료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최선’을 설립했습니다. 대표가 되니 일하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영업에 할애해야 했습니다. 의뢰인을 만날 땐 법률적 분석을 미리 마치고 결론을 들고 갔습니다. 의뢰인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말보다 법률전문가의 명확한 조언을 더 듣고 싶어 하거든요. 덕분에 초기에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고객사가 겪는 분쟁의 상당수는 ‘계약’과 관련이 있었다. “계약 관리의 시작과 끝은 고객(또는 거래처) 정보 관리인데요. 문제는 주로 담당자가 바뀔 때 발생하더군요. 퇴사, 부서 이동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특정 계약이 누락돼 그 존재 자체가 잊히는 경우죠. 계약에 명시된 날짜에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 지체상금을 물어야 할 수 있고, 원치 않는 계약이 자동으로 갱신될 수도 있죠.”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계약 관리는 법무법인에서도 고질적인 문제였다. “단계별로 다른 소프트웨어나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불편했어요. 가령 계약을 맺을 땐 대면 또는 전자서명 서비스를 이용해 비대면으로 합니다. 계약 내용을 이행한 후 대금을 청구 지급할 땐 엑셀 파일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거래명세서를 보내죠. 세금계산서 발급은 국세청 홈택스에 접속해야 합니다. 전 과정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했죠.”
돈을 주고 구독할 생각으로 찾아봤지만 그런 서비스는 없었다. 미국엔 있었다. CLM(Contract Lifecycle Management)이라는 계약 주기 관리 서비스가 급성장하고 있었다. “미국, 일본의 CLM 서비스가 있었지만 한국에서 쓰기엔 적합하지 않았어요. 한국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계약의 시작부터 끝까지
2023년 벤처캐피탈 스프링캠프가 운영하는 공유오피스에 홀로 입주했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유능한 개발자가 필요했어요. 공유오피스 입주자들끼리 모인 커뮤니티에 한 개발자가 올린 자기소개 글을 보고 ‘이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공동창업자가 된 이재하 CPO(최고제품총괄)였죠.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더 믿음이 갔습니다.”
5월 10일부터 6월 20일까지 약 40일간 마라톤 같은 개발이 이어졌다. 마침내 한국형 계약 주기 관리 서비스 프릭스(prix)를 개발했다. “주요 기능은 전자계약 체결, 계약 일정 관리, 영업문서 작성 및 발송 등 3가지였어요. 클로즈 베타(특정인에게만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며 오류를 잡고 서비스 안정화에 집중하는 단계) 버전으로 출시해 25개 사에 배포했습니다.”
6개월간 고객사와 수십, 수백 번의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피드백을 바탕으로 서비스를 고도화해 나갔다. “이를테면 ‘고객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계약을 관리하고 싶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고객을 기준으로 계약 히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 사이사이에 계약서가 들어가고요. 일련의 영업 활동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대시보드를 만들었습니다.”
B2B(기업간거래) 중심의 IT 회사,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얼리어답터가 됐다. 6개월간의 클로즈 베타를 종료할 시점엔 프릭스에 가입한 고객사가 99개 사에 달했다. 고객사들끼리 입소문이 난 덕이다. 2023년 10월 유료로 전환했다.
“일반적으로 계약은 잠재 고객 확보, 영업, 계약, 청구, 세금계산서 발급, 결산 등의 과정을 거치는데요. 프릭스로 계약의 전 주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견적서 발송과 전자 계약 체결, 세금계산서 발급까지 가능하죠. 또 이 모든 정보를 다 모으면 통합적인 재무 관리가 가능해집니다. 계약 정보를 기반으로 ‘언제 어떤 돈을 받을지’ 등 미래 현금 흐름을 예측할 수 있게 되죠.”
◇격자로 바라보는 세상
사명은 래티스(Lattice)다. 故 찰리 멍거(Charles Munger)의 명언에서 따온 말이다. “찰리 멍거는 ‘정신적 격자 모형(lattice of mental frame)’을 강조했습니다. 현명하게 사고하기 위해선 여러 사고의 틀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죠. 스타트업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래티스는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2023년 11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가 주최하는 디데이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상을 받았다. 프릭스를 사용해 본 기업의 유료 전환율은 17%다. 현재 유료로 사용하는 고객사는 20여 곳이다. “매출로 따지면 몇백만원 수준입니다. 변호사로 일하던 때와 비교하면 1/10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일하고 있죠. 그래도 어느 때보다 희망적입니다. 계약서를 안 쓰는 회사는 없으니까요. 언젠간 ‘프릭스를 안 쓰는 회사는 없을 것’이란 말이 통용될 겁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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