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집보다 공장이 좋았던 중2 소년, 20년 후 포스코에서 만든 것

더 비비드 2024. 6. 20. 14:34
제조업 특화 생산성 향상 솔루션 '마이너리포트' 개발한 앰버로드 임언호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제조업 특화 생산성 향상 솔루션 '마이너리포트' 개발한 앰버로드 임언호 대표. /더비비드

세상은 점점 스마트(smart)해지고 있다. 우리 손에는 저마다 하나씩 스마트폰이 들려 있고, 농장은 스마트팜(smart-farm)으로, 도시는 스마트시티(smart-city)로 변화하는 중이다. 공장도 마찬가지다. 스마트 팩토리(smart-factory)에서는 정보통신기술(ICT)를 활용해 공정을 자동화하고 있다.

하지만 제조업 현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포스코 현장에서 12년간 근무한 임언호 앰버로드 대표(40)가 발견한 문제점이었다. 다양한 인공지능(AI) 솔루션이 개발됐지만 제조업 공장 도입률은 87%에 그쳤다. 도입하더라도 투자 대비 수익은 4.3%에 불과했다. 현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임 대표는 동료들과 함께 제조업에 특화된 생산성 향상 인공지능 솔루션 ‘마이너리포트’를 직접 개발했다. 임 대표를 만나 그가 개발한 AI는 무엇이 다른지 들었다.

◇17살에 중학교 2학년

17살에 중학교 2학년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고등학교 학창시절. /임언호 대표 제공

중학생 시절 잠시 방황했다. 한동안 학교 대신 공장으로, 등교가 아닌 출근을 했다. “돈을 빨리 벌고 싶었어요.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용접 공장, 프레스 공장, 귀금속 공장 등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때부터 기술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죠. 17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요.”

일찍이 진로를 선택해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공고에선 성적보다 자격증 취득이 성실함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어요. 3년간 금속·제강·열처리 등 총 17개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당시 이례적인 기록이라 지역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죠.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친구들과 달리 대학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신소재공학과에 입학했다.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큰 벽으로 다가왔다. “미적분도 몰랐고, 영어 문법에서 5형식이 있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어요. 똑같은 출발선에 섰는데 인문계 출신 동기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있는 느낌이었죠. 친구들이 새내기의 기쁨을 만끽할 때 전 도서관에 틀어박혀 1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기본을 다지고 나니 2학년부턴 공부가 재미있더군요. 덕분에 학점 4.5점 만점에 4.43점을 받아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포스코 제강부에서 근무하던 모습. /임언호 대표 제공

졸업 직후 2012년 2월 포스코에 입사했다. 신입사원 교육 막바지에 인사 팀원이 ‘어떤 부서에 가고 싶은지’ 물었다. 받아 든 종이엔 1·2·3지망 그리고 빈칸 세 개가 있었다. “철강을 제조하는 부서인 ‘제강부’를 세 번 연달아 써서 제출했습니다. 사실 제강부는 힘들다고 정평이 난 기피 부서예요. 생산·품질 관리의 핵심인 곳이기 때문이죠. 나중에 전해 들으니 인사팀에서 절 정말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고된 업무량으로 4년을 버티다시피 일했다. 이후 품질기술부로 부서를 이동했다. “부서 이동을 했던 2016년은 알파고가 뉴스를 장식한 해였어요. 전사적으로 AI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당시 제 관심사는 ‘비용 절감’이었어요. 공정 과정에서 낭비를 줄이고 싶었습니다. 품질이 좋을지, 나쁠지를 예측해야 낭비를 줄일 수 있지만 여기에 투입되는 비용조차 아까웠죠. AI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습니다.”

◇나의 한계와 인공지능의 한계

포스코 포항제철소 철강 제조 공정 모습. /유튜브 포스코TV 캡처

용감하게 손은 들었지만 막막했다. AI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독학만이 길이었다. “포스코DX에서 코딩 없이도 AI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전사에 배포한 노코드 툴이 있는데요. 그 툴을 쓰면서 컴포넌트(개별 모듈을 미리 만든 뒤 조립하는 기술)가 뭔지,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변환하고 합쳐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엑셀로 가지고 있던 데이터를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요.”

독학에도 한계가 있었다. “혼자 AI 솔루션을 개발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어요. 2017년부터 외부 AI 업체와 협업해 솔루션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죠. 하지만 AI 전문가에게도 한계가 있었어요. 현장 지식이 없다는 점이죠. 가령 철강판을 제조할 때 불량품이 나오는 변수로 강판의 ‘길이’를 제시하더군요. 현장 전문가 입장에선 얼토당토않은 얘깁니다. 의구심을 품고 길이가 긴 불량품을 분석해 보니 ‘고합금강(탄소 이외의 합금 원소가 많이 들어 있는 강철)’이란 변수가 영향을 줬던 거였죠.”

품질기술부에 재직하던 당시 사내 스마트팩토리 대회에서 ‘후판 내부 품질 예측을 통한 품질 낭비 최소화’라는 과제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임언호 대표 제공

2년간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상용 설비에 적용할 만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철판 1000개를 만들 때 5개의 불량품이 나오는데요. 불량품을 찾아내려고 180개의 철판을 따로 빼 일주일간 식힌 다음 검사합니다. 최종 불량품 5개에서 불량 요소를 제거하고 다음 공정을 위해 180개를 다시 1200도로 재가열해요. 비효율적이죠. AI 알고리즘을 이용해 불량품 확인용 물량 비율을 18%에서 10%로 줄였습니다. 주조 과정에서 발생한 쇳물 성분 등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불량품을 예측하도록 했죠. 8%를 줄인 것만으로 연간 105억원을 절감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AI로 성과를 냈더니, 다른 엔지니어나 연구원의 과제를 지원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2019년 한 해에만 30명의 과제를 지원했습니다. 저품질 원인 분석, 생산성 향상 등 저마다 안고 있는 문제는 다양했어요. 그런데 AI를 활용하니 해결 방법은 비슷하더군요. 예컨대, 정품과 불량의 특징을 학습시켜서 패턴을 포착한 후 품질을 향상시켰습니다. 생산성의 경우 60% 이상은 참, 40% 미만은 거짓 등으로 학습시키면 AI가 이를 해석합니다. 하나의 툴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사업화 가능성을 엿봤습니다.”

그 무렵 사내 유학제도로 AI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2020년부터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포스텍에서 산업인공지능을 공부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AI와 산업현장의 괴리감을 더욱 체감했습니다. AI 전문가들은 ‘사람을 잘 따라 하는 AI’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산업현장에선 그보다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AI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자면 현장과 AI를 모두 잘 알아야겠죠. 절망보다 확신을 가졌습니다. 어쩌면 내가, 아니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죠.”

◇호박길 앞에 펼쳐진 길

(왼쪽부터)김영길 CTO, 임언호 대표, 박도겸 COO. 50대, 40대, 30대로 구성된 드림팀이다. /임언호 대표 제공

현장 지식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AI나 ICT(정보통신기술) 영역에 대한 전문 지식도 필요했다. 드림팀을 꾸렸다. “포스텍에서 함께 공부했던 박도겸 COO(최고운영책임)가 AI 전문가로, 포스코그룹의 스마트팩토리 구축의 핵심 인력이었던 김영길 CTO(최고기술책임)가 ICT(정보통신기술) 전문가로 합류했습니다. 세 사람의 이름에서 글자를 따서 ‘호박길’이란 뜻의 앰버로드라는 사명도 지었죠.”

창업이 곧 퇴사는 아니었다. 포스코 사내벤처 프로그램에 선발돼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사업화 지원금으로 2억원을 받았습니다. 사무공간 등을 합치면 족히 5억원은 지원받았을 거예요. 포스코는 연구 중심의 창업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지방 소도시를 실리콘밸리 같은 창업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토대로 기술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죠.”

마이터리포트 UI·UX 화면. 엑셀 파일만 넣으면 분석은 AI가 대신해 준다. /임언호 대표 제공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AI 솔루션 개발에 더욱 매진했다. 제조업에 특화된 생산성 향상 솔루션에 '마이너리포트(Miner Report)’란 이름을 붙였다. “대용량의 데이터 안에서 유용한 정보를 발견하는 과정을 ‘데이터 마이닝’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마이너(채굴자)라는 의미를 가져왔습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연상되는 것도 의도한 겁니다. 미래를 예측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이 솔루션의 핵심 기능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엑셀을 기본 데이터 원천으로 삼았다. “90% 이상의 제조 기업이 엑셀로 업무를 하고 있어요. AI란 기술의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이죠. AI 지식 없이도 쓸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하고 싶었습니다. 데이터를 기록한 엑셀 파일을 업로드하기만 하면 첫 행·첫 열을 기준으로 분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주도록 했습니다. 이를테면 예측하고 싶은 품질 결과를 타깃, 학습할 데이터가 될 제품번호를 키, 낭비 분석을 위한 비용 발생 정보를 코스트 등으로 입력하면 됩니다. 엑셀만 쓸 때는 6개월 넘게 걸리던 일이 2주 만에 가능해지죠.”

마이너 리포트를 가리키며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임 대표. /더비비드

AI 지식이 없는 엔지니어도 하루 만에 학습해 사용할 수 있다. “현장 엔지니어는 물론 기업 경영자의 마음까지 훔칠 수 있는 솔루션이라고 자부합니다. 비용 절감에 최적화돼 있기 때문이죠. 쇳물로 예를 들면, 표준 규격을 맞추기 위해 특정 금속을 0.1~0.15% 비율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 작업자마다 투입량이 달라집니다. 누구는 9t을, 다른 누구는 11t을 넣는다면 평균값은 약 10t이 되겠죠. 이 편차를 줄여 0.1%에 꼭 맞는 8t을 투입할 수 있게 되면 평균 2t을 아낄 수 있게 됩니다. 규모가 클수록 비용 절감 효과는 더 커집니다.”

◇최종 목표는 제조 AI의 대중화

앰버로드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이 주관하는 ‘10월 디데이’에서 우승했다. /디캠프

2023년 앰버로드의 매출은 5000만원이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첫 계약을 맺었습니다. 철강이 아닌 다른 분야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어떤 제조업이든 마이너리포트와 딱 맞을 거예요.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온도·성분 등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주기 때문에 ‘진짜 스마트 팩토리’를 구현할 수 있죠. 그것이 곧 ‘제조 AI의 대중화’라고 생각합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정주영창업경진대회 최우수상을 비롯해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이 주관하는 ‘10월 디데이’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많은 창업가들이 ‘고독하고 외로운 건 당연하다’고 말하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줄여서까지 사업에 모든 에너지를 쏟기도 합니다. 솔직히 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가족은 물론 공동창업한 동료들과 생각과 고민을 나누면서 얻는 에너지가 너무 크거든요. 제 업무 효율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입니다. 데이터를 넣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마이너 리포트도 그렇게 분석해 낼 거예요.”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