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멜론 외길 인생 걸어온 곡성 멜론 농부 김재덕 씨
전라남도 곡성군은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2016년 영화 ‘곡성’이 “뭣이 중헌디!”라는 유행어를 낳으면서 유명해졌다.
곡성에서 가장 중한 것은 농사다. 딸기·감자·블루베리 그리고 멜론의 주산지다. 일차선 도로 양 옆으로 농기계용 도로가 별도로 나 있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멜론이 가장 중하다’는 김재덕 씨(56)를 만났다. 그는 2020년 8월 홍수가 나서 빗물이 마을을 뒤덮었을 때 23명의 마을 주민을 구해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이력이 있다. 30년간 멜론 농사를 지은 김 씨에게 멜론의 모든 것을 들었다.
◇제철 맞은 곡성 멜론
1982년 곡성 땅에 멜론이 처음 뿌리를 내렸다. 이후 곡성에선 약 150개 농가(2022년 기준)가 멜론을 재배하고 있다. 100㏊(헥타르)를 웃도는 면적의 농지에서 1년에 1500톤 이상의 멜론을 생산한다. 주 품종은 겉에 그물 모양이 난 얼스계통의 ‘네트 멜론’이다. 그물 무늬가 굵고 촘촘하며 진한 머스크(사향)향이 특징이다. 곡성군은 곡성 내에서도 멜론을 가장 활발하게 재배하는 금예마을을 ‘멜론 마을’로 지정했다. 멜론 벽화, 멜론 카페, 멜론 우체통 등 온 동네가 멜론으로 꽉 찼다.
곡성이 멜론에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연 ‘맛’이다. 전남 곡성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가운데 움푹 팬 곳에 평야가 형성돼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멜론 하우스가 밀집해 있다. 분지의 특성상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하다. 이런 기후가 높은 당도의 비결이다. 큰 일교차는 낮에 광합성으로 생성된 영양분이 밤에 열매로 옮겨가는 데 도움을 준다. 둘레 50㎝에 무게 2㎏ 나가는 곡성 멜론의 당도는 13브릭스 이상이다.
품질 좋은 과실 재배의 또 다른 비결은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한 덩굴에 열매 하나만을 남기고 다른 열매는 솎아내는 ‘1주 1과’ 재배법을 고수한다. 3개 과에 갈 영양분이 1개 과에 집중되니 더 크고 탐스러운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다. 곡성 멜론은 5월부터 7월까지가 제철이다.
◇딸기 농부가 낳은 멜론 농부
김재덕 씨는 곡성에서 나고 자랐다.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건설회사에서 현장직으로 일하며 집을 짓고 다리도 만들었다. 잔업 수당을 포함한 월급이 200만원을 넘었다. 당시 대기업 초임 월급이 100만원 남짓이었다. 낮에 일을 하고 야간엔 전남과학대학교 원예학과에서 수업을 들었다.
“언젠간 부모님처럼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어요. 그땐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죠. 부모님은 2000평(약 6600㎡) 규모로 딸기 농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직장생활 5~6년 만에 사직서를 썼어요. 살림살이를 다 짊어지고 다시 곡성에 터를 잡았죠.”
1993년부터 정식으로 멜론을 들여왔다. 멜론은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딸기와 반대로 고온성 작물이기 때문에 한 하우스에서 겨울엔 딸기를, 여름엔 멜론을 키우는 게 가능했다. 점차 굴러온 멜론이 박힌 딸기를 빼냈다. 멜론이 곡성의 대세 작물로 자리매김하면서 2005년 곡성군은 국내 최초 농림부 지정 멜론수출원예단지로 선정됐다.
“멜론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된 지 올해로 딱 30년 됐습니다. 딸기 농사는 사실상 손을 놨어요. 대신 멜론 하우스를 야금야금 넓혔죠. 처음엔 낮은 이자로 임대하는 국가 보조사업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5년 전 평당 3만~4만원대로 땅을 추가로 매입하면서 지금의 부지를 완성했습니다. 현재 총 20개 동에서 멜론을 재배하고 있어요. 하우스 하나에 250평(약 826㎡)이니 총 5000평(약 1만6528㎡) 규모죠. 다 모아 놓으면 축구장 2개를 합친 것보다 넓습니다.”
김 씨의 부모님도 이젠 멜론을 아낀다. “어머니 피부가 약해서 멜론 잎을 만지면 약한 두드러기가 올라오는데요. 그런데도 수확하는 날엔 꼭 멜론밭에 들어가 일을 도와주십니다. 일하다가 너무 더울 땐 물 대신 멜론을 함께 까먹기도 하고요.”
◇멜론 그물 모양의 비밀
멜론은 모종을 땅에 심은 뒤 수확하기까지 약 90~100일이 걸린다. 작기가 짧은 편이라 이론적으로는 1년에 최대 4번까지 재배할 수 있다.
멜론 농가는 요즘 같은 수확 철엔 새벽 4~5시에 일어나야 한다. 오전 10시까지 하우스에서 멜론을 가꾸다가 낮엔 다시 집으로 간다. 5월에도 한여름처럼 더워서 낮엔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다시 멜론 하우스로 출근한다. 이처럼 열대작물인 멜론을 재배하려면 하루 2번 출·퇴근을 각오해야 한다.
- 많이 재배할수록 생산량이 많겠네요.
“농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는 1년에 한 번만 재배합니다. 3기작을 해보니 지력(地力)이 약해지면서 갈수록 열매가 작아지고 당도가 떨어지더군요. 사람도 땅도 고생만 실컷 하고, 정작 좋은 멜론을 얻을 순 없었습니다. 한 덩굴에 한 열매만 키우는 ‘1주 1과’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 멜론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오늘(5월15일) 수확할 멜론은 지난 1월 20일에 심었어요. 묘를 심기 일주일 전부터 난방을 최대로 틀어줘야 합니다. 야간 온도가 적어도 15도를 넘기도록 유지합니다. 하우스 안에서만큼은 겨울이 아니라 여름인 것처럼 멜론을 속이는 겁니다. 본래 누워서 자라는 멜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한 덩굴 당 줄을 하나씩 매달아 줍니다. 줄을 따라 수직으로 자라면서 수꽃과 암꽃이 피죠. 이때 벌을 넣어 약 일주일간 수정을 시킵니다. 그러고 나면 멜론 열매가 하나씩 맺히죠. 한 주에 2~3개 과가 열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제일 큰 과만 남기고 잘라냅니다. 멜론이 커 갈수록 마치 튼살이 생기듯 그물 모양이 생겨요. 세로로 가늘게 틈이 생기는 듯하다가 며칠이 지나면 가로로도 균열이 생기고 점점 그물 모양이 두꺼워지죠.”
- 멜론이 잘 여물었는지 어떻게 확인하나요.
“농부들끼리는 ‘잎이 탄다’고 표현하는데요. 멜론의 잎이 마르거나 색이 갈색으로 변하면 당도가 충분히 오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확을 앞두고는 최소 15일간 단수합니다. 물을 많이 머금으면 멜론이 상대적으로 싱거워지기 때문이죠. 5월 초에 비가 오면서 수확일이 몇 번이고 밀렸는데요. 그때마다 멜론을 한 통씩 쪼개 당도를 확인했습니다. 13브릭스를 넘지 않으면 당도가 더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 멜론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2020년 8월 홍수가 나서 온 마을이 말 그대로 초토화됐습니다. 물이 발목까지 찰랑찰랑하더니 순식간에 하우스를 덮을 만큼 차올랐어요. 그 해 농사는 쫄딱 망했죠. 여름 내내 수해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당시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동네 어르신 댁을 집집이 다니면서 가전제품을 고쳐드리거나 전기 배선을 손봐드렸습니다. 지금도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불안감이 엄습해요. 올여름에도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 수확한 멜론은 어디로 보내나요.
“생산량 일체를 농협으로 납품합니다. 예전엔 개인적으로 포장용 상자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는데요. 2009년 곡성농협농산물산지유통센터가 생기면서 멜론을 쪼개지 않고도 당도를 확인할 수 있는 비파괴 당도 측정이 가능해졌습니다. 제가 소비자 입장이라고 해도 비파괴 당도계를 통과한 멜론을 먹고 싶을 것 같아요.”
◇두꺼운 껍질 속 멜론 당도 확인하는 법
곡성에서 나는 멜론은 곡성농협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 모여 선별 과정을 거친다. 새벽에 수확한 멜론은 그날 저녁, 저녁에 수확한 멜론은 이튿날 오전에 선별한다. 수확 후 2~3일 이내에 출하하기 위해서다.
2022년 곡성농협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서 선별돼 시장으로 나간 멜론은 약 1505톤이다. 연 매출은 57억원이다. 한희주 센터장(49)에게 곡성 멜론의 선별·유통 과정을 들었다.
- 멜론은 어떻게 선별하나요.
“먼저 육안으로 상처 난 곳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비파괴 방식으로 당도를 측정합니다. 멜론을 하나씩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으면 레이저 당도계로 멜론의 당도를 확인할 수 있죠. 이후 크기별로 구분합니다. 8㎏용 박스에 몇 개가 들어가는지에 다라 4수·5수·6수 등으로 나누는데, 4개가 들어가는 4수가 가장 상품(上品)입니다. 마무리로 꼭지를 다듬은 뒤에 포장용 박스에 담아 차곡차곡 쌓으면 출하 준비는 끝입니다.”
- 멜론의 유통 경로가 궁금합니다.
“선별을 마친 멜론은 빠르면 반나절 만에 대형마트, 백화점 등에 진열됩니다. 해외 수출길도 탄탄해요. 특히 멜론을 고급 과일로 여기는 일본에서 인기가 많죠. 2021년엔 일본·싱가포르·홍콩 등에 1억6100만원어치 수출했습니다. 다만, 내수 시장을 먼저 챙긴 후에 남는 물량만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2년엔 3800만원어치만 해외로 향했죠.”
◇하늘이 정해주는 운명
농사도 투자가 필요하다. 2022년 김 씨는 4000만원을 들여 멜론 하우스에 전기 열선을 깔았다. 겨울에도 하우스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투자금 회수 여부는 하늘에 달렸다.
- 연 매출이 궁금합니다.
“하우스 한 동에 1750주를 심었으니, 하우스 하나당 예상 매출은 약 1800만~2000만원입니다. 여기에 20동을 곱하면 총 4억원 정도죠. 이 중 30~40%가 인건비, 비료 등 고정 비용으로 나갑니다. 물론 최상의 시나리오일 때를 가정한 매출입니다.”
- 좋은 작황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실 농부는 모든 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해 농사를 결정하는 건 결국 자연이거든요. 멜론에 흰색 가루가 생기는 흰가루병 등 병충해가 들면 폐기량이 늘고,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덮치면 농작물을 모두 떠나보내야 하죠. 반대로 환경이 받쳐주면 작황이 좋아 그만큼의 결실을 누리겠죠. 농부는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맛있는 멜론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꼭지와 멜론이 만나는 지점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멜론의 그물 모양이 꼭지를 타고 올라가려는 듯 보이는 과실이 당도가 높습니다. ‘멜론 바닥이 물렁물렁해야 맛있다’는 속설도 있는데요. 바닥이 물렁물렁한 건 후숙이 잘 됐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정도가 심하다면 과하게 숙성된 ‘과숙’ 상태예요. 수확할 땐 바닥이 조금만 말랑해도 폐기합니다. 유통 과정에서 과숙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죠.”
- 농부님에게 멜론은 어떤 의미인가요.
“보물 1호입니다. 멜론 농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걸 키워볼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배운 게 이것뿐이라 제겐 멜론만큼 쉬운 게 없습니다. 멜론과 30년간 부대끼면서 장성한 아들 하나, 딸 둘을 키워냈습니다. 아버지로서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이영지 에디터
'인터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수기엔 트럭줄만 5km, 밤 12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곳의 하루 (0) | 2024.06.26 |
---|---|
사슴벌레 눈썹 한국인이 만든 '곤충 호텔', 일본에서 히트 (0) | 2024.06.26 |
어렵게 들어간 건설사 사표내고, 대기업들 매료시킨 아이디어 (0) | 2024.06.26 |
한국 반도체 연구원이 중국의 '기술 팔라' 유혹 이기고 개발한 것 (0) | 2024.06.26 |
92년생 전역 군인이 5000평 파프리카 농장 해서 버는 연수입 (0) | 2024.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