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성수기엔 트럭줄만 5km, 밤 12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곳의 하루

더 비비드 2024. 6. 26. 14:46
국내 최대 농산물유통센터의 하루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과일이 유통되는 현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원길 안성농식품물류센터 상품화사업부 부장)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 /더비비드

지난 11일 오전 9시.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를 찾았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500m 앞이라고 안내하자 저 멀리 물류센터 건물이 보였다. 마치 언덕 위에 항공모함을 얹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가로 320m, 세로 70m 규모로 축구장 3개를 합친 크기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로 건축 면적은 약 5만9000㎡(1만8000평)다.

이곳에서 일하는 400여 명의 직원 중 절반 이상이 오후 5시에 출근해 해 뜨기 전 새벽에 퇴근한다. 새벽에 농부가 수확한 농산물을 바로 다음 날 전국의 대형마트·백화점 등으로 배송하기 위해서다. 별도의 처리 과정이 필요한 농산물을 제외하면 이곳에 입고된 농산물은 수확한 지 약 48시간 만에 소비자를 만난다.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가 과일 구독 서비스 '농협과일맛선''을 선보이면서부터 더욱 분주해졌다. 사진은 5월 맛선으로 내놓은 과일 구성./더비비드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가 최근 더욱 분주해졌다. 과일구독서비스 ‘농협과일맛선’을 선보이면서부터다.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의 하루를 쫓아가 봤다.

◇초과는 있어도 미달은 없다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는 전국의 농산물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일종의 환승역 역할을 한다. /더비비드

문을 연 지 올해로 11년째인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는 전국 최대 농산물유통센터다. 전국의 농산물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일종의 환승역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 분류·처리한 농산물을 싣고 떠나는 차량은 2022년 기준 하루 평균 148대에 달한다. 8.5톤 트럭에 실린 양파, 무, 감자, 사과, 포도 등은 도매시장법인·중도매인·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곧바로 배송된다. 자동분류·소포장 등의 시스템을 갖춰서 3~4단계의 유통 과정 밟을 필요 없이 안성물류센터 한 곳만 거치면 된다. 절감한 물류비용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안성물류센터는 2023년 5월부터 시작된 ‘농협과일맛선’의 품질관리·포장·유통도 담당하고 있다. 농협과일맛선은 월 5만원을 내면 6가지 종류의 제철 과일 한 꾸러미를 받아볼 수 있는 과일 구독 서비스다. 주산지에서 수확한 과일이 센터에 모이면 당도 검사 등의 품질 검사와 포장을 거쳐 매일 오후 6시에 출고한다.

소포장 등의 작업을 하는 2층에서 소형 지게차의 일종인 ‘전동자키’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더비비드

한가한 시간대라고 했지만 2층에서는 소형 지게차의 일종인 ‘전동자키’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박선규 기사(39)는 곤지암 센터를 거쳐 광주로 갈 토마토 2㎏ 35팩, 3㎏ 34박스를 한 팔레트(물품의 상·하차 시에 단위 수량 확인이 용이하도록 쓰는 1㎡ 내외의 판) 위에 쌓고 있었다. 배송지 권역별로 한 팔레트에 농산물을 모아 담고 떨어지지 않도록 랩으로 감고 나면 전동자키로 한 곳에 모은다. 박 기사는 “하루에 400~500박스 정도를 분류한다”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배송처와 주요 품목에 따라 팔레트에 나누는 피킹 작업이 한창이다. /더비비드

배송처와 주요 품목에 따라 팔레트에 나누는 작업을 ‘피킹(picking)’이라고 한다.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의 피킹 건수는 하루 20만건 내외다. 명절 대목에는 40만건을 웃돈다. 피킹 작업을 거친 농산물은 전국의 하나로마트를 비롯해 대형마트, 군부대, 학교 등으로 유통된다.

2022년 배송처 수는 하루 평균 293개였다. 최근 한 달 사이 340여 곳으로 늘었다. 박영호 센터장(54)은 “국산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덕분”이라며 “5월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과일이 유통되니 앞으로 물량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해남에서 재배된 바나나를 500g씩 소포장하고 있다. /더비비드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의 자랑거리는 전처리 작업이다. ‘전처리’란 소비자가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세척·다듬기 등을 미리 해두는 것을 말한다. 가령 에어건으로 양파 껍질을 벗기거나 대파 뿌리를 손질하는 식이다. 그 외에도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에서 전처리할 수 있는 농산물은 밤, 토마토, 단호박 등 40여 가지에 달한다.

전처리가 끝나면 소포장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양배추 한 통, 파프리카 2개 등 소매로 유통하기에 적절한 단위로 묶어 포장한다. 마침 두 명의 작업자가 바나나를 500g씩 포장하고 있었다. 박스에 붙은 라벨을 보니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재배된 바나나였다. 수축 진공 포장을 담당하고 있다는 김남순 씨(62)는 510~530g을 오가는 저울을 가리키며 “초과는 있어도 미달은 없다”고 설명했다.

◇불야성의 전초 기지

전국 각지에서 온 8.5톤 트럭이 농산물을 내려놓기 위해 줄을 섰다. /더비비드

오후 4시. 1층 배송장에 8.5톤 트럭 4~5대가 줄을 섰다. 늦은 오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재배한 농산물이 들어오기 시작해 오후 8시면 장사진을 이룬다. 양창남 과장(53)은 “물량이 많은 명절엔 이 줄이 4~5㎞ 거리에 있는 남안성IC까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갓 도착한 트럭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어떤 과일을 싣고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경북 문경시에서 왔다는 탁대형 기사(64)는 “사과를 들고 왕복 200㎞ 정도를 매일 오간다”며 트럭을 가리켰다. 이어 전남 무안군의 양파, 제주에서 온 골드키위·레몬 등이 줄줄이 도착했다. 지게차와 전동자키가 합세해 농산물을 안쪽으로 날랐다.

양파·카라향·레몬·골드키위 등의 농산물이 쉴새없이 들어왔다. /더비비드

1층 배송장 작업의 핵심은 ‘자동화’다. 자동분배시스템(DAS)으로 바코드를 스캔하면 배송처별로 지정된 구역의 번호가 뜬다. 바닥엔 노란색 정사각형이 그려져 있다. 총 374개로 한 거래처마다 한 칸을 할당한다. 하루 발주량은 25만~30만건에 달한다. 분배 작업자만 100명이다. 매일 새벽 3시까지 모든 물량을 분배한다.

바빠도 검품은 놓칠 수 없다. 토마토가 무르지 않았는지, 미나리가 푸른 빛을 잃지 않았는지 무작위로 뜯어 상태를 확인한다. 지역 농협에서 1차적으로 선별된 농산물이지만 배송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협상이 필요하다. 거래처에 연락해 10~20% 가격을 낮출 테니 구매할지, 반품할지 선택지를 내민다. 반품이 결정된 농산물은 다시 산지에 돌려보낸다.

1층 배송장 바닥에는 노란색 정사각형 374개가 그려져 있다. 한 거래처마다 한 칸을 할당한다. /더비비드

검수·검품·분류까지 끝난 농산물은 거래처 별로 한 팔레트에 쌓인다. 팔레트들은 배송처별로 번호가 매겨진 독(dock) 앞에서 순번을 기다린다. 농산물을 싣고 갈 트럭이 독에 엉덩이를 들이밀면 한 차에 최대 16 팔레트씩 실려 떠난다. 양 과장은 “밀어내기 형식으로 독 앞에 농산물이 계속 쌓이고, 실려 나가고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5만원에 제철 과일 한 꾸러미

6명의 작업자가 멜론·참외·사과·블루베리·대추방울토마토·파프리카를 상자에 하나씩 담고 있다. /더비비드

다시 2층으로 가 보니 컨베이어 벨트 옆으로 6명의 작업자가 붙어 서서 포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각자 멜론·참외·사과·블루베리·대추방울토마토·파프리카 등을 옆에 끼고 상품용 상자가 앞에 도착하면 담당한 과일을 하나씩 담았다. 과일 구독 서비스 ‘농협과일맛선’ 5월의 과일을 포장하는 현장이었다.

포장 과정에서 주안점을 둔 건 ‘파손 최소화’였다. 유통 과정에서 상자를 던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백승환 과장(45)은 “상품별로 칸막이를 만들어 부딪히지 않도록 했고, 1.5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실험도 했다”며 꼼꼼한 포장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농협과일맛선 5월의 과일. 배송 시 파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격이 생기지 않게 칸막이를 만들었다. /더비비드

농협과일맛선은 소비자들이 전국의 다양한 산지에서 재배되는 제철 과일을 놓치지 않고 맛볼 수 있도록 전달하자는 취지로 출발한 사업이다. 이를테면 4~5월엔 한라봉이 나오지 않는 대신 제철을 맞은 다른 만감류인 ‘카라향’이 나온다. 여기에 착안해 과일에 정기 구독 서비스를 접목해 국내산 제철 과일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로 한 것이다. 박영호 센터장(54)은 “수입 과일은 유통과정이 길어 방부제·보존제 처리가 필연적이지만, 국산 과일은 빠르면 수확 이틀만에 싱싱한 상태로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매월 제철 과일이 달라지니 농협과일맛선의 구성도 달리한다. 이를 위해 매월 10일을 전후로 다음 달에 선보일 과일을 정하는 상품선정위원회 회의가 열린다. 구매팀이 제안한 10가지 과일을 두고 임원진과 MD, 소비자 패널의 의견을 모아 6가지 과일을 선정한다. 다양한 품종을 접할 기회가 없는 소비자를 위해 6개 과일 중 적어도 하나는 꼭 희소 품종으로 정한다. 5월엔 하미과 멜론(수박 같은 식감에 안쪽이 주홍빛을 띠는 멜론), 6월엔 플럼코트(자두와 살구의 맛이 함께 느껴지는 신품종)를 포함하는 식이다.

수박 같은 식감에 안쪽이 주홍빛을 띠는 하미과멜론을 소개하는 박영호 센터장. /더비비드

‘희귀 과일이 포함된 5만원 과일 구독 서비스’는 일반 대형마트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업이다. 박 센터장은 “안성물류센터가 하루 최대 40만건에 달하는 물량을 처리하고 있고, 전처리·소포장 등의 설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생산량이 늘면서 평균 비용이 감소하는 현상)’가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농협과일맛선은 매월 원하는 날짜, 주소로 받아볼 수 있고 날짜·주소지 변경이 자유롭다. 박 센터장은 이어 “10만원대 명절 선물 세트와 농협과일맛선 꾸러미를 한자리에 놓고 보면 ‘5만원’의 구독료가 절대 비싸단 생각이 안 들 것”이라며 “과 크기, 당도 등 품질을 백화점에 납품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생을 위한 움직임

농협과일맛선 홍보모델 장민호와 이성희 농협중앙회 회장. /농협경제지주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에서 만난 이들은 빠지지 않고 ‘상생’이란 단어를 썼다. 8년 차 물류 담당자인 백승환 과장(45)은 “농협에서 일하기 전엔 소비자 입장에서 싼 가격이 가장 중요했다”며 “하지만 센터에서 일해보니 농산물을 직접 재배한 농부에게 충분한 보상이 돌아가는 시스템이어야만 모두가 상생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했다.

5월부터 선보인 과일 구독 서비스 ‘농협과일맛선’ 역시 상생을 위한 하나의 발걸음이다. 생산자에게는 새로운 판로를 열어주고, 소비자는 프리미엄 과일을 합리적인 가격에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성태 농협경제지주 농업경제대표이사(60)는 “농협과일맛선은 당도가 높고 신선한 과일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기 때문에 부모님과 자녀, 스승, 기업의 우수고객 등에게 마음을 전할 선물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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