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희경 나인투식스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30대 여자가 이걸 해?” 기능성 깔창 및 신발 제조 스타트업 나인투식스의 기희경(31) 대표가 창업한 이래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기능성’과 ‘청년’이란 단어의 부조화, '제조업은 젊은 여성이 이끌기 힘들다는 편견'이 맞물린 탓이다.
기 대표는 주변의 염려를 보란 듯이 깨며 수년째 성공 스토리를 써가고 있다. 나인투식스의 브랜드 ‘워킹마스터클럽’은 다양한 기능성 깔창을 판매한다. 편한 발을 위한 제품은 중장년층만 찾을 것이란 예상을 깨며 국내 깔창 브랜드 중 최초로 백화점에 입점했다. 깔창으로 입지를 다진 후 기능성 신발까지 진출했다. 기 대표를 만나 창업 스토리를 들었다.
◇겁없이 시작한 창업
워킹마스터클럽은 기능성 깔창과 신발을 만든다. 대표 제품 '워킹마스터 물컹슈즈 시리즈’는 한국인의 발 모양을 고려한 구조와 실리콘 깔창의 푹신함이 특징이다. 기능성 깔창을 판매하며 쌓은 데이터 3만여건을 기반으로 착화감과 디자인을 모두 챙겼다.
최근에는 정형외과 교수와 공동개발한 ‘닥터깔창’을 출시했다. 깔창 발바닥 가운데 부분의 돌기가 족저근막(발바닥에 있는 두꺼운 섬유조직의 막)에 닿으며 깔창을 신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칭 효과를 주는 제품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로를 기자로 정하고 경북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휴학하고 인턴 기자 생활을 했는데 실상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진로를 고민하던 중 아버지께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도 성숙할 수 있는 길이 창업'이라 말씀하시더군요. 아버지 스스로 수제화 제조 회사에서 일하다 기능성 신발 회사를 만든 창업가시거든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같은 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업의 기폭제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떠난 아프리카 사막 여행이었다. “한 달 동안 모로코 사막을 걸었는데 발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알고 보니 새끼발가락 뼈가 휘면서 관절이 튀어나온 거에요. ‘아버지가 권했던 기능성 신발을 신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죠. 투박하다 생각해서 신지 않았던 거에요.”
여행 막바지까지 예쁜 신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발을 편안하게 만들 순 없을까 고심했다. 신발 대신 깔창을 떠올렸다. “제 또래가 주로 신는 운동화는 편안함보다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잖아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발이 편했으면 하죠. 갖고 있는 신발에 기능성 깔창을 깔면 발의 편안함과 디자인 모두 잡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20대 중반, 친구들이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쓸 때 홀로 사업계획서를 썼다.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 도움을 받아 2017년 5월 나인투식스를 설립했습니다. 간편하게 신발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깔창을 구상했어요. 예전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봤던 게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기술자 수준은 아니지만 발에 닿는 제품에 대한 기본지식은 있었거든요.”
예상과 달리 이내 고생길이 펼쳐졌다. “제품을 만들어줄 공장을 찾는 게 생각보다 험난했어요. 아버지께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실 줄 알았는데 창업할 용기만 불어넣어 주셨지, 막상 창업한 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죠. 무작정 신발, 깔창 제조 공장이 모여있는 부산의 한 동네를 찾았어요. 젊은 여학생이 깔창 사업을 하겠다는 게 공장 사장님들 눈엔 낯설어 보였나 봐요. 수십개 공장에서 거절당했어요. 오히려 사업을 접으라며 타이르는 분도 있었어요.”
설득 끝에 뜻이 맞는 업체를 찾았다. “공장이 문을 닫는 밤까지 밖에서 기다렸어요.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눈 끝에 계약을 맺었죠. 처음에 깔창 5000~1만개를 주문했는데, 공장에서 이윤을 거의 볼 수 없는 수량이었어요. 신생 업체이니 앞으로 계속 주문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요. 그저 제 진정성만 믿었다 하시더군요.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는 고마운 업체죠.”
◇한국인 발에 최적화된 신발로 도약
‘내 발에 맞는 깔창 찾기’라는 콘셉트로 끼운 첫 단추는 성공적이었다. 제품군을 대폭 늘려 2019년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기능성 깔창 품목을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다음 단계로 도약을 꾀했다. “웬만한 깔창은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오프라인 매장을 찾은 소비자들이 신발은 안 파냐고 묻더군요.”
깔창을 판매하며 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능성 신발을 만들기로 했다. “사람들이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게 아니라 발을 신발에 맞추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동양인은 대체로 발볼이 넓어요. 그런데 해외 브랜드 운동화는 발볼 부분이 좁죠. 오프라인 매장에서 매일 소비자의 대략적 연령대와 성별, 통증부위, 구매한 깔창 종류를 기록했어요. 온라인 판매 기록까지 합하니 3만건 넘는 데이터가 쌓였죠. 깔창 소비자들의 발볼 넓이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찾아 평균치를 적용했죠.”
깔창 제작 경험을 살려 소재도 하나하나 신경 썼다. “깔창이 너무 푹신해도 안 좋아요. 무게중심이 잡히지 않아서 금세 피로해지거든요. 너무 딱딱하면 발이 아프고요. 적당한 착화감을 만드는 소재가 실리콘이에요. 신발을 신으면 땅을 밟는 느낌이 아니라 말랑한 실리콘 위를 걷는 느낌이 나요. 단가가 비싸서 망설였지만 이만한 소재를 찾지 못하겠더군요. 마진을 줄이더라도 최상의 소재를 쓰기로 결심했어요.
밑창은 미끄럼 방지를 위해 천연고무를 이용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전부 고무를 넣으니 무거워지더라고요. 신발이 너무 가벼우면 발을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무거우면 오래 신기 어렵잖아요. 그 중간점을 찾았어요. 밑창 속을 가벼우면서도 쿠션감이 좋은 소재인 EVA로 채웠습니다.”
마지막 관건은 디자인이었다. “화려한 디자인은 고려하지 않았어요.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떠올렸죠. 다만 손이 가지 않는 투박한 기능화의 이미지는 탈피하고 싶었어요. 무난한 검정색부터 아이보리색, 분홍색 등 여섯 가지의 심플한 색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편하면서 보기에도 예쁜 기능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어요.”
기능을 테스트하며 완제품을 만들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한국인 발에 최적화된 기능화를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입니다. 가격은 10만원 아래로 비교적 저렴하게 책정했죠. 착화감은 서비스업 종사자분들께 시착을 요청해 확인했어요. 일하면서 발이 신경 쓰이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라는 등 반응이 돌아오더군요.”
물컹슈즈 개발의 일등공신은 설진우 개발이사다. 설 이사는 아디다스 코리아 제 1대 지사장 출신으로 스포츠화 분야에서 잔뼈 굵은 인물이다. “설 이사님은 신발 산업에서 40년 몸담은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십니다. 발 편한 신발의 구조나 좋은 소재, 공정 과정에 필요한 요소 등 신발 제조에 필요한 조건과 기술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제조 공장과의 의사소통처럼 실무적인 부분에서도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설 이사님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소재부터 조립까지 전 과정에서 ‘메이드인 코리아’를 실천할 수 있었어요.”
◇소비자 피드백 토대로 제품 개선
물컹슈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반영해 제품을 개선했다. 기존 물컹슈즈를 물컹슈즈 1.0으로 명명하고, 최근 물컹슈즈 2.0과 3.0을 연달아 출시했다. “물컹슈즈 1.0은 쿠션 부분이 물컹하다는 반응이 있었어요. 다리를 제대로 지지하고 발의 압력을 골고루 분산하기 위해서 실리콘 깔창의 경도를 높였습니다. 이전 제품보다 발을 보다 안정적으로 지지하죠. 그러면서 ‘발 편한 신발’이란 본질을 놓치지 않았어요. 물컹슈즈 깔창 부분의 충격흡수율은 98.4%에 달합니다. 착용자는 외부 충격의 1.6%만 감내하면 된다는 의미죠.”
소재와 디자인에도 변주를 줬다. “마감과 소재가 아쉽다는 평이 있어서 견고하고 단단한 메시 소재로 교체했습니다. 홑겹이었던 내피는 안감을 더해 내구성을 높였죠.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날염(염색)처리한 부분을 모두 소가죽으로 교체했다는 점입니다. 신발을 오래 신으면 날염한 부분이 오래 벗겨지거나 쉽게 긁히는데 가죽은 그런 우려가 없습니다.”
다양한 수요를 섭렵하기 위해 신발 신는 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물컹슈즈 3.0의 경우 끈 방식이 아닌 다이얼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보통 다이얼이 적용된 신발은 다이얼이 발등의 사이드(외곽)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러면 신발을 신고 벗는 게 불편합니다. 저희는 다이얼을 발등 가운데 배치했어요. 발등 전체를 감싸도록 디자인해 안정감을 더했죠. 물컹슈즈 1.0, 2.0은 일상생활 중이나 일할 때 신기 좋고요. 3.0은 트래킹, 등산 같은 야외활동에 적합합니다.”
회사의 뿌리인 깔창도 놓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심동우 교수와 ‘닥터깔창’을 출시했다. “심 박사님은 2021년 족저근막염 환자를 위한 안창을 개발해 화제를 모은 인물입니다. 개발한 깔창을 상용화할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저희를 발견하고 먼저 문을 두드리셨어요. 닥터깔창은 심 박사님과 약 1년 반의 공동 개발 기간을 거쳐서 탄생한 제품입니다. 깔창 발아치 부분에 총 3개의 스파이크가 달려있습니다. 이 스파이크가 발바닥의 아치를 지지해 족저근막의 접촉부위를 최대화합니다. 깔창을 신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칭 효과를 누릴 수 있어요.”
◇”편견에 휩싸이지 마세요”
워킹마스터클럽의 제품들은 현재 각 온라인몰 등에서 팔리고 있다. 2022년 매출 15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출시된 물컹슈즈 2.0과 3.0도 매달 1~2억원씩 팔리고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제품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현재 소비자 절반 이상이 30대 여성이에요. 중장년 남성이 주 소비자일 거라는 예상을 엎은 거죠. 깔창이 그랬던 것처럼 물컹슈즈가 다양한 소비자들의 발을 편하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강조했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제품도 소비자들의 요구를 재빠르게 파악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어요. 처음 창업 아이템을 얘기했을 땐 제조 공장 관계자부터 주변 친구들까지 모두 고개를 저었죠. 하지만 실제로 부딪힌 세상은 편견과 달랐고 충분히 도전할만한 곳이었습니다.”
깔창을 넘어 신발 산업으로 확장하는 전략으로 글로벌 발 통증 시장을 겨냥하려 한다. “싱가포르와 독일 출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출장을 기점으로 수출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일본이나 독일 같은 경우는 기능성 신발, 깔창 시장이 성숙한 편입니다. 쟁쟁한 경쟁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만의 차별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 중이죠. 물론 무기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웃솔(몰드) 구조를 바꾼 발 볼이 넓은 신발 제조 기술, 소비자 발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 등 탄탄한 기술도 보유하고 있죠. 비브람이 사명이 아니라 고급 깔창 소재 이름으로 자리매김하듯, 워킹마스터클럽이라는 이름도 질 좋은 신발의 상징처럼 만들겠습니다.”
/장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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