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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싫증 난 중고 가전 주세요, 갖고 싶던 아이패드 드릴게요”

리퍼비시 전자기기 구독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피에로컴퍼니의 박민진 대표는 스스로를 '구두쇠'라고 소개했다. /더비비드

“꼬장꼬장한 구두쇠 기질 덕에 여기까지 왔네요.”​

낭비는 사절, 한 번 산 물건은 가능한 한 오래 쓴다. 새 물건을 사기 전에는 기존의 것을 활용하는 법부터 고민한다. 스타트업 피에로컴퍼니 박민진(35) 대표의 ‘소비 수칙’이다.​

유학생 시절 중고 브랜드 의류의 가치를 알아본 그는 중고 의류를 드라이해서 판매해 학생 신분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폭등한 캐나다의 교통비와 값비싼 자전거에 대항해 보급형 자전거 브랜드를 만든 적도 있다. 최근에는 휴대폰을 고쳐 쓰다 답답해서 수리 중개 플랫폼을 만들었다. 곧 리퍼비시 전자기기 렌털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스스로를 ‘구두쇠’라고 설명하는 박 대표에게 버려질 뻔한 전자기기에 주목한 이유를 들었다.​

◇중고에 눈 뜬 캐나다 유학생

폰고는 리퍼비시 전자기기 구독 서비스다. /피에로컴퍼니

피에로컴퍼니는 리퍼비시 전자기기 구독 서비스 ‘폰고’(phoneGO)의 운영사다. 리퍼라고도 불리는 리퍼비시(refurbished)는 반환된 상품 중 성능에 이상이 없는 부품을 골라 재정비하거나 개선한 제품을 뜻한다. 폰고를 통해 리퍼한 아이패드, 아이폰, 애플워치 등의 기기를 원하는 기간만큼 렌털하거나 분할 결제로 구매할 수 있다. 이 외에 중고 기기 판매, 리퍼 기기 구매, 수리 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인기 전자제품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청년 사용자층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전국 500개 넘는 제휴 수리업체를 통해 품질도 보증한다. 최근에는 B2B 구독 서비스를 시작해 학원, 카페, 레스토랑 등 소상공인과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서비스 대상을 확장하고 있다.

박 대표는 캐나다 유학 시절 여러 사업에 도전했다. /박민진 대표 제공

유학파다. 캐나다 토론토의 온타리오예술디자인대(OCAD)에서 광고디자인을 공부했다. 한 푼이 아쉬웠던 유학 생활은 그를 ‘창의적인 구두쇠’로 만들었다. “현지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한국보다는 시급이 높았지만 근로 시간에 비례해서 보상을 받는 구조가 효율적이지 않다고 느꼈어요. 더 짧게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있다고 생각했죠.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캐나다 의류 브랜드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브랜드의 중고의류를 현지에서 매입한 뒤 드라이해서 한국에 판매해 봤는데요. 꽤 돈이 되더라고요. 이 일을 계기로 사업에 눈을 떴죠.”

박 대표는 공연 기획사 운영 시절 구준엽 같은 유명 인사를 초대해 공연을 진행했다. /박민진 대표 제공

살다가 마주한 크고 작은 불만들이 그에겐 기회로 보였다. “대학생일 때 교통비가 너무 올라서 통학용 자전거를 발품 팔았는데요. 너무 비싼 거예요. 이럴 거면 싸고 예쁘고 좋은 자전거를 내가 만드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곧바로 자전거 제조사를 설립해서 운영했습니다. 문화 사업을 한 적도 있어요.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도시에서는 K-POP 공연 문화가 활성화됐는데요. 토론토 한인이 많은데도 그런 문화가 없었거든요. 아쉬운 마음에 작은 공연 기획사를 차렸어요. DJ Koo로 알려진 구준엽, 이적 같은 한국의 유명 인사를 초대해 라이브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2016년 귀국 후 성균관대 MBA에 진학했다. “사업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잘 맞았어요. 다만 학부에서 디자인, 콘셉트 기획 등만 공부해서 경영 지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MBA에 진학해 사업의 초석이 될 만한 정보와 지식을 배웠습니다.”​

◇휴대폰 수리 중개 플랫폼 론칭, 아찔한 실패

폰고는 처음 휴대폰 수리 중개 플랫폼으로 출발했다. /더비비드

폰고 아이디어 역시 아쉬움에서 출발했다. “휴대폰이 고장 나서 수리를 맡길 곳을 찾아봤더니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해외 브랜드 제품의 경우 소비자들 사이에서 ‘수리 정책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불만이 돌았어요. 작은 고장인데 대대적인 부품 교체를 요구받기 일쑤였죠. 사설 수리업체로 눈 돌렸지만 막막한 건 매한가지였어요. 수리 실력, 가격이 모두 불투명했거든요.  바가지요금도 흔한 일이었죠. 사설 수리에 대한 명백한 규제가 없다 보니 이 시장의 신뢰도가 낮았어요. 타인의 수리 경험이 유일하게 유익한 단서였죠. 휴대폰 수리했다는 소식에 ‘어디서 고쳤냐’ 물어보는 친구들의 모습에 힌트를 얻었습니다."

​2019년 폰고를 설립하고 2020년 휴대폰 수리 중개 플랫폼을 론칭했다. “사용자의 위치를 기반으로 수리 견적을 비교하고, 원하는 곳에서 수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플랫폼입니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전국 곳곳의 수리 업체와 제휴를 맺었죠. 입점 업체도 빨리 확보하고 개발도 잘 돼서 출시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부자가 될 줄 알았어요.”

수리 중개 플랫폼 시절 폰고 서비스 화면. /피에로컴퍼니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발견됐다. “수익 구조가 불분명했어요. 이용자에게 수수료를 부과하면 규모를 키울 수 없으니 업체에 수수료를 요구했는데요. 반응이 냉담하더군요. 휴대폰 수리 수요도 많지 않았어요. 액정이 깨지면 파손된 상태로 더 쓰다가 휴대폰을 바꿔버리는 사람이 더 많았죠. 내 기준에서 ‘그럴 것이다’는 믿음으로 플랫폼을 만든 건데, 가설을 잘못 설정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바보 같았어요.”​

절망에 빠졌다. 반년에 가까운 암흑기를 보냈다. “거의 500곳에 가까운 수리점과 제휴를 맺었는데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어요.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사업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었죠. 근데 이대로 관둘 수가 없겠더라고요. 우리가 이미 뛰어든 중고 휴대폰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를 찾아보기로 했어요.”​

◇중고폰 거래 플랫폼에서 리퍼기기 렌털 플랫폼으로

폰고의 구성원들. 왼쪽 상단에서 두번째가 박 대표다. /피에로컴퍼니

2022년 초, 중고 휴대폰 거래 서비스로 사업 모델을 전환했다. “중고폰 매물을 올리면 업체별 희망 매입가를 비교할 수 있는 플랫폼이었어요. 이용자는 가장 높은 금액을 부른 업체에 폰을 매각할 수 있었죠. 이 비즈니스로 노선을 변경하니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고폰 거래 시장에 뛰어들어 보니 이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눈에 들어왔다. “중고 거래 플랫폼 내에서 전자기기가 활발히 거래되는 추세였는데요. 사기 거래가 잦고, 품질 보증이 안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이에 중고 전자기기 시장의 페인 포인트는 ‘낮은 신뢰성’이라는 가설을 설정하고, 이용자들이 중고 기기를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어요.”​

문득 500곳의 든든한 우군이 떠올랐다. 곧바로 좋은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수리 중개 플랫폼을 할 때 제휴를 맺은 수리업체들을 활용하면 어떨까.’ 이 생각이 출발점이었어요. 중고폰 거래 플랫폼에 수리를 결합하니 ‘리퍼비시’라는 결론이 보이더군요. 2022년 6월, 노후화된 기기를 매입해서 수리업체에서 수리한 후 판매하는 리퍼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중고 기기 구매자를 대상으로 하는 무상 보증 서비스 ‘폰고케어’도 시작했습니다.”

폰고는 현재 리퍼 기기 렌털 플랫폼으로 운영 중이다. /피에로컴퍼니

노선을 한번 더 전환했다. 폰고는 현재 중고 스마트 기기 렌털 플랫폼으로 운영되고 있다. “리퍼 기기를 원하는 기간 동안만 사용할 수 있는 구독 플랫폼으로 정착했습니다. 리퍼비시 아이패드 렌털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도입해봤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거든요. 지금은 아이폰, 맥북, 아이맥, 애플워치 등 애플사 제품을 중심으로 렌털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렌털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들의 호응은 기능만 잘 된다면 꼭 새 기기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애플의 기기는 인기가 많지만 가격대가 부담스러운 편인데요. 중고 기기를 새 상품 수준으로 리퍼해서 렌털해 구독비를 대폭 낮췄습니다. 하루 330원으로 아이패드를 사용할 수 있죠. 무상보증도 해주고요. 대부분의 제품이 이월 상품이라는 한계점도 있지만 휴대폰은 최신 기종도 많습니다.”​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다

디데이에서 회사를 소개 중인 박 대표. /피에로컴퍼니

고생 끝에 답을 찾은 결실은 달콤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가 주최하는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최종 8개사로 선정된데 이어 프라이머, 디캠프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2022년 10월부터 투자자를 만나고 다녔습니다. ‘6개월 동안 100명을 만나보고 아무도 돈을 내주지 않겠다고 하면, 다른 사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20번째 만남에서 투자가 성사됐어요. 지금까지 쉬운 게 단 하나도 없었어요. 생각대로 되는 것도 없었죠. 좋은 비즈니스 모델도 찾고, 골칫덩이였던 자금 문제를 해결해서 지금은 한시름 놨습니다.”​

학원, 카페 등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하는 B2B 비즈니스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렌털 서비스를 제공하면 빠른 시일 내에 매출이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타사의 렌털 제품은 새 것이라 가격을 떨어뜨리는데 한계가 있지만 저희는 싸게 매입한 제품을 싸게 고쳐서 제공하니 가격 경쟁력이 있거든요. 수리 중개 플랫폼 시절 수리업체들과 제휴를 맺어 둔 게 신의 한수였죠. 실패로 끝난 줄 알았던 첫번째 시도가 폰고의 새로운 도약에 필요한 단서를 줬어요.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폰고를 발판으로 전자폐기물 처리 업체로 성장하는 게 목표다. /더비비드

폰고를 발판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중이다. “전자폐기물이 전세계적인 의제가 되고 있어요. 폐전기차가 발생하는 시기에는 폐전지도 문제가 되겠죠. 전자폐기물로부터 자원을 회수해서 이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광물 의존도가 높은 국가라 전자폐기물로부터 추출한 자원이 요긴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원 관련 연구원과 대기업 자회사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전자폐기물을 처리하는 기업이 되고 싶어요. 이런 비효율을 앞장서서 개선하는 게 저희 같은 스타트업의 몫이 아닐까요.”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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