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 가능한 전자책 플랫폼 ‘노팅’ 개발한 세샤트 이윤지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공부는 시작하기가 가장 힘들다. 괜히 지저분해 보이는 책상을 닦고, 필기구를 나란히 줄 세워보기도 한다. 무거운 책들을 공부할 순서대로 쌓아놓고 나면 이제 정말 공부해야 할 차례다. 그런데. 이미 에너지를 다 소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안 그래도 힘든 공부, 준비하는 과정이라도 쉽게 할 순 없을까. 세샤트 이윤지 대표(34)가 떠올린 생각이다. 필기 가능한 학습도서 전용 전자책 플랫폼 ‘노팅’을 개발했다. 앱 안에서 책을 구매하면 배송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책을 펼쳐 공부할 수 있다. 내 맘대로 필기하고 필기 내용을 여기저기 옮길 수도 있다. 이 대표를 만나 ‘나 때의 공부’와 요즘 공부가 어떻게 다른지 들었다.
◇태블릿, 교육 그리고 디지털
별거 아닌 대단한 일. 포스트잇을 처음 본 소감이다. “모순된 말이죠. 그런 아이러니함이 좋았어요. 포스트잇이나 클립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줬잖아요. 저도 그런 걸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창 그런 고민을 할 당시 아이리버를 디자인한 김영세 디자이너가 유명했는데요. 전공이 산업디자인이란 말에 바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산업디자이너가 되면 세상에 도움을 줄 만한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죠.”
2015년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세상에 없던 물건을 만들고 싶었지만 혼자선 막막했어요. 회사란 어떤 곳인지를 먼저 경험해 보기로 했죠. 제품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고 최대한 다양한 상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디자인 경영을 중시하던 LG전자에 지원해 제품 디자이너로 입사했습니다.”
팀원은 총 15명. 새로운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소그룹처럼 5~6명씩 헤쳐모였다. “세탁기팀, 스타일러팀, 식기세척기팀을 차례로 거쳤습니다. 팀의 막내였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제품을 단독으로 맡아서 디자인한 적은 없지만, 나의 노고가 담긴 제품이 출시된 걸 보면 늘 신기했죠.”
입사 5년 차에 신사업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스마트시티 안에 있는 모든 걸 조사하라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온갖 세미나를 듣고 스마트 스쿨을 보러 세종시까지 가기도 했죠. 뭔가 다르긴 달랐어요. 학교에 태블릿이 모두 보급돼 있었고 디지털 교육이 자리잡고 있었죠. 태블릿, 교육, 디지털 같은 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어요. 그땐 딱 그 정도였습니다.”
단어가 문장이 된 건 ‘내 공부’를 하면서부터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창업의 꿈을 키우면서 관련 책을 읽었는데요. 전자책 플랫폼을 이용해 공부할 때마다 필기가 안 된다는 점이 늘 불편했습니다. 기껏해야 북마크로 주요 페이지를 저장해두는 정도였죠. 댓글을 보니 다른 이용자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더군요. 필기하며 공부할 수 있는 디지털 교재가 필요했습니다.”
수요를 확인하기 위해 설문지를 만들었다. 1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전자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전자책을 얼마나 이용하는지, 필기가 되지 않아 불편했던 적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대부분 같은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어요. 정말 마지막 확인이란 생각으로 정부지원사업 예비창업패키지에 사업계획서를 내고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보기도 했습니다. 2번 만에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필기 가능한 전자책’ 시장의 가능성을 확신했죠.”
◇개발자 괴롭히는 디자이너
2019년 9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새로운 출근길에 나섰다. 출근지는 내 방 내 책상. 가장 먼저 한 일은 MVP(최소기능제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인의 지인까지 수소문해 개발자를 구했습니다. 개발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개발자와 소통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저보다 개발자가 더 힘들었을 거예요. 웹앱(PC·스마트폰 등 단말기 기종과 관계없이 모든 단말기에서 같은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이 뭔지, API(운영체제·응용프로그램 사이의 통신에 사용하는 언어·메시지의 형식)가 뭔지도 몰랐으니까요.”
개발자와 손발을 맞추는 것부터 난항이었다. 기획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디자인 전공을 살려 기획서를 작성해 내밀었다. “개발자가 아연실색하더군요. 개발 기획서는 가령 ‘비밀번호를 최소*최대 몇 자까지 허용할지’, ‘비밀번호를 틀렸을 때 어떤 화면이 뜨게 할지’처럼 촘촘하게 작성해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그림만 열심히 그려갔던 거죠. 6개월간 지지고 볶은 끝에 앱 다운 앱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앱 이름은 노팅(Noteing). 노팅을 쓰게 될 학생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20여 명의 대학생 서포터즈를 모집했다. “뜻밖의 피드백을 듣고 콘셉트를 전면 수정하기도 했어요. 원래 책 양옆으로 필기할 공간을 만들어뒀는데 불필요하게 공간을 차지한다고 느끼더군요. 또 포토샵처럼 필기를 레이어(층, 겹)로 관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오히려 앱이 무거워져서 활용도가 떨어졌죠. 덕분에 본질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진짜 종이책을 펼친 것처럼 필기할 수 있는 앱을 완성했죠.”
2020년 6월 세샤트를 설립했다. “이집트 기록의 신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기록·필기가 학습에서 가장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앱도 완성했겠다 회사도 만들었겠다, 이제 출판사를 설득할 차례였습니다. 다양한 학습서들 중에서도 대학교재부터 먼저 접근했어요. 대학교재는 책을 한 장 한 장 스캔해 만든 PDF파일이 불법으로 많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소규모 출판사가 많아 다품종 소량생산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가장 디지털화가 더딘 편이었어요.”
세상에 없던 앱을 소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일, 전화 등으로 연락해 미팅을 잡고 노팅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불법 복제를 막을 수 있고, 학습자의 편의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엔 공감하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더군요. 단행본 전자책 플랫폼의 성공 사례를 들며 설득해 봐도 ‘왜 내가 먼저 총대를 매야 하나?’라며 난색을 보였죠. 공학 도서로 유명한 출판사 ‘성안당’이 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후에야 다른 출판사와도 하나둘씩 계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2021년 6월 노팅을 정식 출시했다. 300여 권의 학습서를 담았다. 책 외에도 수능 기출문제와 각종 자격증 기출문제 등 무료로 볼 수 있는 자료를 더했다. “학습자는 노팅에서 전자책 형식의 학습서를 구매해 바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가격은 출판사에서 책정하고 보통 종이책 가격의 70~80% 정도예요. 목차에서 어떤 단원명을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하고, 밑줄, 수학식 계산 등 자유로운 필기가 가능합니다. 문제와 답을 연결해 둬서 해설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죠.”
학습자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애플의 iOS 버전만 있다는 핸디캡을 뛰어넘었다. “가입자 수가 3만명에서 1년 만에 10만명으로 늘었습니다. 앱스토어에서는 아이패드 도서 분야 인기 순위 2위에 올랐고, ‘오늘의 앱’, ‘추천 앱’으로도 수차례 선정됐죠. 사용자의 반응이 확인되고 나니 출판사에선 얼른 안드로이드에도 출시하라고 성화였습니다. 계획에 있던 일이었지만 더 서둘러 지난 3월 안드로이드 노팅도 출시했습니다.”
◇노팅 개발 기간은 몇 년일까
노팅에서 열어볼 수 있는 학습서는 300권에서 3년 새 2만3100권으로 늘었다. 박영사, 군자출판사 등 대학교재 출판사를 비롯해 해커스, 시대고시, 에듀윌, YBM 등 성인 학습서도 입점돼 있다. 최근 마더텅, 대성학력개발연구소 등 중·고등학교 참고서 출판사까지 가세하면서 전 연령대의 학습 콘텐츠를 다루고 있다. 노팅 가입자 수는 2023년 12월 기준 약 24만명에 이른다. 3년 전에 비해 8배 성장한 숫자다.
세샤트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이 운영하는 프론트원에 입주해 아이디어를 인정받았다. “프런트원은 입주 스타트업 간 단단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노팅은 아직 성장하는 중이다. “누군가 노팅 개발 기간을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이게 돼요. 출시까지 걸린 기간은 1~2년 정도지만, 3년이 넘은 지금도 제 눈엔 미완성처럼 보여서요. 요즘은 자동채점 기능과 기기 동기화 부분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창업이란 게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저만 해도 기존에 있던 좋은 콘텐츠를 어떻게 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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