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겨울에도 온 사방이 시퍼런 대한민국 최남단 이곳

더 비비드 2024. 6. 21. 10:12
서진도농협 김영화 대파 농부

진도에서 40년간 대파 농사를 지어 온 관마마을 김영화 이장이 대파를 한아름 들고 있다. /더비비드

"아리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전라남도 진도군을 얘기할 때 ‘진돗개’만 떠올리면 섭섭하다. 전남 진도는 진도아리랑의 발상지다. 미스트롯 진 송가인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따뜻한 기후의 전남 진도는 대파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전국 대파 생산량의 30% 이상이 진도에서 나온다. 진도에서 40년간 대파 농사를 지어 온 관마마을 김영화 이장(65)을 만나 한겨울에도 진도의 들녘이 푸른 이유를 들었다.

◇진도 대파가 겨울을 나는 법

김영화 농부가 농사 짓는 대파 밭의 초록빛 물결. 한겨울인데도 풍경이 푸르다. /더비비드

진도는 연 평균 기온이 13~14℃로 온난한 지역이다. 1월 평균 최저 기온은 -0.5~3℃로 겨울도 매우 따뜻하다. 한겨울에도 땅이 얼지 않고 토양이 기름져 대파 생육의 최적지로 꼽힌다. 덕분에 진도 대파는 타 산지에서 수확이 불가능한 겨울철에만 수확한다는 특징이 있다. 진도 대파는 본격적인 추위가 불어닥치는 12월부터 출하한다.

진도 대파는 농림축산식품 지리적표시 제61호로 등록돼 있다. 지리적 표시란 농산물이나 가공품이 해당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품임을 농산물품질관리법상 표시해두는 걸 말한다. 남해 해풍을 맞은 대파는 특유의 향이 더해진다. 월동하면서 대파 줄기는 곧게 자라고 식이섬유가 풍부해진다. 세균 단백질을 분해하는 성질을 가진 알리신 성분의 함량이 높다는 특징도 있다.

◇17세 농부의 설움

김영화 이장은 6년 차 이장으로 관마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다. /더비비드

김영화 이장은 6년 차 이장으로 관마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다. 관마마을 주민 대다수는 대파 농사를 짓는다. 매년 대파생산면적 조사 기간이 되면 김 이장이 직접 각 농가에 연락해 자료를 수집해 보고한다. 마을 중앙에 농기계 전용 주차장을 마련해 도로를 깔끔하게 정돈하기도 했다.

1972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농부가 됐다. “부모님의 뒤를 이어 농사지을 사람이 필요했어요. 제가 막둥이라 형들은 이미 서울로 취직해 생활을 꾸린 뒤였죠. 그땐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라 고향에 올 땐 여럿이 버스를 빌려 왔습니다. 한바탕 북적북적하게 지내다가 다시 형들이 떠나면 어찌나 쓸쓸했던지요. 정두수 작사가의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가사가 딱 그 모습을 그리고 있죠. 지금도 그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핑 돕니다.”

농기계도 없던 시절, 낫으로 벼를 베고 온종일 허리 굽혀 일했다. 1만7000㎡(약 5000평)의 땅에 쌀·보리·콩·고추 등을 키웠다. “농사지은지 5년쯤 됐을까요. 당시 진도군 내에서 대파 농사 바람이 불었습니다. 따뜻한 기후 덕분에 겨울에 재배하기 좋다면서요. 군에서도 적극 홍보하면서 재배 농가가 빠르게 늘었죠. 지금 우리마을은 고개 돌리는 곳마다 대파밭입니다.”

◇뚝심 있는 농부 닮아 단단한 진도 대파

막 수확한 대파를 자세히 보여주는 김영화 농부. 진한 초록빛과 튼실한 굵기가 눈에 띈다. /더비비드

김 이장은 18만1800㎡(약 5만5000평)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중 6500평은 대파, 8000평은 배추, 나머지는 벼농사를 위한 땅이다. 대파와 배추는 윤작(돌려짓기)으로 재배한다. 배추를 키울 때 대파밭은 쉬면서 땅심(농작물을 길러낼 땅의 힘)을 높인다. 반대로 대파 재배 시기엔 배추밭이 컨디션 관리 모드가 된다. 지금은 대파 차례다. 한겨울에도 진도 들녘이 한여름인 것처럼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10개월간 농부가 땀 흘려 키운 대파 물결이다.

- 대파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빠르면 1월 중순, 늦어도 2월 말부터 종자를 키웁니다. 45~60일 뒤, 3월 말에서 5월 초에 정식(아주심기, 모종을 밭에 심는 일)하죠. 사람이 청소년기에 쑥쑥 자라듯 대파는 여름에 쑥쑥 자랍니다. 주변에 자라는 잡초는 관리기라는 기계를 이용해 뽑아요. 관리기가 대파밭 골을 따라서 지나가면 잔풀은 뽑히고 주변 흙은 이랑으로 쏠리면서 밭이 깔끔해집니다.”

- 대파 품종별로 어떤 차이가 있나요.

“품종 얘기만 해도 하룻밤은 꼬박 새울 겁니다.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어요. 지금 주로 재배하는 품종은 블랙이글, 신세대, 까메오플러스 등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새로운 품종이 나올 때마다 재배해 보고 있죠. 아무래도 교배종이 무름병 등 병충해에 강하더군요. 무름병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기승을 부리는 녀석인데요. 대파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요. 까메오플러스가 비교적 무름병에 강한 품종입니다.”

김영화 농부가 '대파를 입에 물고 웃어달라'는 요구에 흔쾌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더비비드

-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2021년 1월에 내린 폭설 기억하시나요. 그때 대파가 금값이라며 ‘파테크(파로 하는 재테크)’가 유행이었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웬만해선 눈을 보기 힘든 진도에 이상기후로 10㎝가 넘는 눈이 내렸거든요.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대파 뿌리가 꺾여버렸습니다. 대파 가격이 폭등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지만 팔 대파가 없으니 어쩌겠어요. 내년엔 날씨 덕 좀 보자며 하늘을 바라볼 밖에요.”

- 올해는 어떤가요.

“올가을엔 50일 넘게 비가 내리지 않아 애가 탔습니다. 저수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심각한 가뭄이었어요. 그나마 11~12월에 따뜻한 날이 이어져 그 틈에 대파가 잘 자랐습니다. 수확량은 평당 10㎏ 정도로 예상합니다. 다만 최근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대파가 상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영하 10℃ 이하인 날이 5일 이상 이어지면 대파가 얼었다가 녹으면서 다 물러버립니다.”

일꾼들이 대파를 수확하는 모습. 농부는 대파를 재배하는 데에만 신경 쓰고 수확부터 선별, 포장은 서진도농협에서 맡는다. /더비비드

- 더 추워지기 전에 미리 수확하면 안 되나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파는 양파·감자·마늘 등과 함께 7대 수급관리 품목으로 관리하는 작물이에요. 식탁 위에 자주 오르는 농산물이니만큼 가격이 폭등·폭락하지 않도록 출하량을 조절하는 거죠. 가격이 급격히 오를 때 최대한 많이 수확하고 출하해 가격을 낮추고, 농가 경영이 어려울 정도로 가격이 내려가면 출하를 잠시 멈춥니다. 2008년부터는 서진도농협에서 공동선별위원회(이하 공선회)를 조직해 유통뿐만 아니라 수확까지 관리해 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농민들은 안심하고 대파 재배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꿩 먹고 알 먹는 대파 수급 관리법

밭에서 막 수확한 대파를 서진도농협 산지유통센터로 옮기기 전에 쌓아둔 모습. /더비비드

2023년 기준 서진도농협의 배추 공선회 회원 수는 116명, 재배면적은 85만㎡다. 2008년 대비 각각 3.9배, 4.3배 늘었다. 지난 11월엔 농식품신유통연구원이 주최한 ‘2023 농산물마케팅대상’에서 산지유통조직부문 대상을 받았다. 산지조직화로 시장 대응력과 마케팅 역량을 높였다는 평가다. 농협중앙회 진도군지부 농정지원단 정향재 단장(43)에게 농가와 농협의 상생 전략을 들었다.

- 유통뿐만 아니라 수확까지 관여한다고요.

“안정적으로 유통하기 위함입니다. 2017년부터 정부에서 ‘채소가격안정제’를 시행하고 있어요. 농가엔 소득을 보장하고 시장엔 안정적인 공급망을 만들기 위한 제도죠. 계약에 참여한 농가들은 시장에 대파가 공급 과잉일 때 전체 계약 물량의 50% 수준에서 재배면적 조절이나 출하 중지 등 수급 대책을 이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다 자란 대파밭을 갈아엎는 거죠. 이때 계약 농가는 평년 수준의 80%의 소득을 보장받습니다.”

수확한 대파는 서진도농협 산지유통센터로 옮겨진다. 센터에서 직원들이 대파를 선별해서 손질하고 포장한다. 농부는 대파를 기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더비비드

- 밭을 엎고도 수익을 내는 구조라면 농가에 너무 유리하지 않나요.

“밭을 엎는 농부의 심정을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일단 밭을 엎으면 이듬해 농사는 포기해야 합니다. 시든 대파의 잔해가 퇴비의 역할을 하기까지 땅심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죠. 계약 농가가 아닌 곳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트럭에 200만원씩 손해를 보면서까지 출하하는 경우도 많아요. 대파값이 1㎏당 2000원 이하로 떨어지면 운송·포장에 드는 지출이 더 큽니다. 대신 대파 가격이 오를 땐 계약 농가에 수익 상한선 제한이 있습니다. 덕분에 농협은 시장에 대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죠.”

- 서진도농협에서 취급하는 대파의 양은 어느 정도인가요.

“2023년 기준으로 82만6500㎡(약 25만평)의 대파밭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비 오는 날을 피해 부지런히 수확하고 있어요. 땅이 질면 흙을 털기 힘들기 때문이죠. 한 팀에 35~40명, 총 4개 팀으로 나눠 수확하는데요. 네 팀이 동시에 작업해도 하루 최대 작업 면적은 2000평입니다. 물량으로 따지면 약 20톤 정도죠. 수확한 대파는 흙을 털고 성한 잎만 남겨 1㎏ 단위로 묶어서 시장으로 나갑니다.”

◇농부의 마음이 곧 아버지의 마음

김영화 농부의 두 손. 굳은 살이 가득하고 투박했다. /더비비드

김 이장은 최근 배추 재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파·배추를 1년 주기로 돌려짓기하고 있어 2024년은 배추에 관심을 쏟을 차례다. 대파 수확 작업을 농협에 위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변하는 대파 가격은 수시로 확인한다. 2023년 한 해동안 쏟은 땀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 올해 매출은 얼마로 예상하나요.

“한치 앞도 알 수가 없네요. 진도가 겨울 대파라면 중부 지역은 여름 대파를 재배하는데요. 지난 여름 수해를 크게 입어서 가을 대파 가격이 크게 뛰었습니다. 정부에선 가격 안정화를 위해 중국에서 2000톤을 무관세로 들여왔죠. 그 영향으로 진도 대파 가격이 12월 둘째주 1㎏ 당 3600원에서 이틀만에 1700원으로 떨어졌습니다. 비료값, 인건비도 안 나오는 수준이라 걱정이 큽니다. 많은 분들이 대파를 많이 찾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초록 물결이 가득한 대파 밭에서 김영화 농부가 대파를 매만지고 있다. /더비비드

- 대파 소비를 위해 맛있게 먹는 법을 소개한다면요.

“전남 진도 고깃집에 가 보면 대파 안 나오는 가게가 없습니다. 마늘·고추·버섯처럼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구울 때 대파를 꼭 겻들이죠. 특히 불판에 대파를 구워먹으면 별미예요. 겉이 까맣게 탈 정도로 구운 다음 껍질을 한 겹 벗겨서 먹으면 됩니다. 매운 맛은 사라지고 과즙처럼 달달한 맛이 느껴지죠.”

- 농사는 언제까지 지을 건가요.

“우리 아들·딸의 단골 질문이네요. 몇년 전부터 농사일 좀 줄이라는 잔소리를 듣고 있어요. 자식들에겐 늘 ‘2, 3년만 더 할게’라며 어물쩍 넘기는데요. 제가 5년 뒤면 일흔입니다. 어머니께서 농사일에서 손을 놓으신 나이죠. 그때까진 농부로 살렵니다.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볼 때 참 행복했어요. 대파가 크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 딱 그래요. 우리 아들·딸도 자식을 둔 애미·애비가 됐으니,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요.”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