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향 심춘립 농부의 인생과 농사 이야기
“기자 양반 왕 기다렴쪄게. 약속 시간 다되신디 뭐햄수과?”
(기자 양반 와서 기다려. 약속 시간 다 됐는데 뭐 해?)
3월 12일 오후 2시. 제주시 조천읍 한 귤밭에 도착했다. 김석정(68) 씨는 전화기를 붙들고 연신 아내 심춘립(61) 씨를 재촉했다. 바로 옆 밭에서 일하고 있던 심 씨가 금세 달려왔다. 통화 내용에서의 퉁명한 말투와 달리 두 사람의 눈빛은 다정했다.
심 씨는 3년 전 위암을 진단받았다. 다행히 초기라 수술만으로 회복이 가능한 정도였다. ‘암 판정’은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됐다. 이후 영양제, 사우나 등 건강에 좋다는 건 뭐든 챙긴다. 아침저녁으로 직접 재배한 귤도 먹는다. 심 씨는 천연 비타민이라며 카라향 두 알을 내밀었다. 심 씨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와 귤 농사 도전기를 들었다.
◇카라향, 봄이 제철인 제주 귤
카라향은 카라만다린과 길포 폰칸이라는 귤이 교배된 품종이다. 수확 시기가 늦은 귤을 총칭하는 만감류의 일종이다. 생김새는 일반 감귤보다 조금 크고, 과피가 울퉁불퉁한데 부드러워 귤처럼 쉽게 벗겨 먹을 수 있다. 한라봉, 천혜향 등 다른 만감류보다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평균 당도가 15브릭스 이상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카라향의 유래가 흥미롭다. 카라향은 다른 만감류의 수확시기인 1~2월에 따면 산도가 매우 높아 못 먹을 정도다. 간혹가다 씹히는 씨앗, 울퉁불퉁한 외양에 눈이 저절로 감기는 신맛까지. 상품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열매를 따지 않고 그대로 둬 나무에 달린 채 봄이 되자, 새들이 와서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 달콤한 과실은 귀신같이 아는 새들이 이걸 먹는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농부들이 혹시나 싶어 열매를 맛보니 아니나 다를까, 맛이 제대로 들었다고 한다.
제주도 농부들은 뒤늦게 알게 된 카라향을 열심히 기르고 있다.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를 시작해 제주도에서 약 2600t(톤)의 카라향이 농협을 통해 유통·생산되고 있다. 연 40만~60만t의 귤이 생산되는 제주도에서도 귀한 작물이다.
◇전업주부에서 전업 농부로
부부는 2003년 귤 농사에 뛰어들었다. 현재 재배 면적은 1만9834㎡(6000평)에 달한다. 귤이라고 모두 같은 건 아니다. 주 재배·수확 시기에 차이가 있는 천혜향, 카라향, 레드향, 황금향 등을 골고루 재배하며 수확 시기에 차이를 두고 있다. 봄을 앞둔 지금은 카라향에 집중하는 시기다.
- 제주가 고향인가요.
“제 고향은 경남 사천시 삼천포예요. 1985년 제주 토박이인 남편과 결혼하면서부터 제주에 살기 시작했죠. 그래서 제 사투리가 뒤죽박죽입니다. 남편과 얘기할 땐 제주 사투리가 나오고 친정 식구들과 통화할 땐 경상도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나오죠. 그래도 이젠 제주 사람이 됐다고 봐야죠. 제주 땅 밟고 살면서 제주 땅이 주는 귤을 키우고 있으니까요.”
- 농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요.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1997년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 20년 이상 근속자를 대상으로 명예퇴직 바람이 불었습니다. 슬슬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해야겠다고 하더군요. 마침 시부모님께서 1972년부터 감귤 농사를 하고 계셨어요. 농부는 은퇴가 없는 일이니 저도 따라서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죠. 남편이 5년 정도 직장에서 더 버티는 동안 혼자 4500평 밭을 마련해 천혜향, 한라봉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퇴직 후엔 함께 하고 있죠.”
- 처음 하는 농사일이 힘들지 않았나요.
“그때가 20년 전이니 기운이 얼마나 팔팔했게요. 40대엔 힘든 줄도 모르고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어요. 밭에서 나무에 줄을 매달고 퇴비를 뿌리고 가지를 치고 나면 하루가 훌쩍 가버렸죠. 그렇게 일하는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무리가 갔나 봐요. 3년 전 건강검진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거든요.”
-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요.
“집에 돌아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는데요. 남편이 그런 저를 보고 ‘집을 팔든 밭을 팔든 어떻게 해서든 내가 당신 살려낼게’라며 손을 꼭 잡아줬어요. 위의 70%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완전히 회복한 상태입니다. 그때 옆에서 힘을 줬던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카라향 내어주는 나무, 사람 대하듯 정성 가득
6000평 귤 밭에서는 천혜향, 황금향, 레드향 등 제각각 다른 종류의 귤이 자라고 있다. 이 중 카라향 재배 면적은 10% 정도다. 봄이 제철인 카라향은 생육 주기가 400일로 1년이 넘는다. 400일간 키워야 하는 귤이라는 의미로 400일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3월 중순의 카라향 밭엔 선명한 주황빛의 카라향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 카라향 껍질만 봐선 충분히 익은 것 같아요.
“보기엔 맛있어 보이지만 신맛이 강할 겁니다. 4월에 접어들어야 당도가 15브릭스 이상 오르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완성되죠. 수확 시기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로 짧은 편입니다. 그 시기엔 꽃도 펴 있어요. 이듬해 열매가 맺힐 자리이기 때문에 꽃이 다치지 않도록 수확하는 게 중요합니다.”
- 가장 힘든 작업이 있다면요.
“전정 작업이 제일 힘들어요. 카라향 열매가 맺히고 튼실하게 자랄수록 나무가 아래로 쳐지는데요. 그러면 빛도 받지 못하고 땅에 닿으면 열매가 상할 수 있기 때문에 나무를 위로 묶어줘야 합니다. 그 외에도 습도나 온도를 맞추는 일도 까다롭죠. 한겨울에도 3도 미만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보일러를 틀어줘야 합니다. 다른 만감류보다 찬 공기에 더 민감한 편이에요.”
- 수확 후엔 어떤 일이 이어지나요.
“사람도 출산하고 나면 잘 먹어야 하잖아요. 나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수십 년간 농사를 짓다 보면 나무를 대할 때 꼭 사람처럼 대하게 돼요. 수확하고 난 나무에는 특별 제작 영양제를 뿌려줍니다. 당기, 인삼 등 한약재에 막걸리까지 섞은 저만의 레시피죠. 정말 사람이 먹어도 되는 성분들만 담아서 만듭니다. 그렇게 정성 들여 약을 주고 나면 나무도 그 힘을 받아 내년에 또 카라향을 주렁주렁 매달아 줍니다.”
◇불로장생 말고 ‘귤’로장생
밭에서 수확한 카라향은 제주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이하 제주농협)에서 관리하는 전문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로 향한다. 제주농협은 다른 농협과 비교해 다품종 소량생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레몬, 키위, 블루베리 등을 함께 취급한다. 2023년 연 매출은 약 130억원이다. 효자 품목은 단연 만감류다. 만감류 수확 시기에는 60~70명의 직원이 선별 작업에 동원된다. 유승현 기능 계장(49)의 안내에 따라 카라향 선별 과정을 알아봤다.
- 카라향은 어떻게 선별하나요.
“과거엔 크기별로 5개 정도로 나눴는데요.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선별 과정도 더욱 까다로워졌습니다. 평균 당도와 무게, 산도를 한꺼번에 측정해 20갈래 이상으로 나눠집니다. 수확시기에 임박해 당도를 확인해 보면 최소 15에서 17브릭스까지 나오죠.”
- 수확 이후 카라향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농가에서 수확한 카라향이 들어오면 2~3일 동안 예조 기간을 거칩니다. 과피에 남아 있는 수분을 날려 저장성을 올리고 산도는 낮추기 위해서죠. 이후 10~15도 사이로 유지되는 저온 창고에 보관하다가 주문량에 맞춰 선별·포장해 전국 각지로 배송합니다. 제주농협의 감귤 통합 브랜드 ‘귤로장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소비자를 만납니다.”
◇농부가 생각하는 은퇴 이후의 삶
20년간 귤나무에 정성을 들이며 농사를 지은 심 씨 부부는 장성한 세 딸까지 키워냈다. 카라향 수확량은 평당 최대 15㎏ 정도다. 카라향 중 상급품은 1㎏ 6000원 정도의 값을 쳐 준다. 카라향만으로 나오는 수익은 10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 그럼에도 카라향을 계속 재배하는 이유가 있나요.
“천혜향, 레드향에 비해 재배면적이 좁으니 수익이 적은 건 당연하죠. 그래도 다른 만감류가 나오지 않는 4~5월 봄철에 나오는 카라향만의 희소성이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면 울퉁불퉁한 카라향이 좀 더 팽팽하게 펴지면서 당도가 쑥 올라가는데요. 그때 그 맛을 보고 나면 놓칠 수 없는 품목이라는 확신이 들죠.”
- 맛있는 카라향 고르는 법이 따로 있나요.
“다들 당도만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더 중요한 건 ‘감미비’입니다. 감미비란 과실의 당도를 산도로 나눈 값인데요. 당도가 아무리 높아도 산도까지 높으면 달콤한 맛이 느껴지지 않아요. 예를 들어 당도가 12브릭스여도 산도가 1.2%라면 감미비는 12/1.2이니 10도에 불과한 거죠. 감미비까지 12도 이상으로 나오는 카라향이 정말 달고 맛있습니다.”
- 농부의 삶에도 은퇴가 있을까요.
“은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작한 일인데요. 남편과 얘기하다 보면 미래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몸이 따라줄 때까진 지금처럼 열심히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딸들에게 밭을 물려줄 생각은 없어요. 남편은 자꾸 사회에 환원하자고 하더군요. 솔직한 심정으로 ‘환원’까지는 고민이 되는데요. 나이가 들고 농사일이 버거워질 때쯤, 누군가 이 밭을 정성으로 일궈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넘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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