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리스(paperless) 화물 운송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기 전에 화물의 민족이었다. 산업 현장에 투입되는 원자재부터 소비재까지, 화물 산업이 개입하지 않는 영역은 없다.
하지만 너무 익숙했던 탓인지 변화가 더딘 시장이기도 했다. 20년차 개발자 출신인 곳간로지스의 김자영 대표(47) 눈에 화물 운송 시장은 변화의 여지가 많은 기회의 땅으로 보였다. 시장에 만연한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화물 운송 플랫폼을 개발했다. 김 대표를 만나 창업기를 들었다.
◇CTO까지 했던 개발자가 창업 결심한 이유
한양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금융·전자결제(PG) 분야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았다. “이랜드시스템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매장의 포스기 개발을 하는 직무였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소프트뱅크 자회사로 이직했어요. 5년간 카드 지급결제 시스템 개발자로 근무했죠.”
창업 직전에 금융 솔루션 기업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역임했다. “해외에서 금융 시스템 관련 경력을 쌓은 게 기회의 문을 열어줬나 봅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카드사, PG사에서 일하다가 금융 솔루션 기업의 CTO가 됐어요. PG 비즈니스를 하려면 금융 당국의 인허가가 필요한데요. 경험이 많았기에 관련 절차를 추진하고 개발을 주도했어요. 외국인들이 면세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거나 전자 상거래 플랫폼에서 결제할 때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용하는 모듈을 개발했죠.”
노력으로 이룬 C레벨이라는 자리. 직장인의 꿈을 이뤘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한 번도 창업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는데 기질이 있었나 봐요. 홍콩이나 일본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활성화된 비즈니스를 알아보다가 ‘셀프 스토리지’를 알게 됐어요. 한국에도 유사한 비즈니스가 있긴 했지만 ‘스테디카페’라는 용어처럼 이 공간 비즈니스를 정의하는 명사가 없더라고요. 한국형 셀프 스토리지 사업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첫 창업 때 발견한 의외의 가능성
2020년, ‘도심창고 곳간’을 설립하고 셀프 스토리지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실내 활동이 증가하면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수요가 증가했어요. 그 여파로 빠르게 성장했죠. 지금도 10곳 이상 운영되고 있어요.”
셀프 스토리지 사업을 고도화하던 중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큰 짐을 맡기려는 소바지를 타깃해 짐 배송 서비스를 추가했습니다. 승용차로는 역부족이라 화물차를 불러야 했죠.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표준화된 운송 단가가 없고, 많은 부분이 불투명했거든요. 화물 운송 시장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화물 운송 시장을 조사해봤다. 상상 이상으로 문제가 많았다. “이 시장의 플레이어로는 크게 화주와 차주가 있는데요. 그 사이에 N개의 운송사가 있습니다. 화주사의 발주담당자는 N개의 운송사에 전화나 메신저로 연락해서 배차 상태, 상하차 여부 등을 확인해야 하죠. 기사의 위치도 일일이 확인합니다. 기사님들은 화물 운송을 끝낸 후 종이로된 인수증과 계산서를 화주에 날인해서 보내야 하는데요. 인수증이 분실되면 보수를 받을 수 없어서 비싼 등기 우편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해도 60일 이후 에야 운임료를 지급받습니다. 스마트한 세상에 산다고 하지만 이 시장은 아직도 전통적이고 아날로그적이었어요.”
문제는 많지만 가능성은 큰 시장이었다. “화물 운송 시장의 규모는 택시 시장의 4.1배입니다. 하지만 다단계 구조라 비효율적인 비용이 많이 발생했어요. 화물료가 10만원이라면 기사는 7만원을 받습니다. 중간에 3만원 정도의 수수료가 발생하거든요. 게다가 운임료 지급이 지연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죠. 화물 운송 시장을 요악하면 BTS입니다. 우선 아주 큽니다(big). 동시에 전통적이에요(traditional). 게다가 영세업자가 주류인 세분화된(segment) 시장이죠. 이 시장을 투명하고 스마트하게 바꿔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장의 습성과 관행을 깨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2021년 곳간로지스를 설립하고 화물 운송 플랫폼 ‘프리모’ 개발에 들어갔다. “현장 조사부터 했습니다. 첨단 기술이나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해도 이용자들이 가려운델 긁지 않으면 소용없으니까요. 차량 기사들(차주)들을 소개받고, 이분들에게 박카스를 드리면서 이것저것 여쭤봤습니다. 화주사에 방문에 발주담당자가 일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기도 했어요. 투명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자료를 쌓아놓고 일하더군요. 수십개의 운송사와 소통하기 위해서 메신저 창을 잔뜩 켜놓은채로요. 그렇게 화주, 차주의 행동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습득한 정보를 토대로 플랫폼을 설계했다. “현장을 떠난 비즈니스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화주들이 화물 등록을 할 때 탭 버튼으로 창을 변환하는 행동을 그대로 반영했어요. 덜 불편하고 덜 낯설게 만드는데 집중한거죠. 차주들은 운전하면서 화면을 보기 때문에 가시성이 좋아야 합니다. ‘55세 남성이 크고 투박한 손으로 사용하는 앱’이라고 콘셉트를 설정하고, 글씨를 크게 키울 수 있도록 했어요. 기능 간의 간격까지 신경 썼죠. 시장의 습성과 관행을 깨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꼼꼼한 검증 통해서 이용자 유치
2022년 10월 한달 동안 한 업체와 기술검증(POC)을 진행한 후 2023년 3월 화물운송중개 플랫폼 프리모 정식 버전을 론칭했다. 웹페이지와 앱으로 구성된 서비스로 인공지능(AI) 기반 배차,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최적의 운송료 제시, 실시간 화물운송현황 알림, 자동정산 등이 가능하다. 전자인수증을 기반으로 운송비를 정산해서 종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차주는 영업일 기준으로 5일 후에 운임료를 받을 수 있다. 화주로부터 운송료 일부를 수취하거나 플랫폼 내 광고비로 수익을 낸다. 차주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올해 3월 기준으로 5000곳의 화주사와 차주사가 프리모를 이용하고 있다. “화주가 회원가입을 할 때 자격 증빙을 합니다. 운송 면허나 주선 면허를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 서류를 받죠, 차주도 화물운송 자격증과 적재보험 가엽 어부를 체크합니다. 이 절차를 거친 유저만 사용할 수 있어요.”
서비스를 꼼꼼하게 설계해 특히 차주들에게 호평을 얻고 있다. “운전할 때 상차지나 하차지의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소를 클릭하면 네비게이션에 연동이 되거든요. 날씨 정보도 제공하는데 운전자분들이 너무 좋아하세요. 사소한 것에 감동을 받은 거죠. 제가 지급결제 분야에서 경력을 오래 쌓았잖아요. 그 노하우를 담아 결제 시스템을 구성했습니다. 결제 과정과 계산서 발행이 자동으로 이뤄집니다. 통장의 유효성까지 검증한 뒤 이체하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없습니다.”
유명 타이어회사, 대형마트, 메이저 화장품 제조사, 통신사 등 이름 들으면 알법한 기업들이 화주로 등록돼 있다. “화물건이 등록될 때 마다 놀라요. 돼지 축사부터 화훼업체까지, 신기한 화주가 많습니다. 화물 운송 요청이 들어오는 걸 보기만 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여요. 발렌타인데이나 졸업철에는 꽃 물량이 늘어나고 김장철엔 절임 배추 운송 수요가 급증하는 식이죠. 제약이 없어서 무궁무진하고 재미있는 세계에요.”
◇그동안 꽃밭에 살았었구나
아마존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신용보증기급의 스탭업 도전기업에 선정된데 이어 2023년 10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에 진출했다. 우리나라 기업 뿐만 아니라 해외의 기업도 곳간로지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전철 운영사 JR 그룹과 협업을 논의 중이다. 작년 6억500만원의 매출을 냈다. 올해 한국 시장에서 더 많은 유저를 유치해 매출 50억원을 달성하는 게 목표다.
위로는 기존의 화물 중개 서비스가, 아래로는 신규 진입자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지만 자신있다. 곳간로지스만의 영역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레거시 기업들은 정보만 제공할 뿐 개입하지 않습니다. 화주나 차주의 자격 같은 것도 확인하지 않죠. 저희는 배차부터 정산까지 책임집니다. 일각에서는 카카오나 KT같은 대형 신규 진입자들의 진입이 위협이 된다고 지적하는데요. 이 시장은 누구 하나가 독점하기엔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만의 색깔로 정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실제로 정착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영업 기밀이라 구체적으로 알려드릴 순 없지만 경쟁자 때문에 긴장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경쟁자들과 함께 이 시장을 바꿔 나가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창업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20년간 일을 하면서 힘든 일도 많이 겪었고, 다른 개발자보다 많은 업무를 담당했지만 창업은 다르더군요. 매일같이 ‘그동안 내가 꽃밭에 있었구나’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다양한 분들의 인생사를 들여다 볼 일이 많았거든요. 까칠한 줄 알았던 기사님들이 따뜻하고 사람의 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직원 대하는 법, 회사 운영하는 법도 알아가는 중입니다. 20년간의 직장생활이 리셋되는 느낌입니다. 매일매일 새로 배우고 있어요.”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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