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990원 화장품, 샘플 모아서 무료' 화장품 유통의 판을 바꾸는 남자

더 비비드 2024. 6. 19. 09:56
작은 화장품 큐레이션 플랫폼 샘플로드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작은 화장품 커머스 플랫폼 ‘샘플로드’를 개발한 토브앤바나의 박영재 대표. /더비비드

H&B 스토어는 풍요로운 지옥이다. 궁금한 물건은 많은데 뭘 사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메이크업을 한 얼굴에 테스트를 할 수 없어 손등에 발라보고 구매하는 게 최선이다. 온라인 쇼핑은 더 큰 난제다. 손등에도 발라볼 수 없어 홍보 문구나 모델의 인지도에 의존해 구매 결정할 수밖에 없다.

토브앤바나 박영재 대표(30)는 화장품 시장에 만연하는 정보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작은 화장품 커머스 플랫폼 ‘샘플로드’를 개발한 계기다. 그를 만나 작은 화장품에 담긴 큰 그림에 대해서 들었다.

◇첫 창업 실패 후 깨달은 것

박 대표는 한동대에 재학하고 있을 때 처음 창업했다. /더비비드

창업 꿈나무였다. 한동대 ICT창업학부 재학 중 창업했다. “토스의 이승건 대표를 존경합니다. 여덟 번을 실패했는데도 아홉 번까지 시도한 것도, 금융의 혁신을 이뤄낸 점도 존경스러워요. 세상에 편의를 주는 솔루션을 만드는 일을 동경했어요. 스타트업을 하고 싶었죠. 돈도, 경험도 없었지만 학생 신분으로 창업하는 게 큰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해서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시도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네요.

2019년 남성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하고 구독 서비스를 접목했다. 에센스, 클렌징폼, 마스크팩 등의 기초 화장품을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서비스였다. “미국에서 면도기 구독 서비스가 성공한 것에 착안했어요. 뷰티 서비스가 활성화된 아시아 시장에 맞춰 화장품으로 출발했죠. 화장품 구매가 익숙하지 않은 남성을 겨냥했는데요. 에센스 외에는 반응이 저조했습니다.”

첫 창업 아이템이었던 남성 화장품 브랜드 '오더그레이' 제품. /토브앤바나

패인을 분석했더니 화장품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보였다. “화장품 브랜드는 일단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대중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패키지도 눈길이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 보니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고, 과장 광고가 많았어요. 자본이 부족한 소규모 브랜드들은 제품이 소비자에게 닿기 어려운 구조였죠. 소비자 역시 광고에 가려져 좋은 제품을 발견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고요. 브랜드 사업은 우리 자본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방향을 틀기로 했습니다.”

2021년, 브랜드가 아닌 플랫폼으로 눈을 돌렸다.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산업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어요. 그게 플랫폼이었죠. 덩치가 작아 주목받지 못하는 브랜드들이 각광받는 소비 문화를 정착하고 싶었거든요. 소비자 맞춤형 플랫폼으로 피봇(사업모델전환)을 결정하고 8개월간 플랫폼을 개발했는데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렸어요. 저희보다 훨씬 자본력이 좋은 경쟁사가 같은 모델을 개발 중이더군요.”

◇소비자가 진짜 원하는 건 마케팅이 아니라 이것이었다

박 대표는 작은 화장품 구매 트렌드에 주목했다. /더비비드

또 다시 새 아이템을 찾아 나서야 했다. 화장품 구매 트렌드가 눈에 들어왔다. “2020년경부터 작은 화장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리들샷 대란입니다. 50ml 본품을 12ml 단위로 쪼개서 출시했더니 불티나게 팔렸어요. 화장품을 구매했더니 피부에 맞지 않아서 버리는 경험이 누적된 결과였어요. ‘써보고 본 품을 사자’는 소비 행태가 자리잡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의 화장품 샘플 매장 하메이(HARMAY)가 결정적인 힌트를 줬다. “하메이는 작은 용량의 화장품이나 화장품 샘플을 파는 오프라인 몰입니다. 비용의 부담을 덜고 다양한 화장품을 접할 수 있어서 현지인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에게도 호응을 얻었어요. 쇼핑의 핵심인 ‘간접 경험’에 대한 욕구를 충족해서 얻은 성공이었죠. 하메이의 비즈니스 모델을 온라인으로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작은 용량의 화장품이나 샘플을 비용 부담 없이 테스트한 후 맞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취지를 살리기로 했다. 간소하게 플랫폼을 만들어 2022년 10월 베타 테스트를 진행했다. “샘플이나 소분한 화장품 3개를 선택하면 택배비만 받고 배송하는 형태였어요. 지금 모델과는 결이 달랐죠. 진행해보니 택배비만으로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할 수 없겠더라고요. 소분 작업도 만만치 않았고요. 수요는 확인했습니다. 랜딩페이지 전환율(페이지에 유입된 사람 중 앱 설치까지 한 사람의 수)이 17%나 달했거든요. 유명 서비스의 지표도 5% 안팎에 불과하니 높은 수치죠.”

◇인생화장품? 여기서 찾으세요

샘플로드 앱 화면. /토브앤바나

2023년 8월, 150ml 이내의 작은 화장품이나 샘플을 판매하는 모바일 앱 ‘샘플로드’를 론칭했다. “나만의 키트 만들기, 첫 구매딜, 팀 구매딜 등 총 3가지 형태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키트 만들기는 작은 화장품을 10개 모아서 한 번에 택배로 받는 기능입니다. 첫 구매 딜로는 1만5000원 이상의 제품을 990원에 구매할 수 있어요. 유인책이죠. 브랜드 입장에선 홍보 창구가 되고요. 팀 구매는 공동구매와 유사한 모델인데요. 같이 구매할 사람을 모아오면 해당 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구매와 리뷰 건이 쌓이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당 유저에게 맞는 제품을 추천해줘요.”

지금까지 87개 브랜드의 330여가지 제품이 샘플로드에 입점했다. “누구나 이름을 아는 백화점 브랜드부터 H&B 스토어에 입점한 소규모 브랜드까지 아우르고 있습니다. 스킨케어 제품들이 두루 잘 나가고 향수도 인기가 많아요. 본품도 판매하는데 향수의 경우 본품 매출 비중이 큽니다. 처음엔 백화점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 인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소한 브랜드의 스킨케어가 반응이 좋았어요. H&B 스토어에 방문한 소비자들이 보통 맨 얼굴이 아닌 손등에 제품을 바르고 구매결정을 하잖아요. 샘플로드를 이용하면 화장기 없는 얼굴에 테스트할 수 있어서 구매 실패를 막을 수 있어요. 샘플로드로 본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저희를 통해 인생템을 찾은 유저가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뿌듯합니다.”

작은 화장품과 샘플 판매는 화장품 브랜드 입장에서도 이득이다. “재고폐기는 화장품 브랜드들의 고질적인 과제입니다. 심한 경우는 제고 폐기율이 27%에 달해요. 화메이가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한 사례입니다. 폐기될뻔한 재고를 샘플이나 작은 화장품으로 전환해서 판매해 손실을 수익으로 전환한 거죠. 저희도 입점 제안을 할 때 이 점을 어필합니다.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호의적인 반응이에요. 대기업 계열의 뷰티 브랜드에서도 입점 희망 의사를 밝혀 현재 논의 중입니다. 다만 상품성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1년 이상 남은 제품만 받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아서 얻은 결실

샘플로드 론칭 후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앱 가입자 수는 3만명을 돌파했고, 매출은 매달 2배씩 증가 추세다. 가입자의 구매율은 11%, 재구매율은 17%. 타 뷰티 커머스 플랫폼의 펑균 구매율이 3%인 점을 감안하면 유의미한 수치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2020년 포스텍홀딩스에서 시드 투자를 받았다. 지난 2월 진행된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에서 2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 진출했다.

요즘은 서비스 고도화에 주력하고 있다. “팀 구매 기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필살기로 돌풍을 일으킨 커머스 플랫폼들이 있는데요. 저희도 팀 구매 기능을 활성화해서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화장품 구매 실패 경험을 줄여주는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화메이의 등장으로 작은 화장품 제조에 초점 맞춘 브랜드가 늘었습니다. 화메이의 존재가 주류가 된 거죠. 화장품 구매의 대안을 제시한 뒤 작은 화장품 구매를 하나의 소비 문화로 정착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박 대표는 작은 화장품 구매를 소비 문화로 정착하고 싶다고 했다. /더비비드

한 번의 실패와 여러 번의 시행착오. 포기하지 않아서 얻은 결실은 그 무엇보다 값지다. “지금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구매 형태를 확신하는 단계입니다. 이 비즈니스가 얼마나 커질 지는 지켜봐야 하죠. 서비스 론칭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정도로 많은 분들이 회원가입을 하고 지갑을 열어주는 서비스는 샘플로드가 처음입니다. 성과를 지표를 확인하면서 저희의 가능성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