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대를 위한 문화예술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티슈(Tissue)는 생물학에서 세포로 이뤄진 한 조직을 뜻한다. 문화예술 메타버스 플랫폼을 제공하는 스타트업 ‘티슈 오피스’는 생물학의 지혜를 빌려온 조직이다. 그래픽 디자인, 건축, 뇌공학 등 각기 다른 학문을 전공한 6명이 의기투합했다.
티슈오피스가 만든 메타버스 플랫폼 ‘히든오더’는 태양계 행성 ‘화성’을 배경으로 한다. 히든오더는 가상 공간이지만 아티스트들에게 ‘새로운 무대’가 됐고, 관람객에게는 시공간 제약이 없는 ‘새로운 콘서트장’으로 자리 잡았다. 2021년 6000명이 이용해 약 1억4000만원의 매출을 냈다. 주식회사로 시작한 지 1년도 안돼 낸 성과다. 티슈 오피스의 이상익(31) 대표를 만나 메타버스 플랫폼 스타트업의 창업기를 들었다.
◇디자인 독립 학교 졸업 후 게임 규칙 디자이너로 활동
고교 졸업 후 대학 대신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한글 글꼴 디자인 분야에서 저명한 안상수 디자이너가 세운 학교다. “안상수 디자이너가 바우하우스(배움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는 것) 정신을 계승해서 디자인 학교를 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디자인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 들어갔어요.”
4년 동안 글짜술(타이포그라피)을 주로 배웠다. “여러 프로젝트를 했어요. 2017년에는 프랑스 북부의 캉브레(Cambrai)에서 교환학생을 했죠. 벨기에, 영국, 독일, 포르투갈 등을 방문하며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을 많이 돌아다녔어요. 최소 50곳은 다녀온 것 같아요.”
2018년 학교 졸업 후 교육 게임 플랫폼을 만드는 스타트업 ‘놀공발전소’에서 게임 규칙 설계 디자이너로 일했다. 다양한 게임 규칙을 설계하며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론을 연구했다. “만약 괴테의 파우스트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세요. 굉장히 어려운 책이잖아요. 근데 이걸 게임으로 접하면 쉽게 이해해요. 참가자가 파우스트가 돼 악마의 상점에서 욕망을 거래하는 체험형 게임을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파우스트를 경험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게임만 했을 뿐인데 책 내용을 모두 숙지하게 돼요. 이처럼 하나의 정보를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달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꼈어요.”
모든 디자이너가 꿈꾸듯,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적절하게 마음 맞는 동료들을 만났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를 같이 다닌 조영 씨와 놀공 회사에서 만난 이승아 씨, 교환학생 시절에 만난 친구들 등 4명이 일을 해보기로 했어요. 우리 4명의 공통점은 ‘우리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가끔 같이 작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뭉치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발자 2명을 더 영입해서 지금의 티슈 오피스가 됐습니다.”
2019년 4명의 초기 멤버들과 개인 사업자로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미술관에서 요청을 받아 디지털 전시관을 꾸리는 작업 위주로 경험을 쌓았다. “디자인 스튜디오라면 회사 포트폴리오를 잘 구축해야 해요. 스튜디오의 첫인상이니까요. 그런데 작업물을 쭉 나열해놓은 평범한 포트폴리오는 만들기 싫었어요. 우리의 특징을 보여줄 수단을 고민하다가 ‘게임’을 이용하기로 했죠.”
‘게임’ 방식의 포트폴리오 ‘미션! 오피스’를 제작했다. 배경은 화성. 게임 곳곳에 티슈 오피스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게임의 목적은 티슈 오피스 작업물을 찾는 것. 관람객이 작품을 보면 ‘생각 조각’이란 게 모이는데, 이 조각을 모으면 건물이 생기며 게임은 끝이 난다.“우리의 철학과 가치관을 ‘미션! 오피스’에 녹이려고 노력했어요. 게임이다 보니 쉽고 재밌게 우리를 표현할 수 있었죠. 이런 포트폴리오 제작과 같은 실험적인 것들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많이 했어요.”
- 화성을 배경으로 한 이유는요?
“미술관들과 협업하면서 늘 염두에 둔 게 있어요. ‘복사하지 말자’. 사진 찍듯이 그대로 복사해서 보여주는 것은 좋은 전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디지털 공간에 적합한 작품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 지구를 똑같이 재현하면 안 됐어요. 화성은 가깝기도 하고,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지만, 가본 적 없는 땅이잖아요. 그래서 지구를 재현한 화성을 주 배경으로 했습니다.”
◇돈 벌 궁리만 하다간 지쳐요
2021년 3월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본격적으로 수익 창출에 돌입했다. 하지만 돈 벌 궁리에 천착하다 보니 겉도는 상황이 계속됐다. “모든 의사결정 중심이 돈이 되니까 잘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분야에 뛰어드는 상황이 반복되더라고요. 한번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창업지원 사업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하다가 마감 1시간을 앞두고 모두가 폭발했어요.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이걸 하는 게 맞을까’ 고민했죠. 결국 지원서를 안 냈어요.”
초심으로 돌아가 가장 행복했던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메타버스 전시관을 만들기로 했다. “디지털 공간을 제작하기로 한 다음 날, 잡지사 ‘디자인 하우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2021년 5월호의 주제가 ‘메타버스’인데 같이 작업하자고 하더군요. 잡지 표지와 지면을 디자인하고, 메타버스 내 전시장을 구축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죠.”
디자인에 몰두하기 위해 팀 전원이 노트북만 챙기고 제주도로 달려갔다. “잡지사 디자인 하우스의 사옥을 가상 공간에 재현했어요. 사옥 내부는 신신, 다모, 파일드, 플로라앤파우나 4명의 유명 디자이너 작품 전시장을 구현했죠. 사업 초기 디지털 전시장을 꾸려봤고 게임 방식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본 경험도 있어서 이 과정이 아주 어렵진 않았어요. 약 4주를 쏟아 작업을 끝냈죠.”
애플리케이션으로 메타버스 전시장을 구현하기로 했다. 앱 ‘히든오더’를 개발해 이곳에서 전시를 열었다. 가상의 ‘화성’을 앱 히든오더에 만든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중의 반응에 힌트를 얻었다. “하나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그곳을 놀이터처럼 이용하는 모습이었어요. 아바타들이 방방 뛰기도 했고, 아바타들끼리 소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가상공간 이상의 역할을 하더라고요. 코로나 사태로 외부 활동에 제약이 생겼지만, 좋은 작품을 접하고 이를 타인과 공유하는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들의 재미를 더해주기 위해 게임을 추가했다. “금, 토, 일 등 이용객이 몰리는 요일을 정해서 밤 8시마다 월간 디자인의 기자가 노란색 괴물로 등장하게 했어요. 기자랑 같이 사진을 찍으면 선물을 보내줬는데, 인기가 많았죠. 8시 정각에 들어가면 그 괴물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어요. 다 같이 뛰어다니고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도 재밌었고, 관람객도 즐겼죠. 이런 모습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본인들끼리 흥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디지털 공간에서는 이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재미 요소를 더 넣을까에 더 집중한 것 같아요.”
디자인 하우스의 가상 사옥을 구축한 경험을 키워서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메타버스 플랫폼 ‘히든오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술관 방문주기를 물어봤어요. 자주 간다고 하는 사람도 한 달에 한 번 간다고 하더라고요. 시간 제약에 코로나19라는 상황까지 맞물리며 미술관에 접근하는 문턱은 더 높아졌어요. 언제 어디서나 예술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어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싶었어요.”
◇웃고 떠들어도 괜찮은 미술관
디자인 하우스의 가상 사옥을 구축한 온라인 공간을 확장해 2021년 5월 29일 히든오더 정식 버전 앱을 출시했다. 스마트폰으로 히든오더 앱에 들어가서 메타버스 전시나 공연을 볼 수 있다. 기관에서 요청을 받으면 관련 메타버스 공간을 내어준다. “전시나 공연을 희망하는 기관으로부터 대관료를 받아요. 관람객에게는 따로 돈을 받지 않아요.”
오프라인 문화 공간과 가장 큰 차별점은 ‘소통 방식’이다. “메타버스 문화 공간만의 장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소통’에서 답을 찾았죠. 미술관에서 큰 목소리로 떠들 수 없잖아요. 하지만 히든 오더에서는 아바타로 소통할 수 있어요. 여기서는 부끄러움이 없어지죠. 신나는 락 공연을 할 때는 아바타가 DJ 머리 위에 올라가 춤을 춰도 괜찮아요. 디지털 공간에서라도 체면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문화 예술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생각 없이 들어와서 가볍게 즐길 수 있죠.”
히든오더는 설 자리 하나가 요원한 신진 아티스트들의 무대로도 활용되고 있다. “작년 12월 10일에 진행한 가수 소만의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희 플랫폼에서 뮤직비디오를 재생했는데, 이후 인기가 많아졌대요. 소만의 뮤직비디오가 올라간 유튜브 게시물에 ‘히든오더를 보고 왔다’는 댓글도 볼 수 있었죠. 인지도가 부족한 아티스트라도 아무 곳에서 전시나 공연을 하고 싶어 하진 않아요. 오프라인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아티스트에게 기회의 땅이 돼 주고 싶어요.”
◇기술자 대신 디자이너가 주류인 메타버스 스타트업
지금까지 20여 건의 문화예술 이벤트가 히든오더에서 진행됐다. 서울시립미술관이나 현대어린이책미술관 같은 큰 기관도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퍼레이드도 했다. 문화연대 ‘타투입법’ 퍼레이드에 약 300명이 참여했다.
히든오더를 거쳐 간 아티스트는 200명이 넘는다. 이런 열띤 반응은 티슈 오피스의 자극제가 됐다. 올해 1월에는 은행권 창년창업재단 디캠프가 주최한 창업경진대회(디데이) 본선까지 진출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보통 메타버스 스타트업은 경영, 경제, 컴퓨터 공학 전공자가 주류인 경우가 많아요. 저희는 디자인 등 예술 전공자가 대부분이라는 점이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플랫폼으로 영리를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 표현 수단으로서의 디지털 공간을 구축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죠.”
누구나 메타버스 속에서 본인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아티스트뿐 아니라 누구나 디지털 공간에서 자신의 작업물을 표현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요. 그와 동시에 관람객들도 ‘아, 이런 방식으로도 관람을 할 수 있구나’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비 창업자에게 좋은 동료를 만날 것을 강조했다. “취미가 클라이밍이에요. 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힘은 유한하고, 동작은 무한하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힘으로만 올라가면 결국 지쳐서 지속할 수 없으니, 힘을 덜 쓰는 동작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죠. 창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유명한 창업가도 각자가 가진 힘은 유한하거든요. 그 힘을 어디에 집중해서 쓸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아요.”
/김수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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