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사업에 도전한 20대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20대 여자가 이걸 해?” 기능성 깔창 및 신발 제조 스타트업 나인투식스의 기희경(29) 대표가 창업한 이래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기능성’과 ‘청년’이란 단어의 부조화, '제조업은 젊은 여성이 이끌기 힘들다는 편견'이 맞물린 탓이다.
기 대표는 주변의 염려를 보란 듯이 깨며 5 년째 성공 스토리를 써가고 있다. 나인투식스의 브랜드 ‘워킹마스터클럽’은 다양한 기능성 깔창을 판매한다. 편한 발을 위한 제품은 중장년층만 찾을 것이란 예상을 깨며 국내 깔창 브랜드 중 최초로 백화점에 입점했다. 깔창으로 입지를 다진 후 기능성 신발까지 진출했다. 기 대표를 만나 창업 스토리를 들었다.
◇겁없이 시작한 창업
워킹마스터클럽은 기능성 깔창과 신발을 만든다. 대표 제품 '워킹마스터 물컹슈즈’는 한국인의 발 모양을 고려한 구조와 실리콘 깔창의 푹신함이 특징이다. 기능성 깔창을 판매하며 쌓은 데이터 3만여건을 기반으로 착화감과 디자인을 모두 챙겼다.
어렸을 때부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로를 기자로 정하고 경북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휴학하고 인턴 기자 생활을 했는데 실상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진로를 고민하던 중 아버지께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도 성숙할 수 있는 길이 창업'이라 말씀하시더군요. 아버지 스스로 수제화 제조 회사에서 일하다 기능성 신발 회사를 만든 창업가시거든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같은 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업의 기폭제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떠난 아프리카 사막 여행이었다. “한 달 동안 모로코 사막을 걸었는데 발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알고 보니 새끼발가락 뼈가 휘면서 관절이 튀어나온 거에요. ‘아버지가 권했던 기능성 신발을 신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죠. 투박하다 생각해서 신지 않았던 거에요.”
여행 막바지까지 예쁜 신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발을 편안하게 만들 순 없을까 고심했다. 신발 대신 깔창을 떠올렸다. “제 또래가 주로 신는 운동화는 편안함보다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잖아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발이 편했으면 하죠. 갖고 있는 신발에 기능성 깔창을 깔면 발의 편안함과 디자인 모두 잡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20대 중반, 친구들이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쓸 때 홀로 사업계획서를 썼다.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 도움을 받아 2017년 5월 나인투식스를 설립했습니다. 간편하게 신발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깔창을 구상했어요. 예전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봤던 게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기술자 수준은 아니지만 발에 닿는 제품에 대한 기본지식은 있었거든요.”
예상과 달리 이내 고생길이 펼쳐졌다. “제품을 만들어줄 공장을 찾는 게 생각보다 험난했어요. 아버지께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실 줄 알았는데 창업할 용기만 불어넣어 주셨지, 막상 창업한 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죠. 무작정 신발, 깔창 제조 공장이 모여있는 부산의 한 동네를 찾았어요. 젊은 여학생이 깔창 사업을 하겠다는 게 공장 사장님들 눈엔 낯설어 보였나 봐요. 수십개 공장에서 거절당했어요. 오히려 사업을 접으라며 타이르는 분도 있었어요.”
설득 끝에 뜻이 맞는 업체를 찾았다. “공장이 문을 닫는 밤까지 밖에서 기다렸어요.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눈 끝에 계약을 맺었죠. 처음에 깔창 5000~1만개를 주문했는데, 공장에서 이윤을 거의 볼 수 없는 수량이었어요. 신생 업체이니 앞으로 계속 주문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요. 그저 제 진정성만 믿었다 하시더군요.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는 고마운 업체죠.”
◇한국인 발에 최적화된 신발로 도약
‘내 발에 맞는 깔창 찾기’라는 콘셉트로 끼운 첫 단추는 성공적이었다. 제품군을 대폭 늘려 2019년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기능성 깔창 품목을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다음 단계로 도약을 꾀했다. “웬만한 깔창은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오프라인 매장을 찾은 소비자들이 신발은 안 파냐고 묻더군요.”
깔창을 판매하며 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능성 신발을 만들기로 했다. “사람들이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게 아니라 발을 신발에 맞추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동양인은 대체로 발볼이 넓어요. 그런데 해외 브랜드 운동화는 발볼 부분이 좁죠. 오프라인 매장에서 매일 소비자의 대략적 연령대와 성별, 통증부위, 구매한 깔창 종류를 기록했어요. 온라인 판매 기록까지 합하니 3만건 넘는 데이터가 쌓였죠. 깔창 소비자들의 발볼 넓이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찾아 평균치를 적용했죠.”
깔창 제작 경험을 살려 소재도 하나하나 신경 썼다. “깔창이 너무 푹신해도 안 좋아요. 무게중심이 잡히지 않아서 금세 피로해지거든요. 너무 딱딱하면 발이 아프고요. 적당한 착화감을 만드는 소재가 실리콘이에요. 신발을 신으면 땅을 밟는 느낌이 아니라 말랑한 실리콘 위를 걷는 느낌이 나요. 단가가 비싸서 망설였지만 이만한 소재를 찾지 못하겠더군요. 마진을 줄이더라도 최상의 소재를 쓰기로 결심했어요.
밑창은 미끄럼 방지를 위해 천연고무를 이용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전부 고무를 넣으니 무거워지더라고요. 신발이 너무 가벼우면 발을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무거우면 오래 신기 어렵잖아요. 그 중간점을 찾았어요. 밑창 속을 가벼우면서도 쿠션감이 좋은 소재인 EVA로 채웠습니다.”
마지막 관건은 디자인이었다. “화려한 디자인은 고려하지 않았어요.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떠올렸죠. 다만 손이 가지 않는 투박한 기능화의 이미지는 탈피하고 싶었어요. 무난한 검정색부터 아이보리색, 분홍색 등 여섯 가지의 심플한 색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편하면서 보기에도 예쁜 기능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어요.”
기능을 테스트하며 완제품을 만들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한국인 발에 최적화된 기능화를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입니다. 가격은 10만원 아래로 비교적 저렴하게 책정했죠. 착화감은 서비스업 종사자분들께 시착을 요청해 확인했어요. 일하면서 발이 신경 쓰이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라는 등 반응이 돌아오더군요.”
◇”편견에 휩싸이지 마세요”
코로나 사태로 4개월간 공장 문을 닫아야 했는데도 작년 매출 10억원을 기록했다. 워킹마스터클럽의 제품들은 롯데백화점 영등포점과 분당점, 올리브영, 카카오 메이커스 등 다양한 채널에서 판매되고 있다. 신발 제품은 각종 온라인몰에서 한정 할인 행사를 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제품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현재 소비자 절반 이상이 30대 여성이에요. 중장년 남성이 주소 비자일 거라는 예상을 엎은 거죠. 깔창이 그랬던 것처럼 물컹슈즈가 다양한 소비자들의 발을 편하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강조했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제품도 소비자들의 요구를 재빠르게 파악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어요. 처음 창업 아이템을 얘기했을 땐 제조 공장 관계자부터 주변 친구들까지 모두 고개를 저었죠. 하지만 실제로 부딪힌 세상은 편견과 달랐고 충분히 도전할만한 곳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던 배경으로 추진력을 꼽았다. “어쨌건 결정은 대표자의 몫이잖아요. 주변의 의견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처음에 생각했던 걸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해요. 아버지에게서 배운 점이기도 하죠.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창업을 택했더니 경쟁상대가 됐다며 서로 웃어요. 물컹슈즈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장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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