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수학의 정석 다시 꺼냈던 25살 서울대 불문학도, 20년 후 꾸고 있는 꿈

더 비비드 2024. 6. 24. 14:25
틸다 정지량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틸다의 정지량 대표. /더비비드

“‘그래도 동시대에 살고 있는 지식인인데, 어떻게 하나도 이해를 못 할 수 있나’라는 생각에 전과를 결심했어요”

25살의 패기로 시도한 전과였다. 어학 전공생이었던 그는 서울대 도서관에서 다시 고교 수학의 정석을 펼쳤다. ‘컴퓨터 공학’으로 방향을 틀기 위해서다.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기질은 결국 그를 창업으로 이끌었다. 틸다의 정지량(47) 대표 얘기다. 정 대표는 삼성전자를 다니다 제조 설비의 제어 값을 최적화해 주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정 대표를 만나 그가 개발한 솔루션이 펼칠 미래에 대해 물었다.

◇우리 회사 생산 설비 최적화 시켜주는 알고리즘

AI 스타트업 틸다가 개발한 설비 최적화 솔루션 '아그맥스.' /틸다

스타트업 틸다는 AI 기반 제조 설비 최적화 솔루션 ‘아그맥스’의 개발사다. 아그맥스는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던 기업 내 의사 결정을 데이터와 AI 알고리즘으로 대체해 최적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돕는 웹 서비스다.

예컨대 장비를 사용하는 제조 기업이 아그맥스를 도입하면, 어떤 자원을 언제, 얼마나 투입해야 하며, 해당 장비는 어느 수준의 속도와 세기로 가동하면 될지를 알 수 있다.

6월 디데이에서 사업 아이템을 소개하는 정 대표. /디캠프, 틸다

틸다는 설비 최적화를 의뢰한 기업으로부터 장비와 관련된 데이터를 받아 특허 출원한 알고리즘에 데이터를 투입해 값을 낸다. 기존의 데이터 컨설팅 기업이 정보를 보기 쉽게 정리해 의사 결정에 도움 될 만한 ‘예측’ 형태의 자료를 제공했다면 아그맥스는 제조 설비에 맞는 특정 제어 값을 아예 결정해 준다.

현재 틸다는 한솔제지와 아그맥스 도입을 앞두고 3차 실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난 6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불문과에서 컴퓨터공학과로 전과한 이유

틸다의 정지량 대표는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다가 3학년에 컴퓨터공학과 전과했다. /틸다

정 대표는 문과 출신이다. 서울대 불어불문과에 진학했다. 국경 너머의 세상이 궁금해 택한 전공인데, 그 너머 세상으로 연결해 줄 언어를 뒤늦게 발견했다. “제대 후 미국 워싱턴 주립대로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컴퓨터공학이 유망 전공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죠. 학교 앞 서점에 갔는데 벽 한 면이 모두 프로그래밍 언어 관련 서적이었어요. 몇권 펼쳐보니 역시나 하나도 모르겠더군요. 프로그래밍 언어도  크게 보면 같은 ‘언어’잖아요. 나라고 못 할 것 없다는 오기가 들었어요.”

당시 서울대에서 전과하려면 전공 이수 학점이 90학점 미만이어야 했다. 정 대표는 88학점이었다. 2000년 가까스로 전과에 성공했다. 6학기 째부터 3년을 더 다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했다. “도서관에서 이과용 수학의 정석을 펼쳐 공부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힘들었죠. 하지만 적성에 맞아 즐거웠어요. 졸업 후 텍사스 A&M 대학교의 AI 컴퓨터공학 석박사 통합 과정에 합격해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2011년 긴 연구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 수석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과장 2년차 정도의 직급으로 입사했습니다. 당시 ‘갤럭시 S2’라는 스마트폰을 준비하던 시기였죠. 저는 디지털 시계 등 스마트폰과 함께 사용하는 액세서리를 개발하던 선행 연구팀에 들어갔습니다.”

창업 계기와 사업 아이템에 대해 설명하는 정 대표의 모습. /더비비드

2018년 즐겁게 다니던 삼성전자에서 퇴사했다. 창업이라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씨랩(C-Lab)’이라는 임직원 대상의 창업경진대회를 정기적으로 열어요. 제가 연구원이었던 터라 제출된 아이디어의 현실성을 판단하는 심사위원으로 몇번 참가한 적이 있는데요.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동료들을 보며 창업에 대한 욕심이 생겼어요.”

퇴사 후 ‘마인즈앤컴퍼니’라는 AI 기반의 경영 컨설팅 스타트업의 파트너로 입사했다. “기업 경영에 필요한 AI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창업의 초석이 됐어요. 2년간 근무하면서 여러 기업의 데이터 담당자를 만나 이들의 실질적인 고충을 들을 일이 많았는데요. 그 속에서 새로운 기회가 보였거든요.”

AI 기술은 제조 현장에서 더욱 각광을 받았다. “투입 자원·에너지 등 외부 비용이 바뀌거나 품질 고도화 등의 이유로 생산 목표를 변경하게 되면, 설비의  제어값을 변경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이런 의사 결정을 모두 최소 10년 이상의 숙련된 엔지니어에게 맡깁니다. 베테랑 엔지니어의 노하우에 의존하는 것이죠. 경영진 입장에서는 인적 자원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의사 결정 구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력 유출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일련의 의사결정은 모두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데요. 내· 외부 변수에 따라 시시각각 바꿔야 하는 제어 값을 정해주는 AI서비스를  개발하면 제조 현장에서 활용되겠다 싶었습니다.”

◇공장 구동 비용 아껴주는 서비스

아그맥스의 사용법을 설명하는 정 대표의 모습. 아그맥스는 웹 솔루션이다. /더비비드

2021년 3월, AI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 ‘틸다’ 법인을 설립하고 솔루션 개발에 착수했다. 인공지능 학계에서 알려진 ‘뉴로이볼루션’이라는 핵심 이론을 기반으로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뉴로이볼루션이란 자동차 자율주행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을 들어봤을 ‘강화학습’ 이론과 일맥상통합니다. 풀고자 하는 문제에 변수를 투입해 머신러닝(기계학습)을 시키면, 각 변수에 상응하는 값이 나오는 거죠. 변수가 정확하고 많을수록 정밀한 값이 나오고요. 보통 사람도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니까, 기업 입장에선 ‘과거의 모든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직원’을 고용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 기업과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는 실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표 사례가 한솔제지와의 실증 사업이다. “제지 기업은 폐지와 나무칩 등의 자원을 ‘리파이너’라는 장비에 투입해 펄프를 생산합니다. 이때 제지기업은 자원을 어느 속도로 투입하고 장비는 어느 세기로 돌릴지 '입력값'을 결정해야 하죠. 제품의 품질과 생산성을 크게 좌우하는 핵심 의사 결정 과정입니다. 현재 이를 아그맥스가 대체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린 의사 결정과 반복적으로 대조해 보고, 어떤 결정이 생산성이 더 높은지 분석하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에너지 소비량은 약 20% 절감하고, 품질은 42% 제고한 성과를 냈습니다.”

(왼쪽부터) 틸다의 정지량 대표와 구독형 아그맥스의 서비스 화면 예시. /틸다

보다 접근성을 높인 신규 서비스 ‘구독형 아그맥스’도 개발했다. “지금까지는 의뢰 기업의 투입 인력, 프로젝트 진행 기간, 도출해야 할 값이나 데이터의 크기 등을 기준으로 아그맥스 이용료를 책정했습니다. 보통 대기업 책임급 직원 연봉 이상의 비용이 발생하죠. 그러다 보니 덩치가 작은 중소 업체 입장에서는 이용료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더라고요.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제한된 정보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범용 아그맥스를 개발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조업 장비 조작에 공통으로 필요한 변수만 추렸어요. 기업 담당자가 직접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아그맥스에 입력하면 제어 값을 도출해 주죠. 더 정밀한 값을 원하면 기존의 맞춤형 아그맥스를 활용하면 됩니다.”

◇인공지능과 사람이 공존할 때

틸다의 임직원. 19명의 임직원 중 17명이 개발자다. /틸다

현재는 제조업 현장을 공략하고 있지만, 비제조업을 포함한 산업 전반에 진출할 구상이다.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 대스타 해결사 플랫폼 사업을 통해 야구 구단인 롯데자이언츠와 관중 수 최대화를 위한 티켓 가격 최적화 사업을 진행했다. 전동킥보드 공유 스타트업 ‘스윙’과는 스쿠터 배치 최적화 사업도 진행했다.

올해 매출 10억원을 돌파했다. 누적 투자 금액은 3억원이다. “성장기라 매출이 발생하는 족족 서비스 개발 인력의 인건비로 투자합니다. 임직원 19명 중 17명이 개발자입니다. 인건비로 월 1억원 이상 사용하죠. 모두 일당백을 하고 있습니다. 기기 제어뿐 아니라 물류 적재, 배치, 금융 상품 개발, 소비재 가격 확정 등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정 대표는 'AI 관련 기술이 어디까지 발달할까’에 대한 생각은 업계 종사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더비비드

AI가 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우려에 공감은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효과도 있다고 생각한다.  “‘AI 관련 기술이 어디까지 발달할까’에 대한 생각은 업계 종사자들끼리도 달라요. 기술력을 넘어 사회 윤리적인 문제까지 생각해 봐야 하니까요. AI의 발달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조만간 많은 인력을 대체할 거라는 확신은 듭니다. 다만, 창작의 영역은 AI도 섣불리 침투할 수 없을 거예요. AI는 ‘과거의 정보를 기반으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내는 것’에 특화돼 있거든요. AI를 적재적소에 적용하는 것 또한 인간의 영역이니, 무조건 배척하는 것보다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할 시기라고 봅니다.”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