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구가 아녜요. 요즘 한국에서 홍로 사과가 가장 맛있는 곳은"

더 비비드 2024. 6. 24. 13:41
해발 650m 4500평 강원도 사과 과수원 다녀왔습니다

임계농협 홍로 공선회장 노현태 농부. /더비비드

“아이고 오느라 고생하셨네요. 시원한 물 한잔씩 먼저 드세요.”

7일 찾아간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의 사과 과수원. 해발고도 650m, 4500평 규모의 밭에 수천 그루의 사과나무가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산길을 오느라 귀가 먹먹해져 침을 삼키던 순간 주황색 작업차가 새빨간 사과 열매 사이로 나타났다. 노현태(65) 농부를 첫 대면한 순간이다.

홍로 수확을 위해 작업차에 오른 노 회장의 모습. /더비비드

노현태 임계농협 홍로 공동선별출하회(공선회) 회장은 2017년 옥수수를 기르던 밭에 사과 묘목 1900그루를 심었다. 한때 황금빛 옥수수로 가득했던 이 땅은 사과나무 식재 후 3년의 기다림 끝에, 나무 한 그루에 130알의 사과가 열리는 알짜 밭이 됐다. 노 회장을 만나 늦깎이 사과 농사 도전기를 들었다.

◇추석 사과 ‘홍로’, 이젠 강원도가 주산지

노현태 농부가 기른 홍로. /더비비드

홍로는 사과의 품종 중 하나로, 1987년에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최초의 국산 사과다. 사과 중에서도 알이 크고 과육이 단단한 편이며, 껍질 색이 선명해 ‘먹기 좋고 보기도 좋은 사과’로 알려져 있다. 9월 초에 수확하는 픔종으로, 추석 제사상에 오른 햇사과라면 예외 없이 홍로다. 새콤한 맛보다는 단맛이 강한 편이고, 평균 당도는 12~14브릭스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홍로의 주산지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경남 거창군, 경북 영주시, 청송군 같은 영남지역이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10여년 전부터 한반도의 사과 재배지가 북상했다. 사과는 밤 기온이 서늘할수록 당도가 높아져 일교차가 매우 중요한데, 남부지방의 열대야가 나날이 심해지면서 사과 재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임계면은 정선군 내에서 홍로 재배를 빠르게 시작한 지역 중 하나다. 임계면 전체 1500가구 중 약 180농가가 사과를 기르고 있다. /더비비드

그렇게 사과의 새로운 주산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강원도 정선군이다. 군청에 따르면 이 지역의 사과 재배지는 2010년 50ha(약 15만평)에서 2020년 250ha(약 75만평)로 10년새 5배나 늘었다. 그중에서도 임계면은 정선군 내에서 홍로 재배를 빠르게 시작한 지역 중 하나다. 임계면 전체 1500가구 중 약 180농가가 사과를 기르고 있다.

◇’면서기’ 되고 싶었던 강원도 산골 청년

노 회장은 임계면 토박이다. 6남매 중 장남으로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더비비드

1958년생인 노 회장은 임계면 토박이다. 16살의 나이로 농사에 입문했다. 감자 농사를 하시던 부모님의 업을 이어받았다.

-농사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74년부터 농사일을 했습니다. 벌써 50년째네요. 어렸지만 3남 3녀 중 장남이라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6.25 전쟁 중 부상을 입으셔서 몸이 불편하셨거든요. 그땐 솔직히 농사가 참 싫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면서기’(지방의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행정 공무원)가 되고 싶었어요. 꿈을 놓지 않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요. 시험까지 준비하기엔 농사일이 너무 바빴어요.”

취재 중에도 쉴틈 없이 사과를 수확하던 노 회장의 모습. /더비비드

-처음 길렀던 작물은 무엇인가요.

“그땐 강원도 땅이 척박해 구황작물만 기를 수 있었습니다. 갖고 있던 땅은 고도까지 높아 물도 대기 어려웠죠. 옥수수, 감자, 무, 배추를 길러 돈을 조금 모으면, 물길이 나 있는 인근의 논을 조금 빌렸습니다. 당시엔 직접 키운 벼로 쌀밥을 해 먹었어요. 결혼 전까지 부모님, 할머니, 그리고 동생 5명의 대가족 살림을 이렇게 유지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깨가 정말 무거웠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미화된 건지 농사에 일찍 뛰어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찍 시작한 덕에 남들보다 농사를 금방 손에 익혔거든요. 물론 정신적으로 지칠 때도 있었어요.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는데, 여동생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삶의 원동력을 얻었습니다. 연년생 남매를 낳고 나서부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더군요. 눈 깜짝할 새에 65살이 됐습니다.”

노 회장의 아내 김순예 씨와 그의 아들. /더비비드

-결혼하면 농사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럼요. 그전까진 사실 타의로 하는 기분이었다면 가정을 꾸린 후부턴 좀 더 적극적으로 농사를 하게 됐어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심도 생겼고요. 이것저것 삽질하면서 손해 본 것도 많아요. 1980년대 후반에는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를 길러보겠다고 욕심부리다가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폭삭 무너진 적도 있어요. 그땐 농작물 보험도 없어서 잠시 빚까지 졌죠.”

◇사과 농사에 폭죽이 필요한 이유

연중 가장 바쁜 시기라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밭에서 사과를 딴다. /더비비드

올해의 경우 이번 달 1일부터 홍로 수확을 시작했다. 연중 가장 바쁜 시기라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밭에서 사과를 딴다. 유통하는 시간을 고려해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열흘 전까지는 홍로 수확을 모두 마쳐야 한다.

-사과 농사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2017년에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무, 배추를 기르는 게 점점 어려워졌거든요. 작물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죠. 작물 전환을 위해 개인적으로 1억원을 투자했고, 정선군에서 시설비를 일부 지원 받았습니다. 전 옥수수를 주로 길렀어서 무, 배추에 주력했던 주변 농가보다는 늦게 사과 농사에 뛰어들었습니다.”

노 회장의 사과 과수원. 약 4500평 규모다. /더비비드
노 회장은 홍로와 부사 외에 청사과도 기르고 있다. /더비비드

-기르시는 사과의 품종이 궁금합니다.

“총 3가지 종을 취급합니다. 홍로 1500평, 시나노 골드(청사과의 일종) 700평, 부사 2300평씩 기르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홍로를 가장 먼저 수확합니다. 9월 중순까지 홍로 수확을 마치면, 9월 말에 시나노 골드를 수확하고 10월부터 한달 내내 부사를 수확하죠. 올해에는 11월 5일까지 수확을 마칠 계획입니다.”

-홍로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먼저 1월부터 3월까지 가지치기인 전정 작업을 합니다. 4월에 나무에 사과꽃이 펴요. 꽃이 정말 많이 피는데, 향기도 좋고 참 이쁘죠. 물론 아름다움에 취해 작업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봉오리와 이미 핀 꽃을 쳐내는 적뢰·적화 작업을 해야 하죠. 꽃봉오리 5개 중 1개만 살린다고 보면 됩니다. 이후 벌을 풀어 수정시키고, 6월에 열매가 맺히면 키울 열매만 두고 떨어뜨리는 적과 작업을 합니다. 그다음부턴 3일에 한번씩 물을 주며 열매를 기르죠. 이때부터 새를 조심해야 합니다. 새들이 귀신같이 찾아와 사과를 쪼아 먹거든요. 요즘 새들은 허수아비나 연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해요. 폭죽은 쏴줘야 도망가죠. 손주들이 놀러 오면 ‘할아버지 불꽃놀이 하시냐’고 묻는데요. 사실 필사적으로 새를 쫓는 거예요.”

잎을 적절히 제거해 사과 껍질의 색을 골고루 내는 것이 중요하다. /더비비드
사과 재배법을 설명하는 노 회장의 모습. /더비비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껍질 색을 빨갛게 내는 게 중요하죠.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색이 예쁘게 납니다. 이를 위해 햇빛 가리는 잎을 따고 바닥에 반사필름을 깔아서 열매가 햇볕을 최대한 많이 쬘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사과가 참 요물인 게요. 직사광선을 너무 오래 쬐면 껍질 색이 누렇게 변질됩니다. 이걸 ‘과일이 데였다’고 표현해요. 이 현상을 막기 위해 탄산칼슘을 물에 녹여 살포합니다. 피부에 선크림을 바르듯, 사과 표면에 햇빛 보호제를 발라주는 거죠. 인체에는 무해하니 걱정마세요.”

-병충해 대비는 따로 안 하시나요.

“올해 초 냉해 피해를 좀 입었습니다. 한 그루에 130알 수확하는 것을 평균치로 보는데요. 올해는 수확량이 20% 정도 줄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겁니다. 다른 농가는 병균에 의해 과육이 썩는 탄저병 피해를 봤다고 들었어요. 탄저병은 열매끼리 병균을 옮기기 때문에, 매일 밭을 관찰하며 썩은 열매나 잎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솎아내야 합니다. 저는 탄저병이 돌 무렵, 적과 작업을 과감히 한 덕에 탄저병 피해를 막았습니다.”

◇홍로가 추석 제사상에 오르는 과정

임계농협 사과 선과장. /더비비드
노 회장이 이날 수확한 홍로는 임계농협으로 입고한다. /더비비드

수확한 홍로를 당일 오후에 정선군 임계농협으로 입고한다. 지금은 일손이 부족한 시기라 강릉에 사는 노 회장의 아들이 입고 작업을 돕고 있다. 임계농협에 입고되는 사과의 양은 연 800t 수준. 그중 300t이 홍로다. 매년 9월 초에는 홍로만 매일 20~30t씩 입고된다.

노 회장은 지난해 24t의 홍로를 수확했다. 작년 수매가는 20kg에 약 6만원 정도였는데, 올해는 사과 품귀 현상으로 수매가가 20~30% 정도 올랐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사과 공급이 줄어 수매가가 오른 것이다.

세척기 위에 있는 홍로들. /더비비드

-홍로의 선별 및 포장 과정이 궁금합니다.

“홍로가 입고되면 물이 나오는 먼지떨이로 표면을 가볍게 닦아줍니다. 사과가 물에 완전히 젖으면 금방 상하기 때문에, 이물질만 제거하죠. 이후 선별기를 따라 사과가 이동합니다. 이때 당도 측정과 중량 선별을 동시에 합니다. 당도는 12브릭스 이상인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올해 사과 당도가 높아 평균 14브릭스는 나와요. 임계농협에서는 5kg에 사과가 들어가는 개수를 기준으로 사과의 중량을 선별합니다. 보통 12~24과로 구분하죠. 소비자들은 보통 18~20과 사이의 사과를 가장 선호하는데요. 홍로는 차례상에 오르는 품종이라, 크기가 큰 12~18과도 인기가 많습니다. 지금 사과 수요가 많아 대형마트, 백화점 등 전국 각지로 유통하고 있습니다.”

홍로의 선별·포장 모습. /더비비드

-홍로를 다룰 때 주의할 점이 있나요.

“홍로는 사과 중 저장성이 가장 안 좋은 품종입니다. 사과가 입고되면 3도의 저온 창고에 보관해 뒀다가, 출하 시기에 임박해서 선별·포장 작업을 합니다. 선별기에서 구르거나, 날카로운 꼭지에 긁히면 과육이 물러질 수 있거든요. 밭에서 딸 때도 꼭지를 최대한 짧고 뭉툭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튀어나온 꼭지가 주변에 있는 개체를 긁을 수도 있으니까요.”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 듣고 자란다

노 회장은 사과·옥수수를 포함해 재배면적 1만평, 소 20마리를 키우는 대농이 됐다. /더비비드

16살에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 2500평으로 농사를 시작한 지 50년이 지났다. 현재 노 회장은 사과·옥수수를 포함해 재배면적 1만평, 소 20마리를 키우는 대농이 됐다.

-연 매출이 궁금합니다.

“홍로, 부사, 시나노 골드까지 모두 합치면 사과 농사로 연 1억원 이상의 매출을 냅니다.. 지난해에는 장비를 구매한 것들이 있어서 제반 비용으로 매출의 40% 정도 사용했습니다. 올해는 아직 결산 작업을 하진 않았지만 매출의 30% 정도가 제반 비용으로 사용될 것 같아요.”

아주 큰 열매보다는, 성인 주먹만 한 사과가 맛있다. /더비비드

-맛있는 사과 고르는 방법 알려주세요.

“아주 큰 열매보다는, 성인 주먹만 한 사과가 맛있습니다. 검붉은 껍질보다는 선홍빛을 띠는 열매가 더 맛있고요. 그리고 과육의 일부에 노란색 투명한 액체가 고인 듯한 모양을 ‘꿀이 박혔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사실 이 ‘꿀사과’는 ‘밀’이라고 하는 병의 일종입니다. 실제로 포도당이 모인 거라 맛은 더 단 게 맞아요. 대신 금방 상합니다. 꿀사과를 구매했다면 빨리 먹어야 해요.”

노 회장은 뒤늦게 만난 홍로가 서러운 젊은 시절을 보상하는 포상 같다고 했다. /더비비드

-농부님에게 홍로는 어떤 의미인가요.

“50년 전에는 농기계가 없어 일이 정말 고됐습니다. 친구들이 취직해 하얀 셔츠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어요. 소똥 범벅이 된 제 신발을 보면 괜히 화도 났죠. 뒤늦게 만난 홍로는 서러운 젊은 시절을 보상하는 포상 같아요. 사과를 기르면서 겨울에 해외여행도 가보고, 손주들에게 용돈도 5만원씩 주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됐으니까요.”

-후배 농부에게 조언 한마디 해주세요.

“농사에 정답은 없습니다. 요즘 청년 농부 중 저보다 더 지혜롭게 농사짓는 젊은이도 많더군요. 그런데 50년 동안 농사하며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더군요.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 듣고 자란다’는 거요. 어떤 작물을 기르던, 부지런해야 해요. 엉덩이 가벼운 사람치고 농사 못 짓는 사람은 아직 못 봤어요.”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