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 기쁨두배마을에서 배 농사짓는 정순정 농부
과거 '처가 살이'하면 일단 부정적인 시선이 쏟아졌다. 하물며 그곳이 시골이라면. '남자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을 것'이라며 의심부터 받았다.
정순정 씨(63)는 33년 전 아내의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시로 귀농해 배 농부가 됐다. 정 씨의 의지였다. 농사일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담배까지 끊었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할세라 누구보다 성실하게 농사에 임했다. '2018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으며 그 노력을 인정받았다. 자타공인 집안의 대들보가 된 정 씨를 만나 묵묵히 걸어온 농부의 삶을 들었다.
◇지금이 제철, 아산 신고 배
충남 아산은 전국에서 3번째로 배를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다.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로 일조량이 풍부하고 통풍이 잘된다. 덕분에 아산 배는 식감이 아삭아삭하고 당도가 높다. 일반 배의 당도가 9~10 브릭스(brix)정도라면 아산 배는 11~12브릭스다. 오래 저장할 수 있어서 9~10월에 수확한 배를 이듬해 설날까지 먹을 수 있다.
그린시스·원황·추황·슈퍼골드 등 배의 품종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신고(新高) 배가 재배면적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산에서 재배되는 배 품종도 신고의 비율이 90%에 달한다. 신고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넘어온 품종으로 과즙이 풍부하고 신맛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과실의 크기가 커 추석·설 명절 선물로 많이 쓰인다.
◇처가살이로 시작된 농부 인생
대전의 한 요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상경했다. 관광호텔에서 한식조리사로 일했다. “재료 손질, 설거지부터 시작했어요. 6개월째부터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됐죠. 처음 만들었던 음식이 시래깃국이었습니다. 10년 정도 경력이 쌓이니 ‘갈비 담당’까지 승진했어요. 퇴사 직전엔 갈비찜, 갈비탕을 만들었죠. 하지만 지금 제일 자신 있는 메뉴는 김치찌개입니다.”
1990년의 어느 날 아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장모님께서 ‘아산에 내려와 농사를 지어보라’고 하셨다더군요. 처가댁에선 6000평 부지의 과수원에서 수십 년간 배를 재배하고 있었는데요. 나이가 들면서 힘에 부치셨던 겁니다. 호텔 조리사로 받는 80만~100만원의 월급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농사는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말씀에 귀농을 결심했습니다.”
농부가 되기로 결심한 직후 그 좋아했던 담배부터 끊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살림살이를 싸 들고 아산에 터를 잡았다. “그 시절엔 처가살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독해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장인 장모를 비롯한 아내의 친척 어르신들에게 농사법을 배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남 나주, 충북 음성·제천 등 유명 배 주산지를 다니며 어떻게 농사를 짓고 있는지 보고 배웠습니다.”
아산에 자리 잡은 지 33년. 마을에 대한 정 씨의 애정은 아산 토박이 못지 않다. “2017년 아산시 배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5년간 마을 이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저희 집이 있는 ‘아산 둔포면 석곡1리’의 다른 이름은 ‘아산기쁨두배마을’입니다. 최근엔 아산기쁨두배마을 운영위원장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습니다. ‘처가살이’ 꼬리표는 떨어진 지 오래죠.”
◇매년 전쟁이 벌어지는 과수원
정 씨가 운영하는 과수원은 총 8000평(약 2만6446㎡)으로, 축구장 4개를 이어 붙인 정도의 규모다. 그의 집에서 배 과수원으로 출근하기까지 단 10초면 충분하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집과 과수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과수원에 들어서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배나무가 가득 들어차 있다. 최고기온 30도의 맑은 날이었지만 과수원 안은 꽤 선선했다. 배나무 가지들이 만들어 준 그늘 덕분이다.
가을이 제철이라는 것을 알리듯 배나무에는 튼실한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노란빛을 볼 순 없었다. 모두 봉지에 싸여있었기 때문이다. 봉지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그 사이로 노란 배가 언뜻 보이는 것을 보니 충분히 여물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봉지는 병충해를 막고 농약 방제 시 과피에 농약이 묻는 것도 방지해 준다. 겉면에는 ‘For USA’라는 글자가 써져 있다. 글로벌 GAP(우수관리인증) 등 수출 요건을 충족한 배라는 뜻이다.
- 배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먼저 배나무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배나무의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자라고, 가지가 어릴수록 열매의 품질이 좋아요. 겨울엔 5년 넘은 가지와 도장지(웃자란 헛가지)를 자르고 결과지(열매를 맺을 가지)만 남깁니다. 4월이 되면 면봉을 들고 다니면서 수꽃 가루를 암꽃술에 묻히는 작업을 해요. 여름엔 결과지가 수평으로 자라도록 줄에 묶어줘야 합니다. 예비 가지를 걸어주면 내년에 그 가지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죠.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면 가을에 탐스러운 배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 봉지는 언제 싸나요.
“장마가 오기 전인 6월에 봉지를 쌉니다. 인부들의 인건비가 치솟는 시기죠. 다른 작업은 시간으로 임금을 책정하지만, 봉지 작업은 봉지 하나에 75원을 지급합니다. 새벽 4시에 출근하면 인부 한 명당 하루에 3000~4000장을 거뜬히 씌워요. 6000장까지 작업하는 경우도 봤습니다. 하루 일당이 45만원인 셈이죠. 농부 입장에선 그마저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봉지를 빨리 씌워야 병충해를 입을 가능성이 줄어드니까요.”
- 병충해를 막기 위해서 꼭 하는 일이 있나요.
“병충해 예방에는 토양 관리만큼 확실한 게 없습니다. 전 매년 4~5월에 배나무 아래에 볏짚을 5t(톤)씩 깔아줍니다. 볏짚이 삭으면서 유기물이 땅에 스며들고, 유기물을 먹이로 삼는 지렁이가 모여들죠. 지렁이가 만든 땅속 구멍들 덕분에 통기성이 좋아져 토양의 면역력이 올라갑니다. 가장 무서운 병은 화상병(가지가 말라서 죽는 병)인데요. 5차례에 걸쳐 예방 방제를 했습니다.”
- 배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20년 전 태풍 매미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태풍이 한번 휩쓸고 난 뒤 과수원 바닥이 온통 하얗게 변했습니다. 배가 다 떨어져 버린 거죠. 수확 직전인 9월 초에 온 태풍이라 더 야속했습니다. 그때 입은 손해가 1억원이 넘었죠. 요즘은 새를 쫓는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비둘기나 꿩이 한 번만 콕 찍어도 그 배는 못 팔아요. 꼭 맛있는 배만 골라서 콕콕 점을 남기는 새들이 어찌나 얄미운지요. 직접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화약·폭죽을 터트린 적도 있어요. 지금은 ‘삑’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저 불빛이 나오는 기계를 설치해 뒀습니다. 이렇게 매년 새들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 수확할 때 주의할 점이 있나요.
“배는 과피가 얇은 과일이라 무작정 잡아당기면 압상(壓傷, 압력으로 생기는 상처)이 생기기 쉬워요. 양손으로 열매를 잡고 위로 들어올리기만 해도 쉽게 가지에서 떨어지니 나무 사이를 걸어 다닐 때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죠. 수확 작업은 보통 9월 20일 전후에 시작해 10월 중순에 마무리됩니다. 한 달 만에 20㎏들이 바구니 6000~7000개가 배로 가득 채워지죠. 수확한 배는 과수원 옆 작업장에서 직접 선별하고 있는데요. 장기적으로는 개인 선별장을 정리하고 아산원예농협의 도움을 받을 계획입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인력난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서양 배 이기는 아산 배
아산원예농협거점산지유통센터(이하 아산 APC)는 하루 최대 83t의 배를 선별·포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수확 철엔 8.5t짜리 트럭이 쉼 없이 들어온다. 아산 내 200여 개 배 농가에서 생산된 배는 아산 APC를 거쳐 소비자의 밥상에 오른다. 선별 라인 하나에 35명의 인력이 투입된다. 9~10월엔 라인 4개를 총동원해야 한다. 작업자만 140명에 달한다.
포장 상자마다 초록색 ‘GAP 인증’ 마크가 붙어있다. 농산물의 생산·수확·포장·판매 등 전 단계에서 농약·중금속·미생물 등 위해요소가 검출되지 않도록 우수하게 관리했다는 뜻이다. 아산 배는 2012년 최초로 GAP 인증을 취득한 이후 2년을 주기로 재검사를 받고 있다.
- 배는 어떻게 선별하나요.
“첫 단계에서는 사람의 손이 필요합니다. 봉지를 벗긴 다음 맨눈으로 봤을 때 상처가 있는 배를 제외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요. 그리곤 배 꼭지를 자릅니다. 삐죽 솟은 꼭지가 옆에 있는 배에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이죠. 이후 비파괴 당도 검사를 실시합니다. 12브릭스를 넘지 못하는 배는 탈락입니다. 다음으로 크기·무게에 따라 분류합니다. 7.5㎏짜리 박스에 몇 개가 들어가느냐에 다라 10과·12과로 나뉘는데요. 10과는 한 알에 750g, 12과는 한 알에 625g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납품처의 요청에 맞춰 포장합니다. 같은 대형마트라도 선물 세트 형태를 원하기도 하고, 자체 포장을 위해 큰 상자에 최대한 많이 담아달라는 곳도 있죠.”
- 배 유통 경로가 궁금합니다.
“농협 하나로마트를 비롯해 대형마트, 백화점 등으로 나갑니다. 서울 가락시장 등 각 지역의 도매시장에서도 많이 찾죠. 미국·캐나다·말레이시아·태국·인도 등으로 활발히 수출도 하고 있습니다. 2022년 한 해 수출량이 2만7700t에 달합니다. 서양 배는 푸석푸석하고 당도가 떨어지는 반면 아산 배는 아삭아삭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일품이라 인기가 좋아요. 아산 APC의 전체 매출은 41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하늘과 함께 짓는 배 농사
정 씨가 정성을 다해 키운 배는 ‘2018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배·사과·복숭아·단감 등 모든 부문을 통틀어 그 해 대한민국 최고 과일에 등극한 것이다. 집안 곳곳에서 당시에 찍은 사진과 상패 등 기념품을 볼 수 있었다.
- 맛있는 배는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신고 배는 씨방이 큰 품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클 수록 유리하죠. 먹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또 과피가 거친 것보다 얇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좋습니다. 맛있는 배를 잘 골랐다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시원하게 먹어야 최고의 당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채 썰어서 육회에 곁들이거나 배즙으로도 섭취할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생과가 제일 맛있어요.”
- 연 매출이 궁금합니다.
“1년에 120~130t 정도의 배를 생산하면 약 1억원 정도의 매출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농약·비룟값에 인건비까지 제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50% 정도예요. 그마저도 자연재해나 병충해를 겪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것 같아요. 올봄에 냉해가 심해서 꽃이 덜 폈습니다. 자연히 열매도 덜 맺혔죠. 그 대신 과 하나하나가 아주 튼실합니다. 올해는 다행히 큰 병치레도 없었어요. 무게로만 따지면 작년과 비슷한 수준인 것 같아요.”
- 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하늘하고 나하고 50:50으로 책임지는 일, 그 결과물이 바로 ‘배’입니다. 매년 하늘이 어떻게 일해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어요. 내 몫을 다 해내야 기본으로 50점을 가져갈 수 있죠. 33년 전 귀농하며 담배를 끊은 데 이어 3년 전엔 술을 끊었습니다. 체력을 끌어올려 농사일에 보태고 싶었어요. 덕분에 듬성듬성하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는 뜻밖의 수확도 얻었죠. 몸이 버텨줄 때까진 지금처럼 열심히 땀 흘리며 배나무를 돌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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