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드로우 최상규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몇년 전, 한 유명 예능 방송에서 사무실에 갇혀 웹툰 공개일 직전까지 작화에 몰두하는 만화가 기안84의 모습이 나와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웹툰 작가 입장에선 밤샘 작업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마감에 쫓겨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작업에서 느끼는 희열이나 기쁨보다 부담감이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스타트업 리얼드로우의 최상규(42) 대표는 ‘창작의 고통’에 짓눌린 웹툰 작가를 위해 개인용 인공지능(AI) 어시스턴트(보조원) 서비스를 개발했다. 그를 만나 AI가 그려 낸 웹툰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
◇마감 쫓기는 웹툰 작가 위한 AI 비기
스타트업 리얼드로우는 AI 기반 웹툰 이미지 생성 기술을 개발 중이다. 추후 해당 기술을 웹사이트나 앱 서비스에 적용할 구상이다. 리얼드로우의 이미지 생성 AI 모델에 웹툰 작가의 이미지를 반복 학습시켜, 해당 작가 또는 스튜디오만 사용할 수 있는 생산성 향상 도구를 제공하는 식이다.
리얼드로우가 개발하는 AI 모델을 웹툰에 적용하면 제작자는 등장인물의 채색이나 배경 채우기 등 반복 작업에 드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시간·인력의 한계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던 작가들은 작품의 품질을 제고할 수 있다. 반복 작업에 할애하던 시간을 작품 완성도를 올리는 데 사용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데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웹툰계에서 민감한 이슈인 모방과 도용의 우려는 없앴다. AI 모델 개발 시 의뢰한 작가의 그림체만을 학습용 데이터로 활용하고, 개발한 서비스의 이용 권한을 오직 해당 작가에게만 부여한다. 덕분에 리얼드로우는 업계로부터 ‘저작권 침해 논란이 있는 이미지 생성 AI 시장에서 현명한 비즈니스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의 참신함을 인정받아 지난 8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법인 설립 후 창업 3개월 만에 윤민창의투자재단, 스프링캠프로부터 초기 투자금을 유치했다.
◇게임 회사 마케터 출신, 만화 시장 입문한 계기
최 대표는 동국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2007년 게임 회사 엔씨소프트의 마케터로 입사했다. 신사업 기획, 서비스 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엔씨소프트에서 ‘오픈마루’라는 이름의 신사업 기획 부서를 설립했었어요. 엔씨소프트 내부에서 사내 스타트업처럼 움직이는 조직이었죠. 대학 시절부터 벤처기업 창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창업을 꿈꾸는 제게 스타트업 생활을 간접 경험하기 좋은 기회였습니다”
2013년, 지금은 1인 방송 플랫폼으로 유명한 아프리카TV로 자리를 옮겨 온라인 게임 ‘테일즈런너’의 운영을 담당했다. “당시 신사업 발굴 차 여러 모바일 콘텐츠 시장을 조사하다 발견한 영역이 바로 ‘웹툰’입니다. 소형 디지털 기기로 소비하기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해 흥미로웠습니다. 스마트폰 활용 범위가 넓어지니, 온라인 게임만 유통하며 돈을 버는 덴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죠. 때마침 유료 웹툰 시장이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네이버는 웹툰 해외 판권으로 웹툰 수출의 기틀을 잡고 있었죠. 제가 다니던 회사뿐만 아니라, 당시 온라인에서 콘텐츠를 유통하던 기업들이 모두 신사업 확장 차원에서 웹툰 산업을 기웃거리던 시기였어요.”
콘텐츠 산업이 격변하는 것을 느껴 창업을 결심했다. “웹툰 산업을 조사하면서 신생 작가가 작품을 선보일 창구가 많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 점을 겨냥해 2018년 ‘크래프토리’라는 웹툰 커뮤니티 앱을 출시했죠. 웹툰 작가로 데뷔하고 싶은 이라면 누구나 작품을 연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누적 앱 다운로드 수는 22만회를 기록했고 월간 평균 이용자 수도 3만명 수준일 정도로 활성화됐어요. 하지만 수익 모델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어 2020년 9월 서비스 운영을 종료했습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먹고 살 길을 찾지 못해 철수해야 했죠.”
◇웹툰 시장 성장 옆에서 지켜보고 재창업 결심
비록 첫 창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웹툰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인물로 주목받았다. 첫 창업을 통해 쌓은 이 시장에 대한 내공과 작가들과의 네트워크가 다음 발판을 마련해줬다. “2020년 OTT 서비스 기업 ‘왓챠’에 입사해서 2년간 웹툰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왓챠 내부에 웹툰 스튜디오를 출범해, 오리지널 웹툰이 필요했는데요. 이를 위해 개인 작가들에게 연재를 제안하는 일을 했었죠.”
그 사이 웹툰 시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굵직한 사건이 벌어졌다. “2022년 8월 ‘스테이블 디퓨전’이라는 오픈 소스(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요한 설계도가 공개돼 있어 2차 개발이 가능한 소프트웨어) 형태의 그림 AI 모델이 출시됐습니다. 이 AI 모델을 사용하면 글이나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업계에선 그림 AI의 출시를 챗GPT의 등장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더군요. 그림의 저작권, 웹툰 산업에서의 활용 범위 등 논의돼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았죠.”
같은 시기 웹툰 산업도 몰라보게 성장했다. 2017년 3000억원 수준이던 국내 웹툰 시장 규모가 5년 만에 1조5000억원 규모의 시장으로 불어났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두번째 창업의 적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림 AI를 응용해 웹툰 제작의 보조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싶었어요.”
이런 발상의 배경엔 웹툰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웹툰 작가로 활동하는 이가 약 9000명인데요. 산업이 급격하게 커지자 웹툰 업계도 인력난을 겪기 시작했어요.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노동집약적인 업무 특성상 작가 1명이 생산할 수 있는 작업물의 양에 한계가 있거든요. 반면 전 세계적으로 K-웹툰에 대한 수요는 높은 상황이었죠.”
2023년 2월, 창업을 결심한 뒤 덩치도 커지고 고도화된 웹툰 시장을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개 인기 웹툰 작가의 경우 ‘어시스턴트’라고 부르는 보조 인력을 고용해 채색·보정과 같은 반복 작업을 맡깁니다. 웹툰 한 작품당 수입이 1000억원에 이르는 히트작까지 탄생하는 시대라, 아예 웹툰 스튜디오를 차려 제작에 뛰어든 기업도 많죠. 이 경우 철저히 분업 형태로 일을 진행합니다. 시나리오 작가·콘티 작가·작화 작가가 모두 다릅니다. AI 소프트웨어가 웹툰에 수반되는 작업 중 일부만 대체해도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6월 리얼드로우 법인을 설립하고, 현재 작가의 그림체 학습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창업 후 이미지 500장에 5일 정도 걸리던 AI 모델 학습 시간을 이미지 40장에 3시간 남짓으로 줄였습니다. 이미지 데이터를 AI가 학습하기 쉽게 가공한 덕분입니다. AI 모델의 상품성을 검증할 때 사용하는 이미지는 모두 해당 웹툰 작가의 허가를 받습니다. 작품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주 이용자인 웹툰 작가에게 최적화된 기능을 만들었다. “작가를 만나 인터뷰하고, 작업 과정을 짚어가며 서비스의 기능을 보완했습니다. 그림 생성 AI 모델을 웹툰 작화에 활용하려면, 사용성 측면에서 많은 개선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이미지의 레이어(층) 분리가 가능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배경과 캐릭터를 따로 분리해 수정할 수 있어야 하죠. 다른 소프트웨어와의 호환성도 중요해요. 최근에 나오고 있는 웹툰들은 배경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언리얼 엔진’ 같은 게임 개발용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웹툰 업계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법한 기능을 추가해 섬세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웹툰 작가 ‘워라밸’ 지켜주는 서비스
내년 상반기부터 웹툰 작가를 대상으로 정식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채색 등의 기본적인 반복 작업을 AI가 대신해 작가의 수고를 덜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작가 혹은 스튜디오의 의뢰가 들어오면 서비스를 맞춤형으로 제공할 계획입니다. 보안을 위해 특정 작가나 스튜디오에만 소프트웨어 사용 권한을 부여합니다. 특정 그림체의 도용, 복제, 악용의 우려를 원천으로 차단했죠.”
웹소설을 웹툰화하는 방법도 구상하고 있다. “최근 웹소설을 웹툰화해서 성공한 사례가 늘고 있어요. 웹툰화할 인기 웹소설은 많은데, 인력이 부족해 웹툰 제작을 못 하고 있죠. 이 시장에 파고들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작가의 그림체를 학습한 뒤 콘티만 입력해도 웹툰을 완성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이 뒷받침 돼야 가능한 일인데요. 저희도 아직 기술 보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서비스 완성도를 높여 내년 상반기부터 웹툰 스튜디오와 웹소설 웹툰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AI 기술을 사업에 활용하는 사람일수록 윤리 의식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기술은 원리만 보면 참 단순합니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입력해 모방품을 출력하는 거죠. 정보를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도출해 낼 수 없어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우려하시는 대로 통제하지 않고 활용하면 오용의 우려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미지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AI를 활용하는 것처럼, AI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하시려면 도전할 산업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술의 활용 범위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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