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임팩트 투자사 한국사회투자 이순열 대표 인터뷰
그의 30대는 인턴십으로 점철됐다. 가족과 함께하는 아늑한 저녁을 포기하고 동남아시아의 땡볕에서 착취당하는 어린이들을 구출하고 다녔다. 37살에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먼 땅 아프리카에서 실버 인턴십을 했다. 강렬한 사명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삶이다.
헌신의 결과는 고속 승진이었다. 8년 만에 인턴에서 비영리단체의 대표가 됐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꿈 하나만 보고 달린 결과다. 한국사회투자의 이순열 대표(45)를 만나 누구보다 치열했던 그의 삶에 대해서 들었다.
◇세상을 구하고 돈도 버는 투자
임팩트투자란 사회적, 환경적인 순영향을 발생시키면서 재무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를 뜻한다. 공적인 속성 때문에 수익성과 거리가 있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돈 못 버는 투자’는 아니다. 상업적인 성과를 내면서 사회에 순영향을 미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때문에 투자사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화하면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한국사회투자는 2012년 설립된 비영리 임팩트 투자사다. 주요 사업 영역은 투자지만 혁신 기술이 더 큰 영향을 미칠 다리의 역할도 대신한다. 엑셀러레이팅, 해외 진출 지원, 대기업 및 공공기관 등 투자 재원을 공급한 기업과의 협업, 스타트업 ESG 평가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 중이다.
투자사를 넘어 임팩트 플랫폼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스타트업과 대기업 혹은 스타트업과 해외 엑셀러레이터를 중개해 신성장의 기회를 모색해준다. 2월부터는 기부금을 재원으로 하는 투자 프로그램 ‘임팩트퓨처’를 론칭해 기부금 기반의 투자 생태계를 조성하는 중이다.
◇격동의 30대를 보낸 후 찾아온 뜻밖의 무력감
이 대표는 고등학생 때부터 품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개발협력 외길만 걸었다. “어려움에 처한 난민, 여성, 어린이를 돕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국제 변호사라는 막연한 목표로 이대 법학과에 진학했는데 현실은 달랐어요. 커리큘럼이 사법고시 중심이더라고요. 배우고 싶었던 국제인권법 같은 것을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혼란의 20대를 보냈습니다.”
방황하는 중에도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은 접지 않았다. 결혼 후 아이 엄마가 된 30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서른에 모교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방글라데시와 인도에서 사회복지 실습을 했어요. 노벨 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사회적 기업 ‘그라민 은행’과 인도의 불법 노동 어린이를 구출하는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차일드에서 활동했죠. 아이들을 물리적으로 구출했기 때문에 공장주의 위협과 폭력에 노출됐습니다. 경비원이 총을 들고 사무실을 지킬 정도였죠.”
이 분야에 몸 담을수록 국제개발협력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35살에 아이의 손을 잡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를 공부했습니다. 전문 지식과 네트워크를 쌓아 아동 노동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게 목표였죠. 무엇보다 전세계적인 단위로 아동노동 방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ILO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1년간 ILO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학위와 경험을 쌓은 지원자에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어요.”
37살이 되던 해, 인턴십이라도 하고 싶다며 또 다시 ILO의 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기회의 문이 열렸다. “아이도 있는 30대 후반 여자가 편한 삶을 마다하고 기회를 달라고 조르는 열정을 높이 산 것 같아요. ILO의 아프리카 지역 사무실에서 실버 인턴십을 했습니다.”
가까스로 원하는 바를 이뤘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유럽발 금융위기가 촉발되며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모두 중단된 것이다. “어린이들을 건강한 성인으로 기르겠다는 열망 하나로 오래 노력했는데 돈줄이 끊이니 할 수 있는 활동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기부금으로 유지되는 무력한 구조였죠. 문득 그라민 뱅크가 떠올랐습니다. 비즈니스로 사회 문제를 해결한 우수 사례였거든요.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 임팩트를 창출할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회문제 전문가와 비즈니스 전문가의 시너지
2017년 한국사회투자에 합류했다. “자선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일회성으로 돕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생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답은 임팩트투자였습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풀기 어려운 문제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키는 혁신 기술이 쥐고 있는데요. 혁신 기술 기업에 투자하면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서 다른 혁신 기업에 투자할 재원을 마련하는 선순환을 창출할 수 있어요.”
임팩트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깨는 데 집중했다. “임팩트투자는 돈을 못 번다, 허울만 좋은 투자라는 미신이 있어요. 이 미신을 철저히 깨기로 했습니다. 임팩트투자는 투자의 방법론이 아니라 투자 DNA입니다. 일반 투자자가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에 정통한 사람이 이 일을 해야 하죠. ‘왜 이 기업에 투자하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으면 시늉만 하는 투자가 되니까요. 임팩트를 창출하면서도 오래 살아남을 기업에 투자했습니다. 저희가 투자한 기업은 후속 투자를 많이 받습니다.”
‘임팩트 워싱((impact washing. 작은 일만 하고 긍정적인 가치가 발생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 논란을 비켜갈 기준도 정립했다. “임팩트 워싱을 원천 차단합니다. 비결은 임팩트가 내재화된 비즈니스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성장하면 임팩트도 커질 수밖에 없는 곳에만 투자해요. 휴대폰 케이스 판매 기업이 있다고 합시다. 이 기업이 친환경 소재로 케이스를 만들어 팔아도 이곳엔 투자하지 않습니다. 친환경 소재 케이스 제작을 중단하면 더 이상 임팩트를 창출하지 않으니까요. 대신 이 기업의 앞단에서 친환경 소재를 만들어 공급하는 소재 기업에 투자를 하죠. 친환경 소재를 많이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기업이니까요.”
그린패키지솔루션이 대표적이다. “그린패키지솔루션은 버려지는 농산물에서 셀룰로오스를 추출해서 상온에서 생분해되는 패키지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셀룰로오스를 추출해서 친환경 패키지를 만든 회사는 많아요. 이곳의 차별점은 상용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이죠. 친환경 패키지도 제 역할을 하려면 물이 새지 않고 방열, 방냉이 돼야 합니다. 그린패키지솔루션은 이런 조건을 재빨리 충족해 상용화에 성공했습니다. 이곳의 포장재는 이마트의 밀키트,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 포장재로 활용되고 있어요. CJ제일제당과 대규모 계약도 체결했죠. 현재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입니다.”
이와 같은 성공사례는 임팩트 전문가와 비즈니스 전문가가 시너지를 낸 결과다. “저는 오랜 기간 전세계의 문제를 고민한 사람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을 도와주며 임팩트 영역에서 전문성을 쌓았죠. 한국사회투자 이종익 대표는 다국적 기업에서 다양한 산업을 경험한 비즈니스 전문가입니다.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안건회계법인 파트너까지 역임했고 스타트업 육성 경력만 20년입니다. 투자 받은 스타트업이 성과를 내는 이유는 높은 수준의 전문성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 기부펀드 투자의 위력
임팩트투자의 패러다임을 바꿀 한 방을 준비했다. 2월에 출범한 임팩트퓨처다. 미래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지탱할 기후, 농식품, 사회 서비스, 임팩트 모빌리티 등 네 분야에서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투자 및 육성하는 사업이다. 독특한 점은 기업의 사회공헌 예산(기부금)을 투자 재원으로 삼는다는 것. 임팩트퓨처를 통해서 기부를 통한 투자를 활성화할 계획이다.
하나금융과의 협업 사례가 영감이 됐다. “과거 하나금융그룹은 소셜벤처 육성 사업을 진행했는데요. 재원을 소진하면 프로그램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고 합니다. 금융사의 기여 방안을 모색하다가 투자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기부펀드란 기업의 사회공헌 예산(기부금)으로 조성된 펀드인데요. 하나금융그룹이 기부금을 내면 저희가 하나금융그룹의 ESG 전략을 바탕으로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를 집행합니다. 2022년 하나금융그룹의 ESG 펀드로 7개 기업에, 2023년에는 14개 기업에 투자했습니다.”
기부펀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퍼스트펭귄’ 역할을 한다. “기부펀드를 통한 투자는 일반 투자와는 달리 회수 부담이 없습니다. 개인이 투자 손실을 떠안는 상황에서도 자유롭죠. 위험 부담이 적은 기부금으로 선도 투자를 하면 후속 투자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검증받은 스타트업이라 판단하기 때문이죠. 일종의 ‘촉매자본’ 역할을 합니다. 혁신 스타트업 중 상당수는 오랜 연구 개발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요. 기부펀드는 이들이 임팩트를 창출할 때까지 후원해주는 ‘인내자본’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사회에 꼭 필요한 비즈니스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죠.”
◇ 비영리 투자사의 투자 성적표
지난 12년 간 1000여 곳의 기업을 육성하고, 53개 기업에 직접 투자했다. 그 중 2곳이 IPO 준비 중이다. 작년엔 15개 기업에 27억원을 직접 투자했다. 사회서비스 펀드를 통한 간접 투자 규모는 15억원. 스타트업 빙하기라는 말이 무색한 금액이다.
글로벌 기회도 모색 중이다. 20여곳의 해외 엑셀러레이터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82개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했다. 개발도상국의 혁신 스타트업도 관심 대상이다. 요즘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에 주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제로웨이스트 이커머스 플랫폼 기업에 투자했다.
아시아 시장에서 기부를 바탕으로 한 임팩트투자를 선도하는 조직이 되는 게 목표다. “요즘 산학 협력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포스텍, 카이스트처럼 우수 기술 기업이 밀집한 학교나 연구기관과의 협업 구조를 만들고 있죠. 지역 우수기업과 글로벌의 접점을 찾는데도 관심 많아요. 창업생태계로부터 소외된 지역의 우수 기업과 해외의 접점을 찾아서 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 대표는 지금 하는 일이 과거의 연장선이라고 강조했다. “스펙트럼이 넓어졌을 뿐 커리어가 바뀐 게 아닙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갈망엔 변함이 없어요. 한국사회투자에서의 8년은 도전의 연속이었어요. 대기업이나 유명 창업가가 아닌 비영리단체가 모든 사업을 협업으로 풀어내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이례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없던 길을 만들어서 가치를 창출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죠.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그만큼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았던 건 투자와 지원을 받은 대표님들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 덕분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성장과 피드백으로 성과를 증명할 수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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