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방황 끝에 한 선택
코로나 사태로 실물 경제가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힘든 고용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어려움 속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취업난을 극복하고 있는 청년들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2030 취업 분투기’를 연재합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고르라면 단연 ‘공무원’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공공과 민간 부문의 간극은 더욱 벌어진다.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취업 시장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공무원의 인기가 치솟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직시생’, 주부 공시생인 ‘맘시생’, 수능 대신 공시를 준비한다는 ‘10대 공시생’까지 등장했다.
‘공시생’ 하면 ‘노량진’을 떠올리던 때는 지났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배운 기술과 자격증을 무기로 9급 기술직 공무원이 된 정순원(29) 씨가 대표적이다. 정 씨를 만나 9급 시험 합격기를 들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 경험도 스펙
세종대학교 항공학과에 11학번으로 입학했다. 남다를 것 없는 대학 생활을 하다 2013년 군 제대 후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픈 욕심이 생겼다. 사촌 형을 따라 호주로 1년간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시급 19달러(약 2만2300원)를 받고 식당에서 일했다. 한국에 돌아와 1년 동안 경찰 시험을 준비했다. 경찰이 된 대학 선배를 따라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 이력을 보고 친구 따라 강남 간 경험들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뭐든 직접 경험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준비하다 포기한 경험일지라도 그런 경험조차도 제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택배업 계약직이었다. 물류센터에 물건이 입고되면 전산상에 입력하는 일이다. 꼼꼼한 일 처리 덕에 주로 인수팀에서 서류작업을 맡았다.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3개월마다 갱신하는 계약직이라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오래 일한 직원이라도 갱신이 안 되면 바로 해고라고 하더군요. 불안정한 근무환경 때문에 6개월 만에 제 발로 나왔습니다.”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다른 기업으로 취업을 노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를 정독하고 국비 지원 프로그램을 살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국비지원과정은 3~6개월 정도면 끝나더군요. 더 깊이 있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폴리텍대학 2년제 학위 과정이었습니다.”
2019년 3월 한국폴리텍대학 금형학과에 입학했다. 금형은 규격이 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금속재료를 활용해 만든 틀을 말한다. “금형학과는 전에 다녔던 대학에서 전공했던 항공 관련 분야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요. 그럼에도 산업 전반에 사용되는 기반 기술이라고 생각해 과감하게 선택했습니다.”
◇폴리텍 다시 들어가 9급 공무원
살면서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던 기계를 접했다. 3D프린터는 기본이었고, MCT(machining center, 컴퓨터 프로그램의 수치를 기반으로 재료를 깎는 기계),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를 제어하는 기계). 레이저 스캐너 등 모든 산업용 기계의 이론과 작동법을 익혀야 했다. 나머지 공부가 필수였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빈 강의실에 남아 공부했습니다. 그날 배운 건 그날 복습해야 기억에 오래 남더라고요.
폴리텍대학의 커리큘럼은 자격증을 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기계제도, 프레스 금형의 이해, 어셈블리 등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학기가 지날 때마다 이력서에 쓸 자격증이 하나씩 추가됐죠. 프레스금형, 사출 금형, 컴퓨터 응용가공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습니다.”
2020년 2월 지역인재 9급 공무원 선발 공고 소식을 폴리텍대학에서 전해들었다. 학점 등 자격요건을 갖춘 정 씨에게 1차 필기시험의 기회가 주어졌다. 채용과정은 필기, 서류, 면접 순이었다. “필기 과목은 국어, 영어, 한국사였는데요.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각오로 방학때도 매일같이 등교해 고3 수험생처럼 공부했습니다.”
2차 서류심사는 그동안 따 놓은 자격증이 가산점으로 들어간 덕에 무난하게 통과했다. 최후의 관문은 면접이었다. 혼자 인터넷을 검색해 면접 후기를 찾아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담당 교수님을 찾아뵙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갖고 있는 면접 관련 자료를 전부 넘겨주셨어요. 고3 수험생이 담임선생님과 대학 입시를 함께 준비하는 것 같았죠.”
면접 준비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학교에 있는 면접용 VR 장비였다. “폴리텍대학에 있는 VR 장비를 대여해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면접을 준비했습니다. 얼굴에 VR 기계를 쓰면 바로 눈앞에 면접장이 펼쳐지더군요. 답변할 내용뿐만 아니라 목소리 톤과 크기까지 잡아주는 장비였습니다. 가상현실로 면접을 반복적으로 체험해본 덕에 실제 면접장에서는 긴장감을 덜 수 있었습니다.”
정부 과천청사에서 이뤄진 면접에는 행정직과 기술직 지원자가 한꺼번에 모였다. 사회에서의 경험을 국가직 공무원으로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가고 싶은 부처가 어디인지 등 포괄적인 질문부터 전공과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까지 받았다. 준비한대로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나갔다. 면접 한 달 뒤인 2021년 1월, 9급 공무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
2021년 2월 폴리텍대학 대구캠퍼스를 졸업하고 3개월이 지난 5월부터 공무원의 삶을 시작했다. 정 씨는 포항 우편집중국에서 우편기계의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다. “공무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폴리텍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배운 것은 그날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들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에요. ‘열심히 하면 언젠가 기회는 온다’는 말을 이제는 믿을 수 있게 됐습니다.”
공무원이 됐다고 해서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새로운 기술은 계속 등장할 겁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무원 직급체계에 따라 언젠가 과장도 되고 팀장도 되겠죠. 어떤 직급에 오르든 공부하는 공무원, 노력하는 공무원이 되고 싶습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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