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는 홈스쿨링으로, 20대 땐 기능대학에서 인생을 공부하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대체했고 4년제 대학 대신 한국폴리텍대학의 전문기술과정(1년)을 택했어요. 정규 교육과 거리 먼 삶을 살았지만 지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독서로 지식과 지혜를 얻었죠. 김승호 회장님의 <생각의 비밀>과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가장 좋아합니다.”
산업용 CNC조각기를 판매하는 회사 미스터조각기 옥은택(30) 대표의 말이다. 17살 때부터 홈스쿨링을 했던 그는 기술을 배우러 들어간 한국폴리텍대학에서 인생의 분기점을 맞이했다. 그동안 배운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 미스터조각기를 창업, 연 매출 17억원 규모의 회사로 키웠다. 옥 대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그의 동생과 누나도 사업가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기계 분야 일이 ‘3D 업종’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깨기 위해 치열하게 달린다. 그가 회사를 이끌어 온 지난 6년 간의 흔적을 15권의 다이어리에 기록했다는 내용을 담은 유튜브는 3주 만에 조회수 4만 7000건, 50개 이상의 댓글을 기록했다. 옥 씨를 만나 삶을 멋지게 조각하는 법에 관해 들었다.
◇17살에 가족과 세계여행 떠나며 발견한 재능
중학생 때까지는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삶이 180도 달라졌다. “17살이 되던 2008년, 저를 포함한 동생과 누나 모두 학교를 관두고 홈스쿨링을 시작했어요. 중학교 교사였던 부모님이 퇴직하시면서, 그 퇴직금으로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했거든요. 사실 당시 화목한 가족은 아니었어요. 3남매는 학업 때문에 예민했고, 부모님은 교육관을 두고 서로 자주 충돌하셨거든요. 화합이 필요하다 판단해서 결단을 내리신 거죠.”
인도, 네팔을 시작으로 1년 반 동안 다섯 식구가 전세계 35개국을 누볐다. 온 가족이 한 몸처럼 붙어 다니자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세아니아 지역을 제외하고 웬만한 대륙은 다 가봤습니다. 텐트에서 잔 적도 있고 작은 렌터카에 몸을 구겨 넣고 이동한 날도 있어요."
붙어 있는 시간이 많은 만큼 다투기도 했지만 사이는 돈독해 졌다. "여행 기간 내내 저를 가까이서 지켜본 아버지가 제게 ‘공간 지각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지도만 보고도 길을 잘 찾고, 작은 트렁크에 가족의 짐을 잘 쌓아 넣는 모습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몰랐던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2010년 초, 친구들이 고3 수험생일 때 귀국했다. “지구 한바퀴를 돌고 오니 부모님의 퇴직금이 바닥났어요. 이제는 각자도생 할 때라 생각하고 검정고시 준비했죠. 동시에 의류 쇼핑몰에 관심이 있어서 국비 지원 온라인 쇼핑몰 창업 교육 과정을 이수했는데, 거기서 만난 형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인이 2D 설계 프로그램인 캐드 공부를 해서 일본 자동차 회사에 취업했다고요. 저도 흥미가 가서 직무 교육 과정으로 캐드를 배웠어요. 즐겁게 공부했습니다, 2010년에는 건축제도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귀국 후 1년 만에 자격증 3개 취득하고 취업
기계의 매력에 눈을 떠 2011년 한국폴리텍대학 충주캠퍼스 컴퓨터응용기계과에 입학했다. 수치제어 기반의 기계부품 가공 및 기계 제어를 배우는 1년 교육과정이다. “일반 대학교 진학도 고민했지만 수능 준비와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할 만한 선택인지 확신이 안 섰습니다. 우연히 폴리텍대의 전문기술과정을 접하고 ‘여기다’라는 확신이 들었죠. 학비 부담은 적은데 전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니까요.”
1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했다. "기계 만지는 손 맛에 빠져버렸어요. 손에 기름이 묻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매일 9시까지 학교에 가서 늦은 오후에 귀가했죠. 노력한 덕에 수치제어선반기능사, 수치제어밀링기능사, 기계조립기능사 자격증 3개를 취득했어요. 2012년 한 방위산업체로 지정된 체성분 측정기 제조사에 입사했습니다.”
범용선반, 범용밀링 등의 생산보조 업무를 수행하며 3년을 보냈다. 실무 지식이 강점이 됐다. “선반밀링(공구나 공작물의 회전을 통해 가공하는 기계), 드릴링(드릴이 회전하며 구멍을 만드는 기계) 머신을 주로 다뤘어요. 폴리텍대학에서 배운 것들이죠. 이 외에도 손 닿는 대로 여러 업무를 맡았어요. 스스로 공부해서 알곤 용접과 지게차 운전까지 했답니다.”
◇월급 털어 산 3D 프린터의 매력에 빠져 창업까지 도전
회사를 다니면서도 배움을 놓지 않았다. “기능사 취득 후 2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어요. 주말에 3D 설계 공부를 하면서 자격증 준비를 했죠. 그런데 실습 공간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폴리텍대학교 성남캠퍼스의 기계과 교수를 찾아가서 제 사정을 알려줬더니 흔쾌히 실습 공간을 내주셨어요. 덕분에 2014년 기계 분야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죠.”
그쯤 3D프린터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기계 분야의 신기원으로 보였다. “당시 한 달 월급인 200만원으로 3D 프린터를 샀어요. 퇴근 후나 주말이면 혼자 작동해 보면서 연구를 했죠. 그러던 중 우연히 3D 프린터 회사를 세운 사람을 알게 됐어요. 마침 전 직장의 계약 기간이 끝나서 그 분 회사의 창업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3D프린터를 만들고 관련 부품을 수입, 유통하는 회사였죠. 그곳에서 잠을 아껴가며 3D 프린터를 직접 개발할 수준으로 역량을 키웠어요.”
회사를 나와 개인적으로 욕심이 났던 금속 프린터를 집중 연구했다. 창업을 맘먹었기 때문이었다. 용접기술과 3D프린터 기능을 결합한 아이템을 떠올렸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선정되자 2015년 금속 소재로 프린팅하는 3D프린터기 제조사 5000도씨를 설립했다.
“제가 꿈꾸던 바를 이룰 수 있어 행복했어요. 물론 회사 운영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개발에 전념하다 보니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 4500만원이 바닥났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돈을 빌렸어요. 회사의 주력 아이템이 절실하다고 느꼈죠.”
◇코드만 입력하면 원하는대로 목재 가공하는 기계 개발
위기의 순간, 직원이 전시회에서 보고 왔다는 CNC조각기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에 코드를 입력하면 목재나 아크릴 같은 연질의 소재를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해주는 기계다. 목재 컵받침, 나무 도마 등을 쉽게 만들 수 있어 목공방에서 많이 사용한다. “시장 조사를 해보니 국내에선 CNC 부품을 파는 곳이 없더라고요. 중국 사이트에서 모터를 18만원에 사서 국내에 28만원에 내놓으니 잘 팔렸어요."
그렇게 판매 범위를 넓혔더니 ‘부품 말고 기계는 안 파냐’는 문의가 줄을 이었다. "기계도 팔아야겠다 싶어서 중국 심천에 직접 가서 제조 공장을 섭외했어요. 그때부터 OEM 방식으로 CNC조각기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2017년 7월 CNC조각기 온라인 쇼핑몰 ‘미스터 조각기’도 오픈했죠.”
좋은 한 방이었다. 소자본 창업이 유행해 CNC조각기의 가격대가 내려가면서 수요가 증가한 것이다. “금속 가공 기계는 비싸고 다루기 힘든 반면, CNC조각기는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에요. 디자인 회사에서는 샘플 제작용으로 활용되고요. 업체들 입장에선 기계 외주 가공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죠.”
기계는 딱딱하다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친절한 서비스’로 십분 무장했다. “구매가 이뤄지면 기계만 보내지 않고 전국 어디든 출장을 가서 직접 가서 설치해줍니다. 구매자의 95%가 이 기계를 처음 쓰는 사람들이라 옆에서 사용법을 꼼꼼히 교육하죠. AS 요청이 들어오면 하루 만에, 늦어도 2~3일 내에 방문하는 걸 방침으로 삼고 있어요. 규모 작은 회사가 이정도 속도로 대응하는 건 드문 일입니다. 직원들에게 ‘우리는 서비스업을 하고 있다’는 점을 수시로 상기해요. 저희만의 방식이 통했는지 회사가 빨리 성장했어요. 2명으로 시작한 인원이 20명으로 늘어났고, 2016년 4000만원에 불과했던 연 매출은 지난해 17억원을 기록했습니다. “
◇매출 17억원, 직원 20명 기업으로 급성장
전 직원 평균나이 27.5세인 젊은 기업이다. 30세인 옥 대표가 최고령자다. “기계, 용접 분야는 나이대가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편견을 깨고 우리 회사만의 문화를 조성하려고 노력했어요. 수평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영어 호칭을 써요. 저는 대표님 대신 알렉스(Alex)라고 불리죠. 저희 회사만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 문화예요. 제가 정규교육 과정을 거치지 못한 데서 생긴 공백을 독서로 채웠거든요. 독서를 통한 성장을 회사 식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책 읽기 문화를 도입했어요. 구성원들이 회사 제품을 더 친근하게 느끼도록 기술 교육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옥 대표는 1년의 기술 교육이 큰 자산이 됐다고 강조했다. “폴리텍대에서 공구 다루는 법부터 배웠어요. 네모난 쇠를 편편하게 다듬으라는 교수님 지시에 ‘이런 걸 왜 배우지’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죠. 창업 후 기계를 처음 접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것부터 교육해야 하다 보니, 그때 배운 것들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실무 중심으로 배운 덕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접해도 빨리 적응할 수 있고요.”
소규모로 사업을 시작한 고객이 사업 확장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그에겐 가장 큰 기쁨이다. “기계 한 대로 시작했다가 사업이 잘 돼서 추가 주문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저와 고객 모두가 성장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하반기 예비 고객을 대상으로 무료로 교육하는 ‘인생 첫 조각기’ 프로젝트를 열 계획이다. “기계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서 사람들에게 이 일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보여주고 싶어요. 회사 직원들에게는 꿈의 직장을 선사해서 기계 분야의 일자리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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