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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년에 신입 수백명 씩 뽑는데 여유 부리는 인사팀 직원

근로 등 모든 계약을 간편한 전자계약서로 만들어주는 스타트업

‘저 직업은 어떤 일을 하는 걸까’ ‘저 제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평소 궁금했던 직업이나 제품이 있으셨나요? 일상 속의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찾아 얘기를 듣는 ‘그 일이 알고 싶다’를 연재합니다.

/더비비드

핏(fit)은 ‘모양과 크기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맞는다’는 뜻이다. 스타트업 업계는 사람과 사람, 회사와 직원 사이의 ‘핏’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량적인 스펙보다 각자 가진 가치관과 성향이 잘 맞느냐가 더 중요하다. 구인난에 시달리는 스타트업계는 핏이 맞는 동료나 직원을 찾는 일이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렵다.

전자계약서비스 스타트업 ‘자버(Jober)’의 윤여익(36) CDO(최고디자인책임자)는 자버 초기 멤버로 합류하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이동욱 대표와의 면접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 ‘핏이 맞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버와 동고동락 4년 차. 윤 CDO에게 핏이 왜 중요한지 들어봤다.

◇현대차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배운 것

전자계약서 예시 /자버

자버는 전자계약서 서비스 업체다. 근로계약서 등 기업 운영에 필요한 모든 계약서를 전자문서화해서 관련 담당자들의 고충을 해결한다. 시스템에 기본 서식이 있어서 내가 필요한 사항을 기입하는 것만으로, 간편하게 전자계약서를 만들 수 있다. 이후 상대방에게 계약서를 보내서 전자서명하는 것으로 관련 절차를 끝낼 수 있다. 한꺼번에 수많은 직원과 근로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등 경우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1년에 수백 명씩 직원이 늘고 있다는 KB국민은행과 당근마켓, 일용직이나 단기 계약직이 많은 브랜디(Brandy)의 물류센터, 프리랜서 번역가와 계약할 일이 잦은 번역 플랫폼 플리토(Flitto) 등이 자버의 전자계약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는 윤 CDO. /윤 CDO 제공

윤 CDO는 2003년 울산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생활을 배웠다. “양수리 영화 세트장에서 세트를 만들거나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등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전문성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떤 일이든 ‘단계’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죠.”

2010년 대학을 졸업하고 첫발을 디딘 곳은 전자상거래 관련 디자인 전문회사였다. 3년간 이커머스 사이트를 디자인하는 일을 맡았다. 지인 소개로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제조업체 '에너지음'으로 이직했다. “기술연구소에서 자동화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사람의 손을 대신해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거나 병원 채혈실의 튜브를 운반하는 시스템인데요. 어떤 버튼을 누르면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작동을 멈추는지를 설계했죠.”

에너지움에서 설계한 자동화 시스템의 사용성 테스트를 하는 모습.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 때마다 대학생 때 했던 아르바이트가 떠올랐다는 윤 CDO. 사람 손으로 일일이 하던 일을 이제는 로봇이 하는 시대가 됐다. /윤 CDO 제공

그 기간 동안 UI·UX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키워나갔다. UI(User Interface)는 사용자가 IT기기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UX(User eXperience)는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겪는 모든 경험을 일컫는다.

“에너지움에서의 마지막 1년 동안 신사업기획TF팀에서 근무했습니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는 것이 과제였죠. 이때부터 ‘데이터’에 주목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매일같이 생산되는데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보유한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데이터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예감했어요.”

◇기업들의 계약서 작성 고민 해결

'데이터'의 중요성을 절감한 윤 CDO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제조업 회사에서 데이터를 이용한 소프트웨어 회사로 이직했다. /윤 CDO 제공

윤 책임이 전자계약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자버에 발을 들인 것은 4년 전 일이다. 면접 자리에서 이동욱 자버 대표와 유난히 말이 잘 통했다.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출신이 데이터를 만지는 IT 창업을 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디자이너라고 하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감각적으로 설계해 고객의 시선을 끌도록 만드는 것에 치중하게 마련인데요. 이 대표는 고객에게 어떤 것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 더 비중을 두고 있더군요.”

자버 직원들과 함께 웃고 있는 윤 CDO(가운데) /윤 CDO 제공

회사에 합류해 전자 근로계약서 표준화 작업부터 참여했다. 누구나 전자시스템으로 간편하게 쓸 수 있는 근로계약서였다.

두 디자이너 앞에는 ‘근로기준법’이라는 큰 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노무사를 찾아가 근로기준법 조항 하나하나를 캐물었습니다. 근로계약서를 표준화하기 위해서 사업장별로 제각각인 근로계약서를 최대한 다양하게 수집했어요. 고용노동부에서 배포한 표준 근로계약서 서식이 있는데도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사례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주휴수당, 연차유급휴가 계산법이 틀리거나 쓰지 말아야 하는 조항이 적힌 경우도 있었죠.”

자버 전자근로계약서는 빈칸만 채우면 법적 조건을 모두 충족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에 맞지 않은 문구를 넣으면 안내 메시지가 뜨도록 설계됐다. /자버 웹페이지 캡처

숙제를 풀어나간 방법은 역시 디자인이었다. “이용자가 자버 웹페이지를 통해 빈칸만 채우면 법적 조건을 모두 충족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꼭 기재돼야 하는 항목 옆에는 빨간 별표를 써두고, 이곳을 채우지 않으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식이죠. 또 사업자가 근로기준법에 맞지 않은 문구를 넣으면 안내 메시지가 뜨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계약서는 채용된 사람에게 이메일로 보낸 후 전자서명 하는 것만으로 간편하게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다. 정식 직원 채용 때 뿐 아니라, 행사를 개최하면서 한 번에 수백명의 일용직을 고용하면서 계약서 작성을 일괄처리할 때 등에 편리하게 활용되고 있다. "KB국민은행, 당근마켓, 브랜디, 인크루트, 집토스 등 많은 기업이 쓰고 있습니다."

자버 서비스 출시 직후 윤 CDO는 한동안 고객 응대에 정신이 없었다. 하루 30~40건에 달하는 문의에 하나하나 직접 답했다. 윤 CDO가 고객문의 담당자를 자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UI에 반영하거나, 서비스를 확대해나가는 것까지가 모두 디자인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다양한 근로계약 사례를 수집하는 데 고객 피드백을 듣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었어요. 요즘은 하루 5~7건의 문의가 들어옵니다. 고객은 늘고 문의는 줄었죠. 디자인의 힘입니다.”

직원들과 대화하는 윤 CDO(왼쪽). 자버 서비스 출시 직후 윤 CDO는 CS담당자를 자처했다. 하루에도 30~40건에 달하는 고객문의를 직접 응대했다. /윤 CDO 제공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 1인 1역을 맡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연봉이 어마어마한 것도 아니다. “지난 회사 대비 급여를 낮춘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기에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저만의 미래가 아니에요. 자버가 앞으로 사회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근로계약에서 모든 전자계약으로 영역 확대

자버 사무실 앞. /더비비드

자버는 ‘근로계약’ 서비스에서 ‘전자계약’ 서비스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고객사의 요청을 반영한 것이다. 개인정보동의서, 보안유지서, 연차사용동의서, 재직증명서 등을 포함해 기업 간의 계약서 관리까지 자버에서 근로계약서를 쓰듯 이용하고 싶다는 고객들의 문의를 반영한 것이다.

1년에 수백 명씩 직원이 늘고 있다는 당근마켓, 일용직이나 단기 계약직이 많은 브랜디(Brandy)의 물류센터, 프리랜서 번역가와 계약할 일이 잦은 번역 플랫폼 플리토(Flitto) 등이 자버의 전자계약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고객의 피드백을 듣는 것부터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윤 CDO. /더비비드

“디자이너로서 고민하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한 건 한 건 정확하게 계약서를 쓰는 것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대량의 계약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예를 들어 재계약 등의 이슈가 있을 때마다 지난 계약 목록을 불러올 수 있도록 하거나 엑셀로 계약날짜, 연봉 등의 정보를 일괄 추출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내년 상반기 다국어 서비스도 출시할 계획이다. “지금은 영어와 일본어만 서비스하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중국어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고객도 생길 겁니다. 예를 들면 이라크에서 자버를 이용하고 싶다는 문의가 들어오고 있어요. 다국어 서비스 출시를 서두르는 이유입니다. 각 나라마다 웹 페이지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양하고, 문화적인 차이가 분명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포착하고 분석해 디자인으로 구현해내고 싶습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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