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가전 렌털 가격 비교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가전 빌리는 건 꽤 꼴치 아픈 일이다. 이용료, 약정 기간, 지원금, 해지 시 위약금 등의 요인을 골고루 따져봐야 한다. 렌털사마다 계약 조건이 천차만별이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덜컥 선택했다간 ‘호갱’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가전 렌털 시장은 매년 17%씩 성장하고 있다. 회계사 출신이라 숫자에 밝은 렌트리 서현동(36) 대표의 눈에 렌털 시장은 화수분으로 보였다. 불합리성을 해결하면 선두에서 유리한 자리를 점할 수 있을 것 같아 창업에 뛰어들었다. 서 대표를 만나 렌털 시장의 정보 비대칭과 불합리한 유통 구조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다.
◇창업에 꽂힌 경영대생이 회계사 자격증 딴 이유
렌트리는 생활가전 렌털 가격 비교 플랫폼이다. 웹이나 앱에 원하는 렌털 조건을 입력하면 제품 정보와 실시간 유통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의 제품을 추천해 준다. 전국 판매자들의 견적을 취합해 이용자에게 보여주는 ‘역경매 방식’으로 쉽게 견적을 비교할 수 있다. 안전 거래를 담보하기 위해 입점 판매원을 까다롭게 관리한다. 플랫폼 내에서 편하게 채팅 상담을 할 수 있다.
창업 초기 정수기, 비데 등 전통 렌털 가전으로 출발해 지난 6월부터 TV,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등 생활 가전 전반으로 서비스 영역을 확대했다. 추후 가구 등 라이프스타일 제품 전반으로 확장할 구상이다.
서강대 경영학과 출신이다. 창업보단 취업이 대세였던 시절부터 창업가를 꿈꿨다. “서비스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큰 임팩트 주는 일을 동경했어요. 대학생 때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죠. 하지만 아는 게 없고, 창업에 대한 정보도 희소해서 겁이 났어요. 경험과 지식을 쌓은 후 창업에 도전해야겠다 결심했죠. 여러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회계사를 선택했어요. 숫자를 다루며 거시적으로 시장을 보는 관점을 키울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2013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유명 회계법인에 근무하면서도 창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삼정회계법인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훗날 함께 창업하기로 한 대학 동기와 주말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처음 시도한 건 교육 사업이에요. 상업고등학교나 정보고등학교 같은 특성화고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를 경우 ‘직업탐구’라는 과목을 봐야 하는데 관련 강의나 수험 서적이 별로 없어요. 애초에 수능을 치는 아이가 적기 때문이죠. 수요가 있으면서 사회적 보탬이 될 일을 찾던 중에 이 문제가 눈에 들어왔어요. 2014년 직업탐구 온라인 강의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이후에도 사람들의 고충점을 찾아 해결하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어요.”
2015년 육군 경리장교로 입대했다. 전역 후 삼일회계법인에서 근무하던 중 도전장을 내밀고 싶은 시장을 발견했다. “M&A 거래에 필요한 가치 평가 및 재무실사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많은 산업을 접했는데 그중에서도 렌털 비즈니스가 눈에 들어왔어요. 구독 경제의 일상화, 1인 가구 증가, 소비자 구매 패턴의 변화 등의 요소가 맞물리며 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에도 틈이 있어요. 시장 전망이 좋은 소비자 경험을 담보하지는 않잖아요. 전도 유망함에 가려진 문제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죠.”
개인적으로 정수기 렌털을 알아보다가 느꼈던 불편함이 떠올랐다. “제품의 종류는 많은데 렌털 계약과 관련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없어서 애먹었어요. 온라인 검색으로 찾은 정보는 대부분 광고라 신뢰하기 어려웠죠. 구체적인 정보를 얻으려면 렌털 업자들에게 전화하거나 방문 상담을 받아야 했죠. 그렇게 연락이 닿으면 저마다 제시하는 조건이 달랐어요. 혼란스러웠죠. 최종 결정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어요. 정수기 하나 설치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죠. 너무나도 불투명한 시장이었어요.”
◇정수기 렌털 찾는 과정에서 경험한 불쾌함 토대로 착안
2021년 1월, 회계법인을 퇴사하고 렌털 시장의 정보 비대칭을 해결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해관계자를 무작정 만나고 다니며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첫 3달 간 소비자, 판매자, 제조사 등 가리지 않고 만나서 시장의 구조와 이해관계자들이 처한 문제를 파악했어요. 소비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건 ‘높은 탐색 비용’이었어요. 계약 후도 문제였죠. 의무 사용기간은 너무 길고, 중간에 해지할 경우 큰 위약금을 물어야 하거든요. 렌털 계약을 위해 발급받은 카드 혜택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 소비자가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죠. 렌털 시장에 대한 소비자의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어요.”
판매자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렌털 비용을 보면 제품 원가 대비 수수료 및 판매관리비가 높고, 이중 상당수가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구조입니다. 그렇다고 이분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어요. 판매자들도 소비자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광고비로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하고 있거든요. 옛날 방식인 대면 상담 방식을 고수하는 관성도 비효율적이었죠. 판매자들에게 디지털화된 렌털 판매 툴을 제공한다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메일링 서비스 형태의 MVP(최소기능시범서비스)를 만들어 시장성부터 검증했다. “’소비자의 탐색 비용이 너무 크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불필요한 과정을 줄이는 데 주안점을 뒀어요. 이용자가 찾고 있는 제품을 말하면, 저희가 판매자 중에서 조건이 맞는 사람을 찾아 연결시켜주는 방식이었죠. ‘누가 대신 찾아주니 너무 편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어요. 이 아이템으로 창업 공모전에서 수상도 했죠. 시장 반응도 얻고 인정도 받았으니 본격적으로 뛰어들어도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렌털 제품의 ‘다나와’ 구상, 중간 판매자가 필요한 이유
2021년 9월, 개발자를 채용하고 플랫폼 개발에 착수했다. ’전국에 있는 렌털 제품을 한데 모은 플랫폼’이 콘셉트였다. “렌털 시장의 파편화된 정보를 표준화된 데이터로 취합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어요. 각 제품에 대한 유통 정보와 정책이 수시로 바뀌거든요. 그동안 판매자들은 엑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수기로 정보 변동을 관리해왔죠. 일련의 데이터가 알아서 업데이트될 수 있도록 자동화하는 데 주력했어요. 렌털 판매 생태계에서 상위에 위치한 판매자들을 만나서 저희의 비즈니스를 설명하고 관련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일일이 설득했죠.”
전국에서 날고 기는 렌털 업자는 죄다 모았다. “처음엔 업계에서 유명한 분들을 모셔오는 데 주력했어요. 소비자 문의가 들어오는 즉시 대응할 만큼 열정적인 분들이죠. 서비스 규모가 커지면서 플랫폼 등록을 희망하는 업자분들이 많아졌어요. 현재는 지원이 들어오면 과거 이력과 경력을 조회한 후 입점을 진행합니다. 설치 지연, 사은품 지급 이행 약속 불이행, 늦은 대응 등 신뢰를 저하하는 행동이 적발되면 페널티를 부여해서 서비스 품질을 관리해요.”
- 판매자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판매하면 비용을 더 줄일 수 있지 않나요.
“렌털 비즈니스는 보험업과 유사해요. 구매 전환 후 한 사이클이 끝나는 커머스 비즈니스와 달리 계약을 유지시키는 게 중요한 산업이죠. 그래서 소비자에게 계약 조건, 혜택 등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휴먼 터치’가 중요합니다. 렌털 시장에서 휴먼 터치를 전담하는 분들은 바로 판매자입니다. 이분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죠.”
◇생활가전 전반으로 영역 확대, 렌털에 대한 인식 전환 목표
2021년, 가전 렌털 플랫폼 ‘렌트리’ 베타를 선보인 후 올해 초 정식 버전을 출시했다. 지난 4월 렌트리 법인도 설립했다. “원하는 제품과 조건을 입력하면 판매자로부터 실시간으로 견적을 받아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최종 판매자를 선택한 후에는 비대면 상담으로 넘어갑니다. 기존의 전화나 방문 상담 대신 앱 내 채팅으로 상담을 진행해서 개인정보 노출 우려가 없죠. 판매자가 약속한 혜택이 제대로 지급되는지 확인까지 합니다. 요악하자면 무엇을, 어디서 사야 할지 정하는 것부터 안전하게 거래하는 것까지 도와주는 서비스입니다. 거래 성사 시 판매자로부터 수수료를 받아서 수익을 창출합니다.”
출시 8개월 만에 누적 거래액 35억원을 돌파했다. 지난 8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주최한 창업경진대회 ‘디데이’에서 우승했다. “전통적인 업무방식을 개선해서 생산효율성을 높였다는 점을 좋게 평가받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작정하고 달려든 스타트업이 없어서 눈에 띈 것 같아요. 대외적인 성과도 중요하지만 이용자 후기가 최고의 홍보 수단이에요. ‘렌트리를 통해서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렌털 계약을 했다’는 후기를 보면 뿌듯하죠. 판매원분들은 손 품이 줄어서 편하다고들 말합니다. 재래식 대응 방식을 디지털 툴로 전환한 덕이죠.”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가전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다. “회계사로 일할 때 사람 다룰 일이 별로 없었는데, 창업하고 보니 사람과 부대끼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플랫폼을 채우고, 활성화시키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니까요. 제가 영위하고 있는 사업 영역은 렌털이지만, 창업의 본질은 모든 사람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과 사회적 가치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창업은 수양의 과정이기도 하네요.”
어느 제품이든 원하는 기간에 원하는 조건으로 빌려 쓸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로 키우는 게 목표다. “점차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고 있어요. 추후 생활가전뿐만 아니라 가구까지 생활 전반을 아우르고 싶어요. 이게 가능하려면 위약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원가를 회수해야 하니까 위약금을 부과할 수밖에 없어요. 다만 불투명한 유통 구조를 혁신하면 가격 거품을 줄이면서도 효율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믿어요. 궁극적으로는 렌털이 전통적인 비즈니스가 아니라 팬시하고 편리한 소비 방식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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