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일 오래 걸린 거요? 겨우 5년. 하하” 그렇게 받아낸 자격증 103개

더 비비드 2024. 7. 1. 09:26
산골 소년에서 우리나라 최고 전기기술자가 된 김영진 교수

저 직업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저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궁금한 일이 있으셨나요. 직업별 궁금증을 해소하는 '그 일이 알고 싶다' 시리즈. 이번 편에선 기술인의 교수 도전기를 소개합니다.

103개의 국가공인 기술자격증을 취득하고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전기과 산학겸임교수로 교단에 서는 김영진 교수. /더비비드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호롱불에 밤을 나던 소년이 있었다. 경북 의성읍에서도 4km 떨어진 산골 오지 출신의 소년에게 전기는 세상과 문명을 잇는 다리였다. 전기가 밝혀준 세상에 반한 소년은 전기기술자라는 꿈을 품고 전기기술자의 외길을 걸었다.

소년은 103개의 국가공인 기술자격증을 취득한 기술인이 됐다. 국가에서 최고 기술자에게 주는 인증을 받고,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전기과 산학겸임교수도 됐다. 기술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는 모두 다 거머쥔 김영진 교수(59세)를 만났다.

◇구조조정 위기를 버티게 한 비결

김 교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현대중공업에 취직하면서 사회 첫 발을 뗐다. /더비비드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호롱불에 의존해야 했던 밤의 풍경이 달라진 건 중학생 때의 일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20가구가 모여 살았던 시골 마을 출신이라 문화적, 사회적 혜택이 늦었어요. 전기가 개통되니 신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선풍기를 틀고 밤에 형광등을 켜는 일이 가능해졌죠. 그때 전기기술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79년 대구에 있는 영남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야간과정으로 진학해 낮에는 일을,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인생의 첫 번째 자격증인 전기기능사를 취득했죠.”

1982년 1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열아홉의 나이로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본부에 취업했다. “전기기능사 자격증 덕분에 기간산업체에서 병역 특례 혜택을 받으면서 첫 직장에 취업했습니다. 선박 전선 설치 공사를 맡았는데요. 무척 고됐어요. 40미터 높이에서 자욱한 용접 가스와 먼지를 버텨내야 하는 건 물론, 여름에는 더위, 겨울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죠.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근무했고요. 그렇게 일해서 받은 월급은 13만원이었어요. 그래도 수만 명이 다니는 대기업의 직원이라는 자부심이 저를 버티게 했습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편한 곳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했어요. 그땐 정말 다 그렇게 살았어요.”

김 교수는 직장을 옮긴 후 전기설비 유지보수 기술 체득의 필요성을 느껴 자격증 사냥에 돌입했다. /김영진 교수 제공

입사 6년째를 맞았을 때 조선업계에 불황이 닥쳐 그가 소속된 조선사업본부에서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65명의 팀원 중 3분의 1인 20명이 퇴사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어요. 다행히 저는 그룹사인 현대엔진으로 인사이동이 됐습니다. 전기기능사 자격증 보유자에 한해 전출을 받아줬거든요. 현대엔진 보전부에서 ‘전기설비 유지보수’라는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업 환경은 전 직장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고, 새롭게 배워야 할 전기기술은 많아지고. 저에게는 여러모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습니다.”

새 직장에서 그의 오기를 자극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전 직장에서는 전기설비 유지보수 기술을 발휘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보전부에서는 장비를 수리해야 하니까 전기설비 유지보수 기술이 절실히 필요하더라고요. 저보다 일찍 보전부에서 일했던 분들을 따라잡을 재간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사수의 공구통을 들고 다니는 일과 손전등을 비춰주는 보조 역할을 해야 했죠. 자존심이 상했어요. 이 사람들을 따라잡으려면 전기기술 이론 공부부터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더 높은 등급의 국가기술자격증인 전기공사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전기기능장 수석 합격이라는 달콤한 결실

김 교수가 취득한 국가공인 자격증들. /김영진 교수 제공

그때부터 그의 주경야독 생활이 시작됐다. 고졸인 그에게 전문대학 수준인 산업기사 공부는 분량이 많았고, 내용도 꽤나 어려웠다. “틈나는 대로 공부했습니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하면서 하루에 최소 3시간의 공부시간을 만들어냈어요. 졸음이 쏟아지면 찬물에 발을 담그며 결의를 다졌죠. 6개월 동안 꾸준히 공부한 덕에 전기공사산업기사 자격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순간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자신감이 붙은 저는 본격적인 자격증 사냥에 돌입했습니다. 전기기사와 전기공사기사 자격증에도 도전장을 내밀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갔죠.”

모든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기공사기사는 2차 시험에서 무려 여섯 번을 낙방해 일곱 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6전 7기로 꼬박 2년 반이 걸렸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시험에서 여러 번 떨어진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응시하면서 쌓은 실력이 다음 기회를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그랬다. “전기공사기사 다음 목표는 기능인의 최고봉인 전기기능장이 되는 것으로 정하고 공부에 전념했는데요. 1999년 제26회 전기기능장 2차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수석 합격을 했습니다. 고졸인 제가 기능대학 출신자를 제치고 당당하게 최고 점수를 얻은 것이죠. 이 일로 매스컴에서 화제의 인물로 소개됐습니다. 회사에서는 사위선양에 대한 보답으로 특별포상과 해외연수 기회를 부여해 2주간 유럽 체코로 산업 시찰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동료들로부터 큰 부러움을 샀습니다.

◇직업훈련교사로 3000명 넘는 기술연수생 배출

기술교육원에서 기술 지도를 하는 모습. /김영진 교수 제공

2001년 7월, 현대중공업의 사내 직업훈련기관인 기술교육원으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다. “어릴 적 꿈이 수사관과 교사였어요. 집안 형편 때문에 공고에 진학하느라 꿈에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는데 교사가 될 기회가 눈앞에 펼쳐진 거죠. 20년간 정들었던 생산 현장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제가 보유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도 가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훈련을 직접 해보니 시중의 교재가 현장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교육훈련용 교재도 직접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지금까지 총 11권의 전기 관련 기술 서적을 집필해 발간했고, 현재도 계속 책을 쓰고 있습니다.”

기술교육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자격증 사냥을 이어갔다. “기술지도사, 전기기기기능장, 전자기기기능장을 연이어 취득했어요. 전자기기기능장의 경우 4전 5기 끝에 취득했어요. 실기시험이 1년에 한 번뿐이라 꼬박 5년이 걸린 셈이죠. 이후 32개 직종의 직업능력개발 훈련교사 자격증과 전기감리원 특급, 소방감리원 특급 등의 전문기술자격증도 땄습니다. 18살 첫 자격증을 딴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기, 전자, 소방, 통신, 기계 등의 분야에서 42년에 걸쳐 총 103개의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자격증 공부를 할 때는 단 5분의 휴식 시간도 아까웠어요. 사회에 첫 발을 뗀 이래로 노력을 게을리한 적이 없습니다.”

(왼쪽부터) 김 교수가 집필한 책을 안고 웃어보이고 있는 모습, 그간 김 교수가 쓴 책들이다. /더비비드, 김영진 교수 제공

3000명이 넘는 기술연수생을 배출한 직업훈련교사였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은연중에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나 봅니다. 2002년 불혹의 나이로 학점은행제를 통해 전기공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당시 취득한 자격증들이 전공 학점을 인정받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20년이 지난 2020년 울산대학교 산업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해 올해 2월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시험, 리포트, 네트워킹 일정이 쉬지 않고 잡혀서 무척 바빴지만 평생학습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퇴직 2주 만에 유망 중소기업 재취업, 폴리텍대학 산학겸임교수로 출강

2011년 받은 동탑산업훈장 사진. 김 교수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약 2500시간에 달하는 기술지도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일련의 노력을 동탑산업훈장,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선정 등의 성과로 인정받았다. /김영진 교수 제공

그의 노력담은 어디에서나 귀감이 됐다. 다른 사람이라면 일생일대의 성취로 꼽힐 만한 것들을 그는 해를 넘기기 무섭게 쌓아가고 있다. “2000년 12월에 대한민국신지식인에 선정됐습니다. 2011년 9월에는 정부가 주관한 직업능력개발 최우수유공자에 선정돼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국가가 개인에게 줄 수 있는 정부포상으로는 최고 등급이라고 할 수 있죠. 2013년 1월에는 고용노동부 주관 ‘스타훈련교사’, 같은 해 5월에는 고용노동부 주관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에 선정됐습니다. 후자의 경우 국가로부터 아주 후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술인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된 것이죠. 올해에는 한국산업인력공단 주관 ‘국가자격취득자 우수사례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경상북도 최고장인’에도 선정됐습니다. 또 ‘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인’에 선정돼 고용노동부장관으로부터 전기직종 ‘우수숙련기술자’ 증서를 받았죠. 올 한 해에만 국가공인 ‘최고 3관왕’에 등극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KBS TV 아침마당’ 등의 방송에 수 차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탄탄한 기술력과 뒷받침할 자격증을 갖춘 그에게 퇴직은 그리 서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직장에서 39년 동안 생산현장의 전기기술자와 교육훈련 전문가로 근무했습니다. 정년 4년을 남겨놓고 회사의 경영 악화로 2020년 자진해서 명예퇴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혹독한 시련이 닥쳐오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퇴직 2주 만에 경북 영천에 있는 종업원 59명이 일하는 유망 중소기업(배터리 리사이클링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전기기사자격증의 공이 컸어요. 현재 공무부장의 직함으로 전기시설물의 유지 보수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2021년부터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전기학과 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더비비드

지난해부터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전기학과 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자격증이 많다고 소문이 났나 봅니다. 캠퍼스 측의 제안을 받고 교단에 서게 됐습니다. 모토는 현장 맞춤형 교육입니다. 전기 관련 직종에서 다루는 전기설비, 시퀀스제어, 전기기기 운전, 전기측정 등 학생이 취업한 후 바로 사용할 기술 위주로 가르칩니다. 캠퍼스가 관련 시설을 잘 갖추고 있어서 지도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습니다. 학생들도 열심히 해요. 제가 몸담은 울산캠퍼스의 경우 2021년 대학 정보공시 기준으로 83.1%의 취업률을 달성했습니다. 제자들 가르칠 맛이 아주 나요.”

제자들에게 ‘자격증은 나의 자부심이자 경쟁력’이라고 강조한다. “몇 년 전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을 수료한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포스코에 취업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어떻게 취업했냐고 물으니 ‘교수님이 자격증 10개만 따면 쉽게 취업한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랐다’고 하더라고요. 대견하고 기특했습니다. 제자들 중 의지가 강한 학생들이 있어요. 의지가 확인되면 무조건 도와주자는 게 제 교육 철학입니다. 그런 학생들 대부분은 현대중공업, 현대일렉트릭, 현대미포조선, 현대자동차, LG전자, SK하이닉스 등 유수의 기업에 취업해요. 뿌듯합니다. 현장에 특화된 제자를 한 명이라도 더 배출하는 게 교수로서의 제 목표입니다.”

◇단 5분의 시간도 헛되지 않게

그를 103개 자격증 다관왕으로 만든 건 '절박함'이었다. /더비비드

남들은 공부중독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자격증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유일한 동력은 ‘절박함’이었다. “기술은 그야말로 내가 먹고사는 도구입니다. 기술력을 입증할 만한 것은 오로지 자격증뿐이니 절박한 마음으로 모든 시험에 임했습니다. 취향이나 적성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고요. 내 생계가 달린 문제기 때문에 배우기 싫어도 배우고, 버틴 겁니다.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지요.”

‘준비하는 사람에게 기회는 온다’는 말의 힘을 믿는다. “오래전부터 구전된 말입니다. 취업 준비 중인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살아보니 정말 그랬거든요. 그러니 당장 취업이 목표라면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 올인하세요. 단, 5분의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길 바랍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