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시계를 재설정하는 수면 조명 개발사 ‘루플’ 김용덕 대표
‘고래 투어’는 하와이의 대표 여행 상품이다. 고래를 볼 수 있는 황금 시간대는 일출 전과 일몰 후다. 고래는 시계도 없는데 그 시간만 되면 귀신같이 나타난다. 몸 안의 생체시계 때문이다.
고래 뿐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체시계를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척추동물은 눈에 들어오는 빛을 통해서 시계를 조절한다.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파장을 토대로 낮과 밤의 차이를 인식한다.
사람만 예외다. 조명이 발명된 후 인간의 생체시계는 고장났다. 낮은 일조량이 부족하고, 밤은 밝은 조명에 과도하게 노출돼 생체시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루플’은 빛으로 생체시간을 재설정 하는 생체리듬 케어 스타트업이다. 라이트 테라피(Light Theraphy·광선요법) 기술로 낮에는 집중력을, 밤에는 수면을 관리해 준다. 루플의 김용덕(49) 대표를 만나 삼성전자 출신 엔지니어가 생체리듬에 꽂힌 이유를 들었다.
◇커피 달고 사는 수험생 모습에 충격 받은 삼성맨
생체리듬은 하루 24시간을 주기로 일어나는 생체 내 과정을 뜻한다. 이 주기의 리듬은 생체시계에 의해 조절된다. 생체리듬 케어 스타트업 ‘루플’은 빛으로 생체시계를 재설정해 수면과 집중력을 관리한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인 CES(세계가전전시회)에서 2년 연속으로 혁신상을 받았다.
보유 기술은 3가지다. 각성과 이완을 빛의 파장으로 제어하는 기술과 데이터 기반 인공지능(AI) 수면 개선 플랫폼 그리고 라이트 테라피 기기 구현 기술이다. 생체시계를 각각 낮과 밤으로 설정해 주는 라이트 테라피 조명 올리(Olly) 2종은 미국, 유럽 등 7개국에 수출 중이다. 3가지 기술을 모두 아우른 종합 수면 관리 솔루션 ‘닥터 16′은 기업과 병원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다.
꽂히면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다. “고려대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같은 전공으로 석사까지 마쳤습니다. 1999년 삼성전자의 엔지니어로 취업했어요. 10년 가까이 40개의 팀과 협업해 노트북 개발을 주도했죠. 2008년부터 1년 간은 가치혁신 전문가로 활동했어요. 당시 삼성은 제품별로 상이했던 설계를 라인업 기준으로 표준화해서 채산성을 높이는 작업 중이었는데요. 가치혁신 전문가는 회사의 모든 제품을 일일이 뜯어본 후 이 작업에 도움 되는 조언을 하는 자리입니다. 당시 정말 많은 걸 배웠죠. 문제 해결을 좋아해 사내 공모전인 모바일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은 적도 있어요.”
20년 차 직장인이 되자 동료들의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사가 급성장하던 시기라 전 팀원이 야근을 불사해가며 일했는데요. 점점 몸이 상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유독 불면증에 시달리는 동료가 많았죠. 수면 부족은 정신건강 전반과 직결되는 위험한 증상이에요. 잠이 부족하면 불안감이나 우울감 같은 부정적 감정의 증대, 공격성 증가, 집중력 저하, 신경 퇴행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거든요.”
동료들이 불면에 시달린 건 오랜 실내 생활 때문에 생체리듬이 깨진 탓이었다. “생체리듬은 빛과 큰 관련이 있어요.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불리는 세로토닌은 낮에 풍부한 빛을 받아야 분비되는데요. 낮에 세로토닌이 충분히 만들어져야 숙면에 꼭 필요한 호르몬이 멜라토닌이 밤에 잘 분비됩니다. 저와 동료들은 실내 중심의 생활을 하다가 호르몬 분비에 문제가 생겨 생체리듬까지 붕괴된 것이죠.”
주변의 생체리듬 통제 수단을 살펴봤다. 공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험생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들 때문에 진학 준비 중인 자녀를 둔 학부모들과 자주 어울렸는데요. 아이들이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며 걱정하더라고요. 하버드대 학생들은 집중력 향상을 위해 시험 기간에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치료약을 복용하고, 시험 후에는 멜라토닌 약에 의존해 잠을 잔다는 정보도 접했어요. 학업 때문에 약물에까지 손대고 있던 거죠.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안타까웠어요. 비약물적인 집중력 관리 수단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어요.”
◇낮은 낮답게, 밤은 밤답게 만들어주는 조명 만들어 해외 수출
2018년 ‘인공지능을 이용해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나이트 디바이스’ 아이디어로 사내벤처 육성제도 씨랩(C-lab)에 도전해 선정됐다. “각성을 촉진하는 파장의 빛을 조명으로 구현해 멜라토닌을 억제해서 잠을 깨우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방식이었어요. 이 아이디어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회사의 지원을 받게 됐죠. 그러다 문득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했어요. ‘과연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행복한 삶일까. 학생 때는 공부 못지않게 양질의 수면을 취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요. 불면에 고통받던 옛 동료들의 모습도 떠올랐고요. 빛을 활용해 숙면을 돕는 제품도 개발하기로 했죠.”
2019년 6월, 삼성전자로부터 스핀오프(분사)하고 루플 법인을 설립했다. “2017년, 몸속에서 생체시계를 관장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한 과학자들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면서 생체리듬 개념이 각광받기 시작했어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라이트 테라피로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가 활발했어요. 우울증 치료 용도로도 활용되고 있었죠. 반면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개념이었어요. 라이트 테라피의 메커니즘부터 설명하는 게 급선무였죠.”
2020년 7월, 라이트 테라피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전략적으로 낮과 밤 조명 ‘올리 시리즈’를 출시했다. “빛의 파장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용도별로 제품을 나누었어요. 올리데이의 경우 아침 햇빛의 분광 분포와 비슷하도록 파장을 설계해 조명을 약 20분간 쐬면 뇌가 아침으로 인식해 각성 효과를 일으킵니다. 저녁용 조명 올리나이트는 멜라토닌 분비를 방해하지 않는 파장을 내요. 맑은 정신이고 싶을 때는 올리데이를, 쉬고 싶을 때는 올리나이트를 쓰면 되는 거죠.”
집중력 향상에 특화된 올리데이에는 ‘디지털 카페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카페인 섭취 대신 빛으로 각성하라는 뜻에서 커피잔 형태로 제품을 디자인했어요. 제품의 효능을 입증하는 데에도 공들였어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 각성하는 데까지 30분이 걸리는데요, 올리데이를 사용하면 20분 만에 정신이 맑아집니다. 카이스트와의 공동 실험을 통해 올리데이 사용 시 집중할 때 발생하는 뇌파인 베타파가 증가한다는 점도 밝혀냈어요.”
올리 2종은 라이트 테라피가 활성화된 선진국 중심으로 호응을 얻었다. “미국, 스위스, 캐나다, 일본, 독일, 영국 등 7개국에 올리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핵 전쟁에 대비해 벙커살이를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쇼핑몰이 있는데요. 이곳에서도 올리를 판매하고 있어요. 처음엔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입점을 한 건데,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벙커살이를 하면 햇빛을 볼 수 없으니 햇빛을 대체할 올리 같은 조명이 필요했던 거죠. 신기했어요. 스위스에서는 약국에서 올리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잠든 8시간이 아니라 깨어 있는 16시간이 숙면 좌우
올리로 라이트 테라피의 직관을 제시했으니 이번에는 ‘세계관’을 보여줄 차례였다. 생체시계를 재설정해 원하는 수면패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솔루션 ‘닥터 16′을 개발했다. “숙면을 위해 침대와 베개를 교체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섰어요. 많은 사람들은 잠자는 8시간에 집중하는데, 저희는 깨어 있는 16시간에 초점 맞추기로 했어요. 눈 뜨고 활동하는 16시간이 생체시계를 재설정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거든요.”
닥터 16 솔루션을 이루는 축은 앱 서비스, 조명 기기, 데이터 매니저 3가지다. “앱에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입력하면, 빛으로 생체시계를 재설정 할 때를 알려줍니다. 아침 빛이 필요하다는 알림과 함께 낮의 파장을 내주고, 저녁엔 밤의 생체시계를 설정하는 파장을 내주는 식이죠. 조명 기기는 올리데이와 올리나이트를 합친 형태로, 낮과 밤의 파장을 모두 구현할 수 있어요. 아침 기상 후에는 수면 일기를 작성하게 해요. 수면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도 중요하거든요. 이 모든 기록은 데이터 매니저에 저장됩니다. 데이터 매니저는 16시간 동안 관리한 결과가 수면 시간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줘요. ‘빛’이 이용자의 수면에 끼치는 영향을 통계와 데이터로 제시하죠.”
대학병원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닥터 16 알고리즘의 수면 개선 효과를 검증했다. “2주간 수면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의 생체시계를 재설정한 후 이들의 수면 개선 패턴을 분석했어요. 수면 시간이 증가하고 취침 시간이 앞당겨지는 등 11개의 수면 패턴 측정 항목 중 8개 항목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죠. 쾌재를 불렀어요.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생체시계를 재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수면 방식과 질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AI에 관련 데이터가 쌓이면 이용자가 원하는 수면 패턴을 만들 수도 있겠죠.”
◇2년 연속 CES 혁신상, 종합 생체리듬 케어 기업 목표
빛으로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2년 연속으로 CES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다. 지난 8월에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가 주최하는 창업경진대회(디데이) 본선에 진출했다.
“2021년에는 올리 기기로, 2022년에는 수면 솔루션으로 상을 받았어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모두 인정받았으니 스타트업으로서는 너무나 큰 영예죠. 그래도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건 이용자들의 후기에요. 한 영국인 소비자로부터 메일을 받은 적이 있어요. 아들을 돌연사로 잃은 충격에 우울증과 수면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올리의 도움으로 잠들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요.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이죠.”
종합 생체리듬 관리 서비스가 되는 게 목표다. “간호사, 생산직 근로자 등 교대 근무를 하시는 분들은 생체리듬이 무너지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어요. 간호사의 유방암 발병률이 높다는 통계도 있죠. 병원, 기업 중심으로 저희 솔루션을 도입할 계획이에요. 장기적으로는 건강의 기본인 생체리듬 영역을 선도하는 기업이 되고 싶어요. 생체리듬은 개인화가 필요합니다. 빛뿐만 아니라 운동, 식사, 약물, 카페인 등의 생체시계 변동 요인까지 관장할 구상합니다. 달콤한 잠과 건강을 선사하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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