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봉 8000만원 직장인, 삼시세끼 3800원으로 해결한 이유

더 비비드 2024. 6. 28. 09:57
퍼스널컬러에 맞는 옷 추천 앱 ‘코콘’ 개발한 블랙탠저린 김상이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블랙탠저린 김상이 대표는 LG생활건강 입사 6년 차에 창업을 꿈꾸며 한 달간 하루 식비를 3800원으로 제한했다. /더비비드

200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 ‘만원의 행복’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치솟는 물가에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일·주·월 단위로 지출을 제한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하루 만원으로 살기’, ‘일주일 5만원으로 살기’, ‘무지출 챌린지’ 등이 SNS를 통해 놀이처럼 번지고 있다.

‘짠테크(절약형 재테크)’ 열풍이 불기도 전에 ‘만원의 행복’을 알아차린 이가 있다. LG생활건강 맵시(MEPSI)팀을 이끌었던 블랙탠저린 김상이 대표(35)는 입사 6년 차에 창업을 꿈꾸며 한 달간 하루 식비를 3800원으로 제한했다. 회사 근처 한식집 제육볶음이 8000원일 때였다. 대기업의 따듯한 품속에서 타성에 젖어있을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연봉 8000만원을 뒤로 하고 다시 출발선에 섰다. 창업 7개월 만에 여성 전용 의류 쇼핑 앱 ‘코콘(Cocon)’을 내놓았다. 이용자가 앱을 통해 사진을 찍어 올리면 인공지능이 피부 톤, 얼굴 이미지, 체형 등을 분석해 어울리는 옷을 추천해준다. 정식 출시 이후 누적 사용자는 22만명을 넘어섰다. 김 대표를 만나 ‘3800원의 행복’ 이후 생긴 변화를 들었다.

◇패션디자이너 꿈나무의 변신

스타트업 울트라캡숑 재직시절 김 대표. 회사의 유일한 마케터였다. /김상이 대표 제공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란에 늘 ‘패션디자이너’라고 썼다. 중학생 때부터 보그, 얼루어 같은 유명 패션 잡지를 구독해 챙겨볼 정도로 진심이었다. 2006년 이화여대 의류학과에 입학했다. “유학을 꿈꿨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대신 왜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어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더군요. 가장 비슷한 매력을 가진 직업이 ‘창업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턱대고 창업에 뛰어들 순 없었다. 경험을 쌓기 위해 2011년 10월 스타트업 ‘울트라캡숑’에 마케터로 입사했다. “한국판 페이스북을 목표로 ‘클래스메이트’라는 앱을 만들었어요. 대학교 마다 혼자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자양강장제를 나눠주면서 홍보했습니다. 한 달간은 새벽 6시에 나가 등교하는 고등학생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기도 했죠.”

열띤 홍보에도 반응이 없자 새로운 데이팅 앱 ‘너말고니친구’를 개발했다. 이번엔 먹혔다. 한국·대만에서 다운로드 총 140만회를 기록했다. 국내 고등학생의 20%가 가입하는 성과를 얻었다. “앱이 생물처럼 진화하더군요. 의도와 달리 사용자들에 의해 ‘셀카 대결 앱’으로 변한거죠. 2014년 회사가 카카오에 인수되면서 ‘울트라캡숑’이란 이름도 사라졌습니다.”

울트라캡숑 팀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 한국형 페이스북을 만들자는 목표로 '너말고니친구' 앱을 키워나갔다. /김상이 대표 제공

스타트업의 시작과 끝을 보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창업을 위해 나만의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당시 온 국민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빠져있었는데요. 여자 주인공인 천송이가 걸친 옷, 액세서리가 완판을 기록했죠. 이런 현상을 보면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커머스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2014년 6월 맵시(MEPSI)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먼저 콘텐츠가 정말 구매로 이어지는지 직접 실험해보기로 했다. “대만의 소셜미디어 BBS에서 저 스스로 인플루언서가 됐습니다. 페이스북·블로그에 뷰티·패션·문화 등 한류 콘텐츠를 만들어 올렸어요. 조회수 10만회를 넘긴 이후 ‘천송이 립스틱’이란 아이템으로 ‘공동구매’를 시도했습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저를 믿고 사는 걸 보니 사업 가능성이 있겠다 생각했어요.”

본격적으로 사업화에 뛰어들려는 찰나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LG생활건강이 최근 중국 시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며 제가 하던 일을 신사업 부문으로 인수해 확장하고 싶다고 제안해왔습니다.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큰 고민 없이 수락했어요. 2015년 1월부터 LG 사원증을 목에 걸고 출근했죠.”

콘텐츠가 구매로 이어지는지 실험하기 위해 대만 소셜미디어 BBS에서 인플루언서가 됐다. /김상이 대표 제공
피부색을 바탕으로 파운데이션, 립스틱 등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기획해 오프라인 매장에 키오스크를 설치하기도 했다. /김상이 대표 제공

꽤나 튼튼한 울타리가 생겼다는 사실 외엔 달라진 건 없었다. 중국·대만을 타깃으로 맵시의 콘텐츠 마케팅 영향력을 키워갔다. “자체 MCN(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를 발굴·관리하는 일종의 소속사)을 꾸려 뷰티 크리에이터를 발굴했어요. 메이크업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 화장이 얼마나 잘 됐는지 점수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오프라인 매장에 키오스크를 설치하기도 했죠.”

연봉 8000만원에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회사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제안한 모든 프로젝트를 맘껏 실행할 순 없었어요. 가령 피부색을 바탕으로 파운데이션·립스틱 등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기획했는데요. 관련 앱을 만들어 출시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진전시킬 수 없었습니다.”

◇셀카 한 장으로 퍼스널 컬러를 잡자

LG생활건강 재직 시절 김상이 대표. /김상이 대표 제공

또 한 번 실험실을 열었다. 실험 대상은 ‘나’였다. “스타트업 시장이 야생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릴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를 만들 때 하루에 핫도그, 오렌지 하나씩만 먹었다더군요. 우리나라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3800원 정도였죠. 한 달간 매일 3800원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도전을 했습니다. 병아리콩, 토마토, 샌드위치 정도로 버티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있었어요.”

새 사업 아이템을 구체화하며 ‘퍼스널 컬러’에 주목했다. “퍼스널 컬러는 피부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상을 찾는 색채학 이론인데요. 화장품이나 옷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상당수가 제품을 고를 때 자신의 피부톤과 어울리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피부톤을 진단받기 위해서는 적게는 5만원에서 많게는 20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내야 하죠. 온라인에서 퍼스널컬러를 진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2021년 3월 사직서를 냈다. 퇴직금 3000만원은 고스란히 ‘블랙탠저린’ 창업 자금으로 들어갔다. “블랙(검정)은 모든 색을 담는 색이고 탠저린(귤)은 가시성이 가장 높은 색입니다. 개성이 있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싶었어요. 퍼스널 컬러 진단 서비스명은 ‘코콘(cocon)’으로 지었습니다. 컬러 컨설턴트의 약자죠.”

함께 손을 모으고 있는 블랙탠저린 직원들의 모습. /김상이 대표 제공

앱 개발에 앞서 챗봇으로 시장 조사를 했다. “퍼스널 컬러를 진단받고 난 뒤에 소비자가 보일 행동이 궁금했어요. 시험 삼아 넣어 본 ‘패션콘텐츠’로 유입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2주 동안 2000명이 참여했고 이들 중 패션 콘텐츠를 보러 가는 사람이 80%를 넘었죠. 퍼스널 컬러와 패션 카테고리를 하나로 묶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해 10월 퍼스널 컬러 진단을 겸한 여성 의류 쇼핑 앱 ‘코콘’을 정식 출시했다. ‘코콘’은 개인 맞춤 추천 상품을 보여주는 패션 쇼핑 앱이다. 다른 쇼핑 앱과 가장 큰 차이점은 퍼스널 컬러 같은 신체 정보를 활용한다는 점이다. 앱을 통해 사진을 찍으면 인공지능이 분석한 피부 톤, 얼굴 이미지 정보를 받을 수 있다.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나에게 맞는 패션 아이템을 추천해준다. 옷을 고르는 데 고민을 줄일 수 있다.

서비스를 받는 방식이 재밌다. “코콘 안에서는 귤이 화폐를 대신합니다. 옐로톤, 레드톤, 채도, 명도, 종합평가에 각각 귤 5개가 쓰여요. 서비스 개선을 위한 설문조사에 참여하거나 친구를 초대하면 무료로 귤을 받을 수 있고 멤버십 방식으로 정기 결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퍼스널 컬러 진단 방식은 간단하다. 앱에 접속한 뒤 셀카 한 장만 남기면 된다. “오프라인에서는 퍼스널 컬러를 진단할 때 옆에서 쉴 새 없이 말합니다. 분홍색 천을 가져다 대고 ‘피부가 탁해 보인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 그런가보다 싶죠. 그런데 온라인은 신뢰를 얻기가 힘들어요. ‘내가 받은 분석에 오류가 있나?’ 의심이 들게 되죠. 그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크서클 명도 차이,  혈색 등 엄격하고 정확한 분석 기준을 세웠습니다.”

앱 코콘에서 셀카를 찍어 퍼스널 컬러를 확인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옷을 추천받을 수 있다. /블랙탠저린 제공

이미 찍어둔 사진으로는 퍼스널 컬러를 진단할 수 없다. “사진 보정 앱에서 필터를 적용해 촬영한 사진은 당연히 판독 불가입니다. 심지어 기본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조명 등 환경에 따라 피부톤이 다르게 보여요. 코콘 앱에서 셀카를 찍을 때는 그런 오류가 없도록 자연광이 들어오는 곳에서 정면으로 촬영하도록 안내합니다. 안 되면 그 촬영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재촬영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퍼스널 컬러 진단 내용과 신체 정보를 기반으로 옷을 추천한다. “다른 쇼핑 앱에선 이용자의 활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품을 추천해줍니다. 그동안 클릭했던 제품과 비슷한 제품을 보여주는 식이죠. 이러한 추천 시스템은 온라인에서만 만족하는 추천이라고 생각해요. 실제 옷을 받았을 때 가상의 인물이나 아바타에게 입히는 게 아니니까요. 내 몸에 맞춘 추천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죠.”

◇어릴 적 꿈을 뒤로 하고 새롭게 찾은 행복

옷이 좋아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던 김 대표는 1000벌이 넘는 옷을 처분하고 일에 몰두하고 있다. /더비비드

블랙탠저린은 한국여성벤처협회가 주관한 ‘2021 여성벤처 주간행사’에서 대상을 받았다. 스타트업 플랫폼 ‘혁신의 숲’에서 선정한 2022년 3·4분기 가장 성장률이 높은 스타트업으로 꼽히기도 했다. “상을 받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 자랑스러운 건 코콘 누적 사용자가 22만명을 넘어섰다는 사실입니다. 체형 분석 등 서비스를 더욱더 고도화해서 많은 사람에게 코콘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옷을 좋아하던 사람이건만 올겨울은 후드티 3장이면 충분했다. “블랙탠저린을 창업하면서 1000벌이 넘는 옷을 모두 버렸어요. 올여름도 반소매 티 3장, 반바지 3장으로 날 생각이에요. 옷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일을 더 좋아하게 됐을 뿐이죠. 내가 만든 서비스를 내 자식처럼 여기면서 키워가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는 행복입니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