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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사람일까요?"

가상 인플루언서 제작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폼즈의 이정진 대표. /더비비드

인플루언서가 전자상거래 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제조사 이름 대신 유명인의 이름을 딴 제품명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인플루언서들은 적지 않은 출연료나 수수료를 수취한다.

인지도 제고가 절실한 중소 브랜드나 소상공인은 난감하다. 누구보다 유명세라는 자본이 절실하지만 인플루언서와 협업하기엔 자금력이 부족하다. 무리해서 협업했다가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

과거 화장품 사업을 했던 이정진(36) 씨는 이 구조에 의문을 제기했다. 제조업자로서 제품력을 떨어뜨려가며 원가를 절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구상한 대안이 ‘가상 인플루언서’다. 가상인 인플루언서 제작 플랫폼 ‘페이스폼’을 개발한 폼즈의 이정진 대표를 만나 개발기를 들었다.

◇창업을 결심한 연구원

가상 인플루언서 제작 플랫폼 페이스폼 서비스 화면. /폼즈

폼즈는 가상 인플루언서 제작 플랫폼 '페이스폼'의 운영사다. 주요 타깃은 인플루언서 마케팅, 라이브 커머스를 하고 싶은 온라인 판매자다. 모델 에이전시처럼 이미 제작된 가상 인플루언서를 기업에 연결해주기도 하고, 맞춤 제작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용법은 간단하다. 페이스폼 웹사이트에서 원하는 버츄어 모델의 얼굴을 선택한 후 변환할 사진을 업로드 하면 된다. 그러면 업로드한 사진 속 인물 얼굴이 버츄어 모델로 바뀐다. 현재까지 공개된 모델은 가연, 민서, 채아 등 6명이다. 가상 인간이라고 했을 때 으레 떠오르는 이질감이 없다. 사람 얼굴에 대한 이미지를 꾸준히 딥러닝해서 플랫폼을 구축한 결과다.

아주대 화학과 출신이다. 동대학에서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응용 화학을 세부 전공하며 리튬 배터리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곧 전기차의 세상이 도래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준비했던 바와는 달리 디스플레이 분야에 취업했어요. 2014년 동진쎄미켐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소재나 디스플레이 소재를 삼성, LG, 애플 등의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였죠.”

연구원 시절 이 대표의 모습. /이정진 대표 제공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만족하던 차, 그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졌다.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던 시기에 회사 회장님과 식사하는 자리가 마련됐어요. 회사를 설립해서 큰 규모로 성장시킨 성장 스토리를 현장에서 들었는데요. 무척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직장인으로서 내가 벌 수 있는 돈의 최고치는 얼마일까.’ 최상의 시나리오로 풀려봐야 50억원이었어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젊은 나이부터 제 한계를 정해 놓고 싶지 않았어요.”

◇인플루언서와 협업하며 느낀 몇 가지 문제점들

화장품 브랜드 운영 당시 이 대표의 모습. 그는 이때 인플루언서 시장의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정진 대표 제공

2017년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K 뷰티가 정점을 찍었던 시기였어요. 10대를 타깃으로 하는 비건 색조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했습니다. 꽤 잘됐어요. 화장품을 소재로 하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우수 화장품을 꼽는 코너에서 1등을 했고, 일본 현지의 700개 매장에서 제품이 판매됐어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박미선씨가 시니어 인턴으로 출퇴근하는 회사로 저희 회사가 소개되기도 했었죠.”

​화장품 브랜드다 보니 인플루언서와 협업할 일이 많았다. 그들과 일하다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리스크를 경험했다. “한 대기업 브랜드의 제품 개발을 대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유명 유튜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웹드라마 제작을 준비 중이었는데요. 해당 유튜버의 사생활 논란이 터지면서 프로젝트가 수포로 돌아갔어요. 마케팅을 위해 준비한 유튜브 채널은 폐쇄됐고, 저희 화장품 브랜드는 탄탄한 일감을 잃게 됐죠. 허무했습니다.”

협업 시 발생되는 문제도 많았다.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공동구매 시장이 발달했는데요. 수수료가 문제였어요. 인플루언서 몫이 40~60%에 달했거든요. 화장품 브랜드 같은 제조사는 최소한의 매출이익만 챙겨갈 수 있는 구조였어요. ‘갑’의 위치인 인플루언서에게 수수료를 낮춰 달라고 할 수 없었죠. 원가를 낮추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가를 낮추면 제품력이 떨어지고, 고객에게 외면 받다가 종국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소규모 브랜드는 생존 주기가 단축되고 말죠. 제조업 전반이 공유하는 큰 문제였어요.”

◇사람 모델을 포기할 수 없어 떠올린 대안

실제 인물 사진과 페이스폼을 통해 가상 인플루언서의 얼굴로 변환한 인물의 사진. 왼쪽이 진짜 사람, 오른쪽이 가상 인플루언서다. /폼즈

인플루언서 시장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2021년 2월, 화장품 회사를 나와 같은 해 5월 폼즈 법인을 설립했다. “인플루언서와 제조사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단으로 ‘가상인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기획이 출발점이었어요. 매출의 상당부분을 한 사람이 가져가면 제조사는 매출이익을 늘릴 수 없어서 기업의 고용창출 효과가 줄어들어요. 만약 제조사에게도 충분한 매출이익이 공유된다면 일자리 창출 등 부의 재분배가 이뤄진다고 판단했습니다.”

캐릭터나 마스코트 대신 ‘사람’을 택한 이유는 자명하다. “인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마케팅 도구입니다. 유명인이 특정 기업의 뮤즈가 되는 것만큼 큰 광고효과를 내는 수단이 없죠. 하지만 모델은 그만큼 여러 리스크를 안고 있어요. 그 대안이 바로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상의 인간입니다. 가상 인간은 여러모로 기업에 유리합니다. 컴퓨터가 그려 낸 저작물이기 때문에 관련 권한을 기업이 온전히 소유할 수 있어요. 기업은 기존에 마케팅 비용으로 쓴 돈을 자산으로 전환해 성장할 수도 있죠. 가상 인간이 인플루언서 시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 해결의 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관련 분야를 심도 있게 공부한 전문가가 필요했다. “인공지능 관련 기술 중에서도 딥러닝과 머신러닝, 컴퓨터 비전을 중점적으로 공부한 사람을 찾아 나섰어요. 관련 논문 저자 중 우리나라에 거주 중인 사람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찾아서 연락했습니다. 그렇게 파키스탄 출신의 우스만 박사를 CTO(최고기술책임자)로 영입했습니다.”

◇가상 인플루언서 플랫폼 개발, ‘불쾌한 골짜기’ 극복이 관건

변환 전 후의 인물 사진을 비교하는 이 대표. /더비비드

가상 인플루언서 플랫폼 개발에 들어갔다. 관건은 ‘불쾌한 골짜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불쾌한 골짜기란 인간이 다른 존재를 볼 때, 인간과 많이 닮을수록 호감을 느끼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입니다. 이게 없으려면 애매하게 닮으면 안되고 정말 사람처럼 보여야 했습니다. 딱 봤을 때 이질적인 감정이 들지 않도록 완벽한 인간을 구현해야 하는 거죠. ”

​중추가 된 기술은 비지도학습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방식이다. “기초가 되는 얼굴을 투입하면 인공지능이 이를 혼합해서 새로운 얼굴을 탄생시키는 기술입니다. 이 방식으로 지금까지 30명의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플랫폼에는 6명의 얼굴이 공개돼 있어요. 플랫폼에 특정 사진을 넣고 공개된 가상 모델을 선택하면, 사진 속 얼굴이 모델의 얼굴로 바뀝니다.”

​디자이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자인한 3D 기반의 가상 인간보다 활용성이 좋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크게 디자이너가 만든 3D 기반의 가상 인간과 딥러닝을 활용한 가상 인간 두 종류인데요. 전자의 경우 렌더링이 필요해서 콘텐츠 하나를 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3D 가상 인간의 SNS 계정에 영상이 적은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반면 딥러닝 기반의 가상 인간들은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에도 쉽게 적용합니다. 소위 ‘전기세만 내면 바꿀 수 있는 수준’이죠. 외양도 더 사람 같습니다.”

◇한국인 얼굴 좋아하는 동남아 진출 목표

페이스폼 서비스 이용 화면. /폼즈

현재 웹사이트 기반의 페이스폼 베타 버전을 서비스하고 있다. 앱도 개발 중이다. “유명한 의류 커머스 플랫폼의 셀러들은 소기업이나 1인 사업자가 대부분입니다. 누구보다 매력적인 모델을 필요로 하지만 금전적 여유가 부족한 분이 대부분입니다. 소상공인들에게 월 이용료를 받고 임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상 인간을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 “주로 쇼호스트를 고용했던 상장사에 가상 인플루언서의 저작권을 판매했습니다. 지자체, MCN 기업과도 협업을 추진 중입니다. MCN 기업의 경우 자사가 발굴해서 육성한 인플루언서가 계약기간 후 초대형 기업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곤 했는데요. 처음부터 가상 인플루언서를 도입해서 키우면 그의 유명세를 일종의 자산으로서 내재화할 수 있습니다.”

디데이 수상 당시 공동대표와 함께 축하하는 모습. /이정진 대표 제공

여러 기관으로부터 문제 인식의 시의성과 해결 방안의 참신성을 인정받았다. “올해 초 씨엔티테크로부터 시드투자를 유치했습니다. 인천 콘텐츠랩에서 실시한 데모데이에서 1등을 거머쥔데 이어 지난 10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가 주최한 창업경진대회 ‘디데이’에서 서대문구청장상도 받았어요. 스타트업 종사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의 무대에서 인정을 받다니, 무척 짜릿했습니다.”

가상 인플루언서를 보여주며 웃고 있는 폼즈의 이정진 대표. /더비비드

온라인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목표다. “실제 사람이 움직이는 영상에 저희가 만든 가상 인물 얼굴을 입힌 뒤, 원본 영상과 변환한 영상을 동시에 보여주고 누가 진짜 사람인 것 같냐고 물어보면 40%가 틀린 답을 말해요. 그만큼 관련 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습니다. 당장은 회사의 기술력을 알릴 만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데 주력할 겁니다. 이후 동남아시아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동남아는 한국인의 얼굴을 누구보다 선호하는 유효 시장이거든요. 가상의 인간이 마케팅 콘텐츠에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을 견인하겠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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