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의 길
전문직 자격증 시험 합격이 어려울까. 창업 성공이 어려울까. 애초에 비교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둘 다 쉽지 않은 목표임에는 분명하다. 엄청난 수반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운과 재능도 뒷받침돼야 한다. 둘 중 하나만 이뤄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굳이 목표를 모두 이루겠다 나선 이들이 있다. 전문직 출신의 창업가들이다. 그 어려운 전문직 타이틀을 거머쥐고도 창업에 뛰어든 이들에 대해 알아봤다.
◇전문직종 경험은 최고의 창업 엔진
전문직의 경험은 최고의 창업 엔진 중 하나다. 특정 시장의 문제를 일반 대중보다 빠르게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뾰족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웰트는 우리나라 1세대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다. 디지털 치료제(DTx)는 ‘소프트웨어 약’이다. 알약 형태의 1세대 치료제, 백신 등 바이오 의약품인 2세대 치료제를 넘어 3세대 치료제로 불리는 분야다. 스마트폰 앱 등 컴퓨터 프로그램의 형태로, 질병을 예방·관리하고 치료까지 한다. 일반 약처럼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약을 사용할 수 있다. 연구개발도 신약을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웰트는 불면증 디지털치료제 ‘필로우Rx’를 개발했다. 환자의 생체 정보 데이터를 수집해 맞춤형 수면 스케줄을 제시하는 불면증 치료제다. 의사의 처방으로 사용할 수 있고, 1세대 의약품과 병행해 치료에 활용한다. 필로우Rx를 병원 데이터와 연동하면 즉각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웰트의 강성지 대표는 연세대 의대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3년간 보건복지부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다가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고등학생 시절 가로등 빛의 투사 범위를 개선하는 아이디어로 학생발명전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문제 해결에 진심인 아이였다. 그에게 창업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강 대표는 질병 치료 대신 예측으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창업을 결심했다. 그는 “의사가 사회의 필수인력인 건 맞지만, 사후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로는 인류의 건강수명을 늘릴 수 없다고 느꼈다”며 “의료기술이 질병을 예측하는 경지까지 오르려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정 직업군 고유의 문화에서 꽃 핀 아이디어
특정 직업군 고유의 ‘문화’에서 탄생한 아이디어도 있다. 원루프는 애플리케이션에서 집 주변 업무 공간을 찾고, 시간제로 예약해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흩어진 사무공간을 한눈에 찾아볼 수 있다. 원하는 지역에서 업무 공간을 골라 예약해 이용할 수 있다.
공유 오피스도 운영한다. 카페보다 조용하고, 사무용 좌석과 책상이 구비돼 있다. 일반 독서실과 달리 조용한 대화나 업무상 통화가 가능하다. 직영 오피스인 3곳의 ‘원루프랩’과 수도권 40곳의 제휴 지점에서 사무 공간을 고를 수 있다.
원루프의 양승현 대표는 공인회계사 출신이다. 유명 IT기업이 투자한 스타트업의 감사 업무를 맡으면서 스타트업 생태계를 처음 접했다. 재무제표도 불안정한데 수백억원의 투자금이 모이고, 밤샘 근무를 불사하지 않는 스타트업 구성원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회계사 시절 외근이 잦았던 그는 동기와 책상 하나를 돌아가면서 썼는데 3년 동안 출근이 겹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경험에서 창업 아이템을 떠올렸다. 그는 “외부 미팅 전에는 집에서 업무를 봤고, 외근을 마치면 근처 카페에서 일하는 게 일상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지역에선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난처한 경험도 했다”며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게 된 직장인들이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을 거라 직감했다”고 설명했다.
양 대표는 2019년 공간 제공 사업을 하던 원루프를 인수하고 시간제 업무 공간 임대 사업을 시작했다. 독서실이나 카페와 다르게 조성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소음이 허용되는 라운지 공간, 통화 부스, 회의실, 듀얼 모니터 좌석 등을 필수 조건으로 두고, 프린터기나 다과류 같은 사무실 비품을 마련했다. 그렇게 조성된 원루프의 업무 공간은 프리랜서 개발자나 디자이너, 외근이 잦은 영업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기술창업하기 좋은 제반 여건 갖춘 변리사
전문직 경험이 창업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경우도 있다. 기능성 숙면 유도 기기 ‘슬리피솔’을 개발한 스타트업 리솔의 권구성 대표는 변리사 출신이다.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를 나왔다. 같은 대학에서 전자컴퓨터학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어렸을 적부터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권 대표는 우수 기업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을 하고 싶어 변리사에 도전했다.
변리사 일을 하며 다양한 기술을 만났다. 하나의 기술이 특정 산업군을 주도하는 상황을 보며 창업에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로부터 현재 리솔의 연구소장인 이승우 박사를 소개 받아서 창업을 실천으로 옮기게 됐다. 메디슨을 창업한 이 박사는 초음파 진단 영역의 대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이 박사가 주목한 문제는 ‘수면 부족’이었다. 수면 장애는 만악의 근원이다. 심할 경우 우울증이나 치매를 유발한다. 치료제는 있지만 부작용이 심하다. 몽유병이나 활동 시간 중의 졸음을 유발해 졸음운전 등 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다.
수면의 질을 높여 뇌 건강 전반을 관리할 수 있는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그렇게 기능성 숙면 유도 기기 ‘슬리피솔’을 개발했다. 슬리피솔은 두개전기자극(CES , Cranial Electrotherapy Stimulation)을 이용한 기기다. CES는 신체에 1mA(밀리암페어)보다 적은 양의 미세전류를 두개에 전달해 불안감, 우울증, 스트레스 등의 증상을 완화하는 비약물적 치료법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감소시킨다는 임상 결과도 있다. 치매 지연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저하게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뇌가 미세전류의 자극을 받으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DMN(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된다. DMN은 뇌가 아무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부위로, 이 DMN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편하게 잠을 잘 수 없고 우울감이 생긴다. 만약 미세전류로 뇌를 자극하면 DMN을 유지하면서 수면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슬리피솔은 머리띠 형태로, 이마에 착용하면 된다. 권고 사용 시간은 1일 2회 30분이다. 2주 이상 꾸준히 사용하면 스트레스 완화와 숙면에 도움이 된다.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두 번의 임상시험을 거쳤고, 미국식품의약청(FDA) 안전성 기준을 통과했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와 유럽의 상품규격인증(CE)에서도 안전성을 인증받았다. 미국과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 덕분에 대외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2021년 특허청의 지식재산 경진대회에서 발명진흥회장상과 중소벤처기업부의 K 스타트업 창업리그에서 중소벤처기업부장관상을 받았다. 2022년에는 서울지식지역센터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IP 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됐다.
권 대표는 “슬리피솔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용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일조한 것 같아 뿌듯하다”면서 “아무리 훌륭한 기술을 탑재한 제품이라도, 이용자의 손이 닿지 않는다면 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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