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꿈이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이란 사람들

2025. 3. 13. 17:59인터뷰

문화계의 ‘배리어프리’를
선도하는 스타트업 오롯플래닛

최인혜 오롯플래닛 대표. ©더비비드

청각장애인들이 한국 영화보다는 주로 외국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이들의 취향을 가르는 요소는 바로 ‘자막’입니다. 외국 영화는 자막과 함께 상영되지만 한국 영화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외화를 선택하는 것이죠.

오롯플래닛은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하는 스타트업입니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문화 생활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이들의 취향의 폭을 넓혀주고 있죠. 최근에는 뮤지컬, 연극 같은 공연 자막 서비스도 도입했습니다. 오롯플래닛의 최인혜 대표(28)를 만나 문화 사각지대를 허무는 과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위에서부터) 배리어프리 영상 자막 예시, 뮤지컬 '사의 찬미'에서 공연 자막을 띄운 모습. /오롯플래닛

Q.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오롯플래닛은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배리어프리 자막이란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으로 한글 대사뿐만 아니라 배경음악과 효과음까지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지금까지 드라마, 영화 등 1000편이 넘는 영상 자막을 작업했어요.

최근에는 공연 자막 서비스를 론칭해 ‘사의 찬미’라는 뮤지컬에 자막을 제공하고 있어요. 공연 자막은 화면에 자막을 배치하는 영상 자막과 결이 다릅니다. 자막을 띄워주는 디바이스를 좌석에 설치해야 하죠. 그러면 오퍼레이터가 극의 상황에 맞춰서 자막을 띄워줍니다. 영화처럼 뮤지컬, 연극 같은 극예술도 자막을 보면서 감상할 수 있는 거죠. 청각장애인뿐만 아니라 한국어 극예술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유용합니다.

(위에서부터) 봉사활동자들이 자막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 오롯한상영회 현장. /오롯플래닛

사회공헌 서비스도 운영합니다. 기업 임직원분들의 자막 제작 봉사활동을 지원하는 활동인데요. 이 분들이 제작한 자막으로 영화 상영회도 엽니다.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5분짜리 영상의 자막을 제작하는데 약 3시간이 소요됩니다. 봉사자들을 만든 자막을 다듬는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고요.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 배리어프리의 필요성을 체감하곤 합니다. 개발자, 기획자, 영업 담당자 등 다양한 직군의 분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배리어프리를 실천할 데가 없는지, 스스로 고민하게 하는 효과가 크죠. 지금까지 LG디스플레이, 본 그룹, 세아홀딩스 등 40여개 기업이 저희와 함께 했어요.

Q.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어릴 적부터 뮤지컬을 좋아했어요. 뮤지컬 잡지도 즐겨 읽었죠. 잡지에서 우연히 청각장애인 극단을 알게 됐는데요. 이미 만들어진 공연의 언어를 수어 연기로 풀어낸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이전까지는 장애예술이라는 장르에 국한된 장애예술만 접해왔는데, 기존의 것에 약간의 변주를 줘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그때부터 ‘청각장애인은 뮤지컬을 어떻게 보지?’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뮤지컬, 연극 같은 극예술은 사회 약자를 조명하고, 각종 사회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고 생각했는데요. 공연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비장애인뿐이더라고요. 약자를 위한 예술 마저도 소리를 들을 수 있거나 앞이 보이는 사람만 대상으로 한다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자연스레 장애인 대상의 문화복지와 문화 접근성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오롯플래닛 구성원의 모습. /오롯플래닛

Q. 문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요. 그 수단으로 ‘창업’을 택한 이유를 알고 싶어요.

A.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 소비 방안을 고민하며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는데요. 공공기관 취업 등 전공생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진로로는 문화복지를 실천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길은 동아리 활동에서 찾았어요. 동구밭, 고요한 택시 같은 기업을 배출한 ‘인액터스’라는 임팩트 비즈니스 리더 양성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요. 그곳에서 청각 장애인의 영상 콘텐츠 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 활동을 했어요. 동아리 활동이 창업으로 이어져 2020년 오롯플래닛을 설립했습니다.

Q. 배리어프리 자막은 기존의 자막과 어떻게 다른가요.

A. 사실 일반 자막과 배리어프리 자막의 형식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배리어프리 자막은 영화 개봉, 드라마 방영 시점 후에 제작된다는 시점상의 차이가 있어요.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을 의무화하는 규정이 없거든요. 그래서 같은 영화라도 OTT 플랫폼별로 자막이 조금씩 다릅니다. 개봉 후 각자 만들었기 때문이죠.

배리어프리 자막을 띄운 상영회 현장. /오롯플래닛

Q.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자막 제작 프로세스가 궁금해지네요.

A. 보통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작업에 들어갑니다. 1차로 인공지능(AI)으로 음성 정보를 텍스트로 추출합니다. 그러면 자막 제작자가 1차본을 다듬고 편집해요. 마지막으로 검수자가 제작된 내용을 검수합니다. 검수 작업은 책 교정 작업과 비슷해요. 인물이 겹치지 않는지, 인물명이 동일하지, 사투리가 제대로 사용됐는지 등을 확인하죠. 그렇게 최근 LG유플러스의 OTT에 들어간 콘텐츠 600편의 자막을 제작했어요.

‘AI를 사용하면 자막을 쉽게 만들 수 있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AI에만 의존하면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대사 외의 다른 소리까지 정확하게 표현해야 하니까요. 아직까지는 음성 인식보단 사람의 손길이 중요합니다.

외화와 달리 한국영화 자막은 개봉 이후 제작 논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배리어프리 자막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더비비드

Q. 애로 사항이 많겠어요.

A. 외화와 달리 한국영화 자막은 개봉 이후 제작 논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영화 제작사, 배급사, OTT 등 이해관계자별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제작 의뢰를 받으면 배급사에 먼저 연락을 하는데요. 자막 추가에 대한 권한이 배급사에 없어 제작사에 연락해 작품의 권리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투자사가 많을 경우 이해관계가 더 복잡해지죠. 100편의 의뢰가 들어와도 100편에 대한 권리를 각각 확인해야 해서, 의욕만큼 못 만들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제작사에서 협조하지 않을 경우 대본도 없이 자막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본만 있어도 이 과정이 수월할 텐데 말이죠. 대본 없이 자막을 사후 제작하다 보니 같은 작품의 자막이 OTT 플랫폼별로 조금씩 다른 소모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콘텐츠 제작 시 배리어프리 자막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을 만들어 배포해야 한다는 규정을 둔 미국과 독일의 상황은 달라요. 제작단에서부터 신경 써야 하니 유통 과정에서의 낭비가 훨씬 덜한 구조죠.

배리어프리 자막 작업을 하는 모습. /오롯플래닛

Q. 보통 일이 아닌데요. 하지만 누군가의 취향을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뿌듯할 것 같아요.

A. 맞아요. 그동안 청각장애인분들은 주로 외화를 봤습니다. 한글 자막이 기본으로 제공되니까요. 요즘 젊은 청각장애인 분들은 OTT 한글 자막 서비스를 통해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만, OTT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5~10년 전만해도 한국 콘텐츠를 볼 수 있는 분이 거의 없었어요.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는 ‘고전 명작 드라마’도 청각장애인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2005년대 이전에 개봉했거나 방영한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모르는 청각 장애인들이 정말 많아요. OTT 서비스가 빠른 속도로 성장해, 그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운데요. 최대한 빨리 작업해 청각장애인들이 그동안 못 본 작품들을 어서 보여주고 싶어요.

뮤지컬 '사의 찬미'에서 볼 수 있는 영상 자막. /오롯플래닛

Q. 공연 자막 제작 과정도 궁금해지는데요.

A. 영상 자막과는 달리 공연 자막을 제작할 땐 자막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연습하면서 추가되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어서, 대본을 기반으로 기본 자막을 만든 다음에 제작자가 리허설이나 연습에 참여해야 합니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첨삭 과정을 거쳐야 하죠.

공연 자막은 조명, 음향 담당자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타이밍에 맞춰서 조명을 바꾸고, 음악을 교체하듯이 각 장면의 싱크로율에 맞춰서 수동으로 자막을 구동해야 합니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죠.

Q. LG소셜캠퍼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A. 2022년 12월 소셜캠퍼스에 입주했습니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필요해서 온 건 아니었어요. 동료 입주사와의 교류나 각종 육성 프로그램 등 좋은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 이곳에 왔죠. 게다가 워낙 유명한 프로그램이다보니 이곳에 입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잘 되는 소셜벤처’라는 인식을 누릴 수 있어요. 일종의 후광효과인 셈이죠.

그동안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의 기업이 저희의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했고, LG유플러스와 프로젝트도 진행했는데요. 이렇게 또 LG그룹과 연결고리가 생겨 신기합니다.

공연 자막 서비스를 이용한 중국인 관람객의 후기. /오롯플래닛

Q. 지금까지의 성과가 궁금합니다.

A. 작년 ‘국내 OTT 라이브러리 강화 작업’ 지원사업을 통해 대량으로 자막을 제작했고, 올해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창업도약프로그램 선정돼 공연 자막 제작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매출 규모가 크진 않지만 창업 초기 대비 5배 성장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공연 자막 서비스를 시작한 게 가장 큰 성과로 느껴집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품었던 꿈을 이뤘으니까요. 사회 문화적인 의미도 큽니다. 외국어 자막도 제공할 수 있으니 외국인에게 한국의 극예술을 소개하는 징검다리로 활용할 수 있거든요. 장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공연 접근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봤는지, 한국관광공사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각지대를 찾아내 배리어프리를 실천하겠다는 최인혜 대표. /더비비드

Q. 오롯플래닛이 그리고 싶은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A. 끊임없이 공백과 사각지대를 찾아내 배리어프리를 실천하고 싶어요. 오랜 기간 영상 자막을 만들다가 공연 자막으로 옮긴 이유는, 어느 정도 물꼬가 트였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희를 시작으로 이제 많은 기업이 배리어프리 영상 자막을 만들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불모지인 공연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죠.

이제 공연 분야에서 배리어프리라는 화두를 제시하고, 물꼬를 트면 잘하는 곳이 시장에 진입해서 이 생태계가 확장하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계속해서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기회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