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칼라를 위한 에이전시

2016년 알파고 쇼크가 세상을 휩쓴 지 10년도 안된 지금, 인공지능(AI)이 다양한 산업에 도입됐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블루칼라다. 가전 설치 및 보수, 가구 설치 등의 영역은 사람의 물리력을 요구한다. 스타트업 마이스터즈의 천홍준(37) 대표는 산업 현장에서 AS 시장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빠르게 창업했다.
환기구 설치·수리 기업으로 출발한 마이스터즈는 수리기사 전용 전산 시스템을 개발하고, 여기에 AI를 접목해 ‘블루칼라 에이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천 대표를 만나 블루칼라 시장에 AI에 접목하면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들었다.
◇생계형 노동으로 점철된 20대

천 대표의 20대는 노동으로 점철됐다. 3형제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일찍 산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타향살이가 버거울 정도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당장 돈 벌 궁리에 몰두했다. 조선소 직원, 토목기사, 주방 설거지 아르바이트 등 해본 일만 서른가지가 넘는다. 방송사 드라마국 FD로도 일했다. 하루에 3시간만 자고 출근하는 일과를 3년 반 버텼다.
미래를 위해 자격증 공부라도 하고 싶었지만 사치였다. 생활고를 공기처럼 껴안던 삶이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자격증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공고를 보고 한 비데 제조사의 AS부서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엔지니어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입사 후 한달만에 사수가 퇴사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기도 전에 현장에 투입됐어요. 어디 넋두리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제품을 분해하고 전원을 연결해서, 스위치를 일일이 눌러본 다음 이에 상응하는 부품을 확인하는 식으로 독학했습니다. 전기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종종 감전 당하기도 했어요.”
남들이었으면 도망쳤을 일터였지만, 그에게는 귀하디 귀한 일자리였다. 이후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등 다양한 가전의 엔지니어로 10년 이상 근무했다. “연차가 차면서 관리자의 몫도 수행했습니다.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입사한 엔지니어들을 교육하고, CS 제도를 알려줬죠. 업력이 쌓이니 이 시장의 큰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몰랐던 블루칼라 시장의 잠재력에 주목

배달의 민족을 필두로 각 산업군에서 플랫폼 서비스가 꽃필 무렵, 자신이 몸담은 업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지의 영역이었던 배달업이 양지로 넘어와서 성장하는 걸 보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AS 엔지니어 시장도 비슷했어요. 업체별로 파편화돼있고, 이해관계 문제로 대기업이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1등 가전 기업이 AS 시장을 통합하면 경쟁사 제품까지 관리해야 하니까요. 달리 보면, 기존의 플레이어가 아닌 제3자가 진입하기 좋은 시장이었습니다.”
‘AS 시장 통합’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그만큼 뛰어들 가치가 있었다. “건설 시장은 이미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유입된 상황이었습니다. 집 앞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명 비대면 시장도 고도화된 상태였죠. 하지만 사람을 집에 들여야 하는 ‘집 안’ 서비스는 얘기가 다릅니다.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신원이 불확실한 외국인 엔지니어를 집에 들이는 걸 꺼립니다. 게다가 가전의 설치, 유지 및 보수는 생활에 꼭 필요한 영역이죠. 블루칼라 시장의 대체불가능한 속성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환기구 설치 및 수리점으로 출발

2019년 2월 마이스터즈 법인을 설립했다. 멋진 청사진이 머릿속에 있었지만 당장 실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현장 경험을 살려 성장의 씨앗이 될 자금부터 마련하기로 했다. AS 시장에서 가장 외면 받던 환풍기 설치 및 수리 대리점으로 출발했다. 빌트인 제품은 수리 요청을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고질적 불편점에 주목한 것이다.
일감을 확보하는데 정도는 없었다. 헝그리 정신을 발휘했다. “환풍기를 팔기 위해서 전단지를 돌리고 다녔습니다. 비가 오는 날엔 전단지가 젖을 까봐 옷 안에 종이 뭉치를 넣고 다니다 피부가 쓸렸어요. 새벽 4시까지 전단지를 돌린 후, 아침에 거래처를 찾아다녔습니다. 첫 거래처에 일주일에 네번씩 찾아갔는데요. 30대 초반 청년이 '잘 할 자신도 있고 책임도 질 테니까 일만 맡겨달라'는 모습이 신선했나 봅니다. 그 회사 임원분이 제 손을 잡고 지인을 소개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주는 족족 받았다. 거리도, 기름값도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1대, 2대, 10대 환풍기 설치 대수를 늘려갔다. 2023년에만 4만대의 환풍기와 후드를 설치했다. “빨리 돈을 모으고 싶어서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첫 1년 반 동안은 직원들 월급을 주느라 제 월급은 안 챙겼습니다. 다행히 운이 따라줬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재택근무자가 많아지면서 빌트인 가전 설치 및 관리 수요가 늘었거든요. 차차 취급 가전의 종류를 늘리고, 가구 설치와 인테리어 분야까지 비즈니스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AS 현장에 AI가 필요한 진짜 이유

마이스터즈는 이내 전국 25곳의 대리점에서 130명의 엔지니어 거느리는 규모로 성장했다. '기술자들'이라는 설치, AS 전문 브랜드도 론칭했다. 이제는 블루칼라 특화 에이전시로 구색을 갖출 차례였다. 수많은 수리 업체를 통합하려면 유인책이 필요했다. 일을 주는 기업과 엔지니어가 엑셀이나 메신저로 접수 건을 정리하고 소통하는 번거로움에 착안해, 블루칼라 특화 전산 시스템을 개발했다.
전략은 통했다. 유명 상거래 플랫폼부터 작은 수리 기업까지, 300곳의 기업이 마이스터즈의 문을 두드렸다. 협력사와 연결된 1000명의 엔지니어까지 마이스터즈의 관리 대상이 됐다. “가전을 만들거나 유통하는 분들에게 AS는 숙명인데요. 설치나 수리가 잘 됐는지, 접수된 불편 사항은 없는지 관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희와 계약해서 전산 시스템을 사용하면 아주 작은 기업도 일을 쉽게 맡길 수 있어요. 디지털화를 발판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다음 단계는 AI 도입이다. 불필요한 절차를 없애야 규모의 경제에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AI 비서가 클라이언트사, 현장의 엔지니어, AS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 3자간의 원활한 소통을 돕는 개념입니다. 일종의 B2B2C(기업-기업-소비자) 사업 모델이죠. 내부적으로는 ‘엔지니어의 모듈화’라고 부릅니다. AI가 수리 접수, 일정 조율, 방문 전 연락, 작업 중 주의사항 고지, 사후 관리 등과 관련된 소통을 대신해주는데요. 이 모델로 한 아파트 어플리케이션(앱)과 시장검증도 진행했습니다. 결과가 좋아서 메이저 숙박 예약 플랫폼과 1등 아파트 앱과 협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AI는 불미스러운 마찰을 없애는데도 도움이 된다. “TV 타공 설치 상황을 가정할게요.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서비스 유형을 선택하면 소비자에게 알림이 갑니다. 소음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아이나 애견이 있다면 다른 방으로 이동하라고요. 추가 비용 발생 시 엔지니어는 불편한 사항을 직접 말할 필요가 없어요. 동의서가 문자로 갔으니 확인해달라는 부탁만 하면 되죠. 작업 퀄리티가 떨어지거나 기물 파손 발생 시 저희가 책임집니다. 해당 엔지니어에겐 불편 사항에 비례해 페널티가 부과되고요. 엔지니어는 단계별 의무 이행 상황에 체크했기 때문에 페널티를 받아도 우길 수가 없습니다. 모든 내역이 히스토리로 기록되니까요.”

AI의 개입은 시장의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효용을 안겨준다. “외부인을 집에 들이는 소비자 입장에선 엔지니어의 작은 말과 행동이 위협 요소가 될 수가 있는데요. AI가 변수를 통제하고, 사후 관리까지 해주니 안심하고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엔지니어도 AI의 덕을 봅니다. 대다수의 엔지니어들이 소비자와의 소통을 가장 큰 고충으로 꼽는데요. AI가 번거로운 일을 대신해주니까 본업에 집중할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일감을 처리할 수 있죠. 그래서인지 요즘 2030대 엔지니어의 유입이 늘었습니다. ‘노력한 만큼 벌 수 있다’는 인식 덕분인 것 같아요.”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다

선투자 후개발로 압축되는 타 스타트업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현장을 누비며 자생력부터 키우고, 시장의 진짜 문제를 파악한 다음 에이전시로서의 구색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맷집과 비즈니스 실현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한 덕에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술보증기금, 티인베스트먼트, 인포뱅크, 수이제네리스, IBK 기업은행 등 총 6곳에서 투자를 유치했다.
IBK창공 구로 12기, 은행권청년재단(디캠프)가 스타트업 투자와 육성을 위해 새롭게 도입한 ‘디캠프 배치’ 1기 등 굵직한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도 선정됐다. AI 도입과 더불어 매출도 폭증했다. 2023년 매출 47억원에서, 2024년 매출 135억원을 기록했다. 1년 새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국내 1위 건설사와 유명 인테리어 커머스 기업과 협업 방안을 모색 중이다.

해외 진출도 앞두고 있다. “올해 대만, 일본, 베트남에 진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 기회를 글로벌 무대 확장의 디딤돌로 삼을 생각입니다. 저희의 최종 목표는 미국 시장입니다. 미국의 블루칼라 서비스 시장 규모는 2000조입니다. 어마어마하죠. 큰 꿈인만큼 국내에서부터 기틀을 단단하게 닦아 둬야 합니다. 현재의 B2B2C 포트폴리오를 쌓아서, B2C로 넘어가야 한다는 과제도 있고요.”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다는 말을 좋아한다. “지난 20대를 돌아보면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습니다. 요령이 없었을 뿐, 매 순간 최선을 다했어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살 만했을 텐데, 너무 밑바닥 인생이 아닌가 싶어 하늘을 원망하고,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정말 행복합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은 기분이었어요. 더 높은 꿈을 꿀 마음의 여유도 생겼고요. 저는 아직 피라미드의 1층을 넓게 쌓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뭔가를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가 궁금하고, 기다려집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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