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발 볼륨감을 살려주는
탈모샴푸 개발기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명절이었다. 어머니가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에 한 염색이 화근이었다. 염색약의 독한 화학 성분이 노모의 여린 두피를 따갑게 공격하고 있던 것.
그 순간 아들의 머리에 한 단어가 스쳤다. ‘폴리페놀’(Polyphenol). 아들은 2000년대 중반, 홍합에 붙은 폴리페놀의 역학을 측정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과학자다. 문득 폴리페놀이 곤충이 상처를 자가치유를 거듭하면서 색이 짙어지는데 관여하는 성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나나 껍질과 사과의 갈변도 폴리페놀과 관련 있다. 곧바로 폴리페놀을 활용해 흰머리나 새치 머리를 어둡게 만드는 발색 샴푸를 만들었다. 상품화했더니 사재기 논란을 빚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첫번째 발명품과 원치 않은 이별을 겪었다. 연구는 잘했지만, 잇속을 챙기는덴 미숙했던 탓이다. 다행히 세상은 여전히 그의 편이었다. 발색 샴푸 시절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이들이 다시 그를 찾았다. 이들이 폴리페놀의 특성에 착안해 탈모 샴푸 ‘그래비티’는 품절 대란의 주역이 됐다. 과학자에서 탈모 샴푸의 왕이 된 폴리페놀팩토리의 이해신 대표(52)를 만났다.
◇홈쇼핑 완판 행진의 주인공 ‘카이스트 샴푸’

2023년 설립한 폴리페놀팩토리는 카이스트 교원 창업 기업 최초의 뷰티 회사다. 강한 파도에도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홍합의 접착력을 연구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카이스트의 이해신 교수가 이곳을 이끌고 있다.
폴리페놀팩토리는 폴리페놀의 접착력을 응용해 여러 생활 제품을 만든다. 대표 제품은 탈모 샴푸 ‘그래비티’다. 그래비티로 머리를 감으면 힘없고 가느다란 모발에 볼륨이 생긴다. 볼륨감이 빈약한 부분을 가려 숱이 많아 보일 수 있다. 최대 48시간 볼륨이 유지된다. 비바람에도 끄덕 없다. 그래비티로 머리를 감고 살짝 물기가 있을 때 모양을 잡아주면 된다.

핵심 원료는 독자 개발한 ‘리프트맥스308’이다. 원료 속 폴리페놀 분자가 머리카락의 단백질에 부착해 일시적으로 머리카락을 단단하게 해준다. 폴리페놀이 얇은 머리카락과 두피의 틈을 메워 모발을 탄탄하게 잡아준다. 여기에 3종의 탈모 기능성 성분과 두피 영양에 좋은 비오틴을 더했다. 모공을 막는 실리콘이나 모발을 더 건조하게 만드는 성분은 배제했다.
지난 4월 론칭한 그래비티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주요 온라인몰은 물론 현대백화점과 롯데홈쇼핑에 입점해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올리브영, 시코르,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 유명 유통 채널 입점을 앞두고 있다. 짧은 머리용 ‘엑스트라 스트롱’과 긴 머리용 ‘스트롱’ 2종이 있다.
◇홍합이 거센 파도에도 떨어지지 않는 이유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93학번이다. 공부 머리는 좋았지만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수해서 카이스트에 들어갔어요. 어릴 적부터 괴짜 기질이 있었어요. 남들 다 하는 걸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았죠. 교내 밴드 동아리 활동에 몰두했어요. 시험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학점이 좋지 않았습니다. 모교인 카이스트 대학원 시험에서도 낙방했죠.”
광주과학기술원(GIST)에 들어갔지만 1년 만에 중퇴했다. 미국 유학이라는 새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았습니다. 이때부터 생체 재료 및 약물 전달 분야를 집중 연구했습니다. 2002년부터 20003년까지 미국 시카고대 생화학과 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2008년부터 1년간은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했는데요. 당시 코로나 백신 개발사 모더나의 창업자로 유명한 로버트 랭거 교수의 랩실에 있었습니다.”

그의 전문 영역은 ‘폴리페놀’이다. 폴리페놀은 식물에서 발견되는 페놀화합물의 일종으로, 식물을 자외선, 활성 산호, 포식자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약물 전달학을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폴리페놀에 관심이 생겼어요. 원하는 성분을 원하는 부위에 전달하는 게 효율적이잖아요. 단백질과 잘 붙는 폴리페놀의 성질에 주목했습니다. 폴리페놀을 생체 접착제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폴리페놀의 접착력에 대한 그의 집념은 그를 유망한 과학자로 만들어줬다. “2007년 바닷가 바위에 붙어있는 홍합의 접착력이 폴리페놀 덕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의 표지 논문으로 발표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누적 인용 횟수만 1만 회 건이 넘어요. 그다음 발표한 홍합 관련 논문은 사이언스지에 게재됐죠. 이후 카이스트 화학과에서 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교수가 돼 모교로 돌아갈 수 있었죠.”
◇샴푸에 폴리페놀을 적용한다면

커리어의 은인인 폴리페놀에 샴푸를 결합한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사고처럼 찾아왔다. “명절에 고향 집에 내려갔더니 어머니가 ‘두피가 아파 죽겠다’ 하더라고요. 염색약이 화근이었어요. 명절에 시간이 많잖아요. 문득 폴리페놀이 산소와 만나면 갈변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게다가 접착력이 좋고요. 이런 폴리페놀의 특성을 활용하면 모발에 착 달라붙어 머리카락의 색상을 바꿔주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런 제품이 있다면 피부에 좋지 않은 염색을 할 필요가 없겠죠.”
여러 시행착오 끝에 갈변 샴푸를 개발했다. 출시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첫 작품과의 인연은 짧았다. “기술 사용료 지급을 두고 업체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사건은 잘 마무리됐고, 이제는 원천 기술을 제공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은 그곳과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요. 이 과정에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쉽기도 했어요. 과학 지식을 일상에 접목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거든요.”
◇인조 속눈썹 붙이고 강단에 선 교수님

다시 창업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갈변 샴푸 회사의 임직원 세 분이 절 찾아왔어요. 폴리페놀로 신제품을 함께 만들자고 설득하더군요. 수도권에서 제가 있는 대전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했어요. 이렇게까지 저를 믿어주는데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2023년 8월, ‘폴리페놀팩토리’ 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이번에는 폴리페놀의 특성을 살려 머리카락의 볼륨감을 높이는 탈모 샴푸를 개발하기로 했다. “탈모에 시달리는 분들은 머리카락이 얇은 경우가 많은데요. 두피의 유분은 피하고 단백질에만 달라붙는 폴리페놀이 두피의 모공과 얇아진 모발 사이의 틈을 채워,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 막아줍니다. 동시에 특허물질 '리프트맥스 380'이 모발 내 단백질과 결합하면서 축 처진 모발에 폴리페놀 보호막을 입혀줍니다. 보호막이 머리카락에 힘을 부여해 풍성한 느낌을 연출하죠.”

폴리페놀팩토리에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 직원이 실험자가 된다. 실험실은 그들의 집과 몸이다. “적합한 폴리페놀 함량을 찾기 위해서 수없이 테스트를 했습니다. 전 직원이 하루에 머리를 4~5번 감기 일쑤였죠. 두피를 반으로 나눠, 한 쪽은 저희 제품으로 씻고 다른 한쪽은 타사 제품으로 세정해 경과를 살피기도 했어요. 머리 한쪽은 붕 떠있고 다른 한쪽은 착 가라앉은 이상한 몰골로 카이스트를 누볐죠. 매일 자정이면 ‘임상 단체 대화방’에 그 시점의 머리카락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이 올라옵니다. 속눈썹 접착제를 연구할 땐 속눈썹을 붙이고 강단에 섰습니다.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인 회사 임원도 속눈썹 테스트에 가담했죠. 과학자가 샴푸에 미치면 이러는 건가 싶었습니다.”
◇샴푸만 했을 뿐인데 머리숱이 많아 보인다

지난 4월 폴리페놀을 활용한 탈모 샴푸 ‘그래비티’ 시리즈를 출시했다.
특정 부위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국지적인 탈모보다는 모발 전반이 얇아지고 힘없이 처지는 노화성 탈모에 적합한 제품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은 후 볼륨이 40% 이상 살아나고 48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효과는 확실한데요. 제대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용도별로 샴푸 사용법을 소개해요. 머리카락 빠지는 걸 막고 싶은 분은 두피를 위주로 샴푸칠을 하세요. 스타일링 용도로 쓰고 싶다면 두피보다는 머리카락에 발라서 볼륨감을 만들어내면 됩니다.”
폴리페놀의 적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제품을 준비 중입니다. 속눈썹 접착제, 착색이 되는 탈모방지 에센스, 곱슬머리를 펴주는 샴푸, 머리카락 색상을 밝게 만들어주는 톤업 샴푸 등이 차기작 후보죠. 궁극적으로는 모낭 없이 모발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려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거든요. 건강한 머리카락을 폴리페놀로 붙이는 방식인데요. 기존의 모낭 이식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소비자들의 러브레터를 받고 알았다. 탈모가 큰 아픔이 빚은 상흔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장문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래비티 덕분에 평생의 고민이 해결됐다고 좋아하는 분도 있었죠. 유전질환으로 머리 숱이 적어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분의 편지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고안한 모발이식 기술이 꼭 개발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진심이 묻어나서 눈물이 났어요. 탈모 환자의 범주는 넓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은 후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분도 많죠. 노화나 병환으로 탈모를 겪은 분들에게도 나를 가꾸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어요.”
신약 개발에 헌신하는 여느 화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중이다. 이 대표는 이 길도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화학자가 의료가 아닌 생활용품으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이 기쁨이 됩니다. 제가 잘 아는 폴리페놀을 활용해서 최대한 많은 생활용품을 만들고 싶어요. 약 개발도 가치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과학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게 제 가치관에 더 부합하는 것 같아요. 폴리페놀팩토리의 모토는 ‘일상의 혁신’입니다. 탈모 샴푸의 효능에 의문을 제기했던 분들도 그래비티를 사용한 후 ‘이게 되는구나’란 반응을 보였는데요. 앞으로도 과학적 지식이 일상의 효용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선사하겠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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