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 ‘어뎁션’ 정덕희 대표
‘문과가 디자인한 멀티탭’이라는 게시글이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했다. 가로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내 어댑터끼리의 충돌을 방지한 디자인이었다. 참신한 아이디어처럼 보였지만 댓글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극과 -극을 적절히 배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머지않아 이 문제는 해결됐다. +극과 -극을 대각선으로 배치하면 어느 방향으로 꽂아도 연결되도록 할 수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야말로 문·이과 대화합의 현장이었다.
이 논란의 과정을 흐뭇하게 바라본 이가 있다. 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 어뎁션 정덕희 대표(49)다. 삼성전자·딜라이브 등 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탱그램 디자인 연구소를 창업해 카카오에 매각한 이력이 있다. ‘K-디자인 어워드 2024’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현재 그의 관심사는 의외로 ‘기술’에 있다. 문·이과생이 머리를 맞대듯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힘을 모아 세상에 없던 제품을 만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띠처럼 착용하는 숙면 유도 기기
정 대표의 손이 닿은 제품 중 하나는 헬스케어 스타트업 리솔이 개발한 숙면 유도 기기 '슬리피솔'이다. 슬리피솔은 오리지널, 플러스, 라이트로 나뉜다. 오리지널은 제일 처음 나온 제품이고 플러스는 리솔의 특허 기술인 CS-tACS(뇌파 동조) 기능을 업그레이드한 제품이다. 라이트는 충전 없이 약 500회 사용할 수 있다. 모두 머리띠 형태로 이마에 착용해 사용한다.
뇌파 동조 기술은 심장 충격기를 빗대 설명할 수 있다. 심장충격기로 심장에 충격을 주면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처럼 뇌에도 우리가 원하는 동작이 가해지도록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이다. 슬리피솔은 깊은 잠이 들기 전의 뇌파, 집중할 때의 뇌파 등과 비슷한 미세 전류를 흘려보내 사용자의 충분한 휴식·집중을 돕는다. 서울대학교 분당병원에서 두개 전기 자극의 불면 자극 효과에 대한 임상 연구를 마쳤고, 관련 내용으로 SCI급 국제학술지에 논문도 게재했다.
◇카카오에 회사를 매각하기까지
세종대 산업디자인학과 94학번이다. “어릴 적 꿈은 건축가였어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죠. 가정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예술로 돈을 버는 건 어렵다는 걸 일찍 깨달았어요.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도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는 길은 ‘디자인’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렴풋이 자동차, 전자제품 같은 제품을 디자인하는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어요.”
상상은 곧 현실이 됐다. 2001년 알티캐스트에 입사해 디지털 방송의 TV 화면 UI(사용자 환경) 설계와 디자인을 담당했다. “전국적으로 옥상에 접시가 하나씩 설치되던 시절이었어요. 스카이라이프를 필두로 위성 방송이 널리 퍼졌는데요. 일방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던 TV에서 한 발 나아가 양방향 소통을 하는 방법으로 ‘색깔 버튼’을 고안했습니다. 가령 방송 화면에 나오는 제품을 구매하고 싶을 때 빨간 버튼을 누르면 구매 화면으로 전환되는 식이죠. 특허로 등록돼 현재까지도 IPTV에서 흔히 쓰이는 기능이자 디자인입니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몇 차례의 이직을 겪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창업’의 불씨를 키웠어요. 덕분에 34살의 나이에 ‘탱그램 디자인 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엔 소프트웨어 기획이나 디자인 컨설팅을 주력으로 하다가 2010년부터 자사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어요. 전자 회로가 들어간 줄넘기 ‘스마트 로프’를 개발해 해외 수출길을 열기도 했죠.”
시간에 쫓기듯 일에 매달렸다. 1년 중 365일을, 하루 중 20시간 이상을 일에 쏟았다. “딱 10년을 그렇게 살았더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창업을 한 건데, ‘나’는 없고 ‘일’만 남은 것 같았죠. 마침 카카오의 인수합병 제안을 받아 매각을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2017년 탱그램(현 탱그램 팩토리)과 이별했습니다.”
간만에 찾아온 공백기에 생각이 깊어졌다. “스스로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답은 정해져 있더군요. ‘디자인’이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술력이 뛰어난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디자인 컨설팅을 하며 제품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일을 하기로 했죠.”
◇디자인 컨설팅 회사가 일하는 법
2018년 1월 디자인 컨설팅 기업 ‘어뎁션’을 설립했다. “탱그램에서는 직원이 60~70명 정도였는데요. 어뎁션은 6~7명을 넘어서지 않는 규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여러 프로젝트를 맡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봤어요. 하나를 디자인하더라도 매 단계마다 깊이 있는 고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4~5곳의 주 고객사가 4년 이상 함께 협업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의 큰 자부심입니다. 디자인 업계에선 보통 3개월 내외의 단기 프로젝트가 많은 편이거든요.”
기능성 수면 관리 기기 ‘슬리피솔’을 개발한 ‘리솔’도 그중 하나다. “2020년 지인을 통해 인연을 맺었어요. 리솔이 가진 주요 기술인 ‘두개 전기 자극(CES)’이 그야말로 ‘적정기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정기술은 말 그대로 너무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기술로 사람들의 삶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하는데요. 스트레스가 범벅된 요즘 사회에 꼭 필요하면서도 현실성 있는 기술처럼 보였어요. 무엇보다 메디슨 출신 이승우 박사가 연구소장이라는 점이 신뢰도를 높였죠.”
좋은 기술에 좋은 디자인을 더할 차례였다. “첫 미팅 이후 숙제를 받은 아이처럼 공부했습니다. CES는 1㎃(밀리암페어)보다 적은 양의 미세전류를 머리에 전달해 불안감, 스트레스 등의 증상 완화를 돕는 비약물적 치료법인데요. 최신 연구 결과나 작용 원리에 대해 공부한 다음 리솔 측과 의견을 나눴습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힌트나 아이디어들을 모았어요. 키워드 중심으로 넓게 펼친 다음 비슷한 것끼리 묶어 몇 개의 안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충분한 밀고 당기기가 필요하다. “고객사의 말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야 할 때도 있어요. 충전 없이 사용하는 ‘슬리피솔 라이트’를 개발할 때 온·오프(on·off) 버튼을 터치형에서 밀고 당기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주 타깃층인 시니어 세대가 가장 편하고 익숙하게 느끼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끊임없는 토론이 제품의 완성도를 더 높여준다고 믿어요.”
정 대표가 말하는 디자인의 원천은 ‘책’에 있다. “후배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잔소리죠. 한 권 제대로 읽으려고 하면 오히려 책과 멀어지기 쉬워요. 끌리는 책을 5권이고 10권이고 양껏 산 다음 생활반경 곳곳에 둡니다. 책이 눈에 보일 때 1~2쪽을 읽으면 기억에 남는 문장이 하나쯤은 있어요. 그때 책을 덮고 잠깐 생각에 잠깁니다. 그 내용에 대한 지난 경험을 돌아볼 때도 있고, 그 내용 자체를 곱씹을 때도 있고, 그냥 멍 때릴 때도 있어요. 이렇게 딱 10분이면 됩니다. 이런 사유의 힘이 근육처럼 강해져서 밀도 있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냅니다.”
◇CES 기술로 받은 CES 혁신상
이과생의 기술과 문과생의 디자인이 만나 ‘슬리피솔’이 탄생했다. 리솔은 4년간 슬리피솔 오리지널, 슬리피솔 플러스, 슬리피솔 라이트까지 차례로 출시했다. 슬리피솔 라이트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25 혁신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CES 혁신상은 세계를 선도할 혁신 기술과 제품에 수여하는 상으로 ‘최고의 영예로 불린다.
기쁨에 취해 있을 새도 없이 차기작 준비에 한창이다. “슬리피솔 오리지널을 한층 업그레이드 한 1.5세대 모델을 준비하고 있어요. 미세 전류가 흐르는 ‘본체’와 이마에 착용하기 위한 ‘밴드’를 분리하려고 합니다. 본체 패드를 넓게 만들어 미세 전류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밴드를 취향껏 교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내년 상반기 출시가 목표예요. 그때까지 또 한 번 리솔과 끈질긴 줄다리기를 벌여야겠죠.”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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