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만코리아 유주희 대표
나만의 아이디어로 창업을 꿈꾸는 여러분에게 견본이 될 ‘창업 노트 훔쳐보기’를 연재합니다.
마흔이 되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표정을 자주 지었는지가 얼굴에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가령 팔자 주름이 깊으면 엎드려 자거나 턱을 괴는 습관이 있다는 뜻이고, 미간 주름이 깊으면 그만큼 인상을 자주 썼다는 뜻이다.
환갑이 넘은 보만코리아 유주희 대표(62)는 눈가에 잔주름이 많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울고 웃는 사이 깊어진 삶의 자국이다. 주름을 펴기 위한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2016년 핸디형 스팀다리미를 개발해 100만대 이상 판매한 이력이 있다. 유 대표를 만나 주름과 벌인 사투에 대해 들었다.
◇5가지 모드 바꿀 수 있는 다리미, 스팀박스
보만코리아 스팀박스는 가정용 스팀다리미다. 로봇청소기 같은 몸체에 다리미판, 물통, 전원 플러그까지 모두 들어간다. 물통은 600mL로 셔츠 7장을 한 번에 다릴 수 있는 양이다. 물통에 장착된 레진 필터는 석회질, 철분 등 미세 이물질을 걸러준다. 삼각형 구조의 헤드에는 9개의 스팀 분사구가 있다. 단추 사이의 좁은 공간도 정교하게 다릴 수 있다.
옷 소재에 따라 5가지 모드를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다. 실크·나일론·모직·면·린넨 등 모드를 변경하면 해당하는 아이콘에 불빛이 들어온다. 스팀박스의 또 다른 특징은 스팀량이다. 옷 가게에서 쓰는 매장용 스팀다리미의 출력이 약 2000W(와트) 내외인데, 스팀박스는 최대 2180W의 출력으로 스팀을 내뿜는다. 현재 온라인몰에서 한정 공동구매 행사를 하고 있다.
◇서른여덟에 들은 ‘사장님’ 소리
1970~1980년대의 공업고등학교는 지금과 아주 달랐다. “정부에서 중화학공업을 활성화하겠다며 공고를 많이 육성했어요. 저 역시 공고에 진학해 전자과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공고 갔다고 하면 ‘공부 잘했구나’ 소리도 들을 수 있었죠. 입대 후엔 방송통신대학 전산학과에서 학업과 군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제대 후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직원 3명에 서울대 출신 사장님이 운영하는 ‘정신전자’라는 회사였어요.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전자 컨트롤러를 개발해서 납품하는 곳이었습니다. PCB(인쇄 회로 기판)를 개발할 사람을 찾는다기에 덥석 그 손을 잡았죠. 공장 부지를 선정하고, 직원을 뽑는 등 시스템부터 갖춰나갔습니다. 첫 월급으로 22만원을 받았어요. 당시 대기업 초봉이 18만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적지 않은 수준이었죠.”
그 후로 십수년간 일에 파묻혀 살았다. 그 덕분일까. 38살이란 나이에 사장직에 올랐다. “가족에겐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1992년 사세 확장을 위해 연고도 없는 전라도 광주에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밤 12시 넘어 퇴근하고, 좀 일찍 들어가는 날엔 직원들까지 데려가 밥을 먹였어요. 그때 아내 속을 참 많이 썩였습니다.”
도전도 서슴지 않았다. “2000년 프랑크푸르트 전자박람회에서 독일 가전 브랜드 ‘보만’ 제품을 처음 봤는데요. 지금껏 본 적 없는 디자인에 성능도 우수해 보였죠. 그 길로 한국에 돌아가 국내 유통을 추진했습니다. 야외용 바비큐 전기 그릴, 커피 머신 등을 들여왔지만 결과는 ‘실패’였어요. 제품의 크기나 사용 환경 등이 국내 사정과 맞지 않은 탓이었죠.”
실패의 경험은 하나의 씨앗이 됐다. “보만 수입 이후로 사내에 유통이나 자체 개발 상품을 다루는 부서를 만들었어요. 국내 최초로 초음파 세척기를 만들어 홈쇼핑에 나갔고 자동차에 붙이는 핸즈프리 카폰을 개발해 100만개 넘게 판매하기도 했죠. 나름 실적이 있었지만 회사에선 이 분야를 비중 있게 다룰 수 없었어요. 대기업에 납품할 일감이 밀려있었기 때문이죠.”
◇스팀박스 개발 노트
2016년 계열을 분리해 ‘보만코리아’를 설립했다.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보만’을 다시 적극적으로 키워보기로 했다. 지난 실패를 발판 삼아 국내용 제품을 직접 개발했다. 우리나라 주부들이 사용하기 좋게끔 크기를 줄이되, 성능은 절대 떨어져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첫 제품으로 핸디형 스팀다리미에 도전했다.
1. 100만대 판매한 스팀다리미
보만 독일 본사와 거래하는 중국 공장을 찾아갔다. “먼저 한국 성인 여성이 한 손에 쥐어도 부담 없을 만한 크기를 주문하고 샘플을 받아봤습니다. 크기는 둘째치고 성능이 기대 이하였어요. 히터가 물을 끓이면 펌프가 압력을 주면서 스팀이 나오는 방식인데요. 펌프의 압력이 들쭉날쭉해서 뜨거운 물이 새거나 스팀이 잘 나오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인은 품질관리(QC)에 있었다. “중국 공장에 머물면서 작업 과정을 하나씩 직접 점검했습니다.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데도 처음엔 거부감을 보이더군요. 다른 나라에선 이렇게 만들어도 잘만 쓰는데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는 거였죠. 긴말 없이 ‘우리는 다르다’고 하며 작업 지도서를 썼습니다. 이 라인부터 저 라인까지의 과정은 어떻게 검사하는지 꼼꼼히 확인했고, 내구성 시험 결과는 시한을 정해놓고 제출하도록 재촉했어요.”
2016년 보만코리아 첫 개발 제품인 핸디형 스팀다리미(DB8230)를 출시했다. “지금까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100만대 이상 판매했죠. 공을 들인 만큼 소비자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정말 뿌듯합니다. 아직까지 ‘가성비 핸디형 스팀다리미’를 검색하면 가장 위에 떠요.”
2. 하나의 차이가 혁신을 만든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스팀다리미에는 ‘모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판으로 된 다리미는 옷감에 따라 온도를 바꿔가며 사용하죠. 스팀다리미도 스팀량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세우고 신제품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시장 조사를 하다 보니 강원도 몇몇 지역에서 수돗물에 석회가 검출돼 스팀다리미 사용에 지장이 있다는 후기가 있더군요. 물통에서부터 물의 이물질을 걸러줄 필터도 추가하기로 했죠.” 현재 온라인몰에서 한정 공동구매 행사를 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때 기존 다리미가 아닌 세탁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일반 다리미는 다이얼 방식으로 모드를 변경하죠. 그보다 더 직관적이길 바랐어요. 직장생활을 할 때 세탁기 내부의 컨트롤러를 다뤘던 게 생각났습니다. 세탁기에서처럼 제품 전면에 5가지 모드를 아이콘과 함께 표시했어요. 모드를 변경할 때마다 펌프의 출력량이 달라지도록 했습니다. 이를테면 실크는 분당 20g, 린넨은 분당 40g씩 스팀이 나오도록 했어요.”
3. 제품명은 기왕이면 ‘고유 명사’로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사내 콘테스트를 열었다. 제품명을 정하기 위해서다. “고유 명사여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었어요.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우리 제품만 보여야 하기 때문이죠. 게임 박스에서 착안한 이름 ‘스팀박스’로 최종 제품명이 결정됐습니다. 여전히 스팀박스라고 불리는 건 우리 제품뿐입니다.”
2022년 3월 스팀박스를 정식 출시했다. “출시 초기에 제품을 알리는 데 힘을 많이 쏟았습니다. 아무래도 색다른 제품이다 보니 소비자가 낯설게 느낄 테니까요. 펀딩이나 SNS 공동구매를 통해 스팀박스를 써본 소비자에게 중요한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디자인, 사용성에선 칭찬 일색이었지만 호수의 길이 등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있었어요.”
4. 하나를 바꾸면 열을 바꿔야 한다
소비자의 피드백을 반영해 호스의 길이를 10㎝ 더 늘였다. 그러자 뜻하지 않은 문제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호스의 길이를 늘였을 뿐인데 스팀량이 전보다 줄었습니다. 늘어난 호수의 길이만큼 스팀이 도중에 식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겁니다. 출력량을 더 높여 문제를 개선했습니다.”
본체의 하단부도 손봤다. “물통 용량이 600mL인데요. 물을 가득 채운 채로 본체를 옮기려면 불편하다는 후기가 있었습니다. 화분 아래에 두는 바퀴 달린 트레이처럼 이동을 도와주는 트레이를 구매 옵션에 추가했습니다. 그렇게 변화를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스팀박스 3번째 버전까지 왔네요.”
5. 사업 확장은 연관 제품으로
한 가지 제품으로만 승부할 수 없다. 보만은 연관 제품으로 확장했다. 스팀 족욕기가 대표적이다. 물을 미세 입자의 고온 증기로 만들어 발을 마사지한다. 발에서 시작해 몸 전체의 혈액순환을 돕는 효과가 있다. 바닥 부분에 발을 지압을 할 수 있는 돌기를 부착해 마사지 효과를 높였다. 가을과 겨울철 큰 인기를 끌면서 보만코리아에 효자 제품 노릇을 하고 있다. 현재 온라인몰에서 한정 공동구매 행사를 하고 있다.
◇한국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
유 대표는 한때 350명을 거느리던 사장이었다. “10년도 더 된 얘기죠. 지금은 딱 1/10 규모입니다. 35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데 오히려 좋아요. 직원들 이름, 얼굴을 하나씩 기억할 수 있고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진하게 들거든요. 올 들어 환율이 급격히 오르면서 큰 위기를 맞았지만 이 직원들 덕분에 버티고 있습니다.”
신제품 개발은 멈출 생각이 없다. “20년 전에 국내 최초로 연기 안 나는 그릴을 출시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비슷한 제품이 많지만, 최근에 우리만이 가진 노하우로 리뉴얼한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그 외에도 구상 중이거나 개발 단계에 있는 제품이 많습니다. 깐깐한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면, 성능은 전 세계 어느 제품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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