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가 언제 약을 먹었더라? 고민 해결한 효자의 아이디어

더 비비드 2024. 10. 28. 09:37
복약 관리 솔루션 ‘나비’ 개발한 더인츠 임기채 대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복약 관리 솔루션 ‘나비’ 개발한 더인츠 임기채 대표. /더비비드

어르신들을 만나면 꼭 한 번씩 이런 말을 듣는다. 내가 빨리 죽어야지. 다소 살벌한 말을 하면서도 어르신은 허허 웃는다. 듣는 자녀들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게 된다. 사실 진짜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식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리 표현될 뿐이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며 애지중지 키웠던 자녀들이 장성해 이제 부모를 보며 같은 마음을 품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건강하시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더인츠 임기채 대표(60)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건강 관리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은 ‘올바른 약 복용’이라고 본다. 그 기본을 지키지 못해 아찔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 대표를 만나 기본을 지키는 특별한 방법을 들었다.

◇어머니의 응급실행에서 깨달은 것

어머니의 구순 잔치에 함께 모인 6형제. 임 대표는 가장 왼쪽에 서 있다. /임기채 대표 제공

1989년 KT에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뗐다. “스물일곱에 통신기술직으로 입사했습니다. 당시는 PC통신에서 무선 인터넷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어요. 회사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데이터 통신 교육을 벌이기도 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2 월드컵입니다. 상암 경기장에 영상전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처음으로 시연했거든요. 2Mbps(초당 100만비트의 전송 속도)까지 속도를 끌어올렸다고 신문에도 났어요.”

​이후 KT의 자회사인 KTF에 이어 온세통신(현 세종텔레콤)에서 경력을 이어갔다. “네트워크망 기획과 대외협력을 담당했어요. 한 선배가 제가 일하는 것을 보고 ‘머슴이 주인인 것처럼 일한다’고 말할 만큼 열정을 다했습니다. 최종 직책은 ‘부사장’에 최종 연봉은 무려 2억원이었어요. 2019년에 모두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약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임 대표. /더비비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홀로 계시던 어머니가 쓰러졌다. “평소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계셨어요. 매일 약을 드셔야 했는데 어느 여름날 실수로 혈압약을 두 번 복용하신 게 문제였습니다. 저혈압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 가셨죠. 다행히 이웃이 빨리 발견해 무사하셨지만 복약 실수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아찔했어요.”

ICT(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쌓은 수십 년의 경력을 제대로 발휘할 순간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어요. 우리 어머니 말고도 실수로 약 때를 놓치거나, 같은 약을 여러 번 잘못 복용하는 어르신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복용 시점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제품을 기획했습니다.”​

◇화재 사고 막아준 약상자

임 대표가 어르신 댁에 방문해 나비 사용방법을 직접 안내하고 있다. /임 대표 제공

인텔리전스(Intelligence)에 복수형인 ‘s’를 붙여 ‘더인츠’라는 사명을 지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창업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르신 인터뷰’입니다. 예비 소비자에게 진짜 필요한 제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죠. 어떤 어르신은 수시로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하더군요.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버려진 약봉지를 보며 확인하는 겁니다. 가장 필요한 기능으로는 ‘알람’을 꼽는 분들이 많았어요.”

온도 센서, 체온 센서를 탑재한 약통을 고안했다. 자동 열림, 잠금 기능도 더했다. “초기 모델에서 가장 황당했던 실수는 ‘PUSH(누르세요)’ 버튼입니다. 테스트 삼아 설치해 드렸던 어르신에게 ‘어떻게 여는지 모르겠다’는 연락을 자주 받았어요. 편하라고 만든 터치형 약통이 오히려 불편함을 야기했죠. 어르신에게 익숙한 형태인 서랍형으로 디자인을 전면 수정했습니다.”

나비 약상자와 함게 사용하는 전용 앱. 앱을 통해 어르신의 약 복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더인츠

50차례의 설계 변경과 수정 끝에 ‘나비(나만의 약비서)’를 완성했다. “약상자와 스마트 밴드, 보호자용 앱의 구성입니다. 약상자에는 터치형 패드가 있어 가족과 화상통화를 하거나 전자 앨범 기능으로 사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약을 먹을 시간이 되면 소리로 알려줘요. 알람 이후 15분이 지나도 약상자가 열리지 않으면 보호자에게 알림이 갑니다. 반대로 약 복용 시간이 아닌데 상자가 열렸을 때도 ‘어르신의 약상자가 열려있습니다’라는 알림을 받을 수 있죠.”

2022년 7월 경기도 가평군 홀몸 어르신 20명을 대상으로 ‘나비’를 시범 설치했다. 가족·보호자와 전용 앱으로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도록 했다. “가장 큰 성과는 홀몸 어르신 한 분의 사고를 막았던 일입니다. 집중 호우로 정전이 된 상황에서 불이 났을 때 ‘나비’를 통해 가족들에게 연락하고 119를 불러 화재를 진압했다고 하더군요.”

한 어르신이 나비 약상자를 사용하는 모습. 약 상자를 열어 약을 먹으면 보호자에게도 알림이 간다. /임기채 대표 제공

세부 기능이나 UI·UX(사용자인터페이스·사용자경험)를 결정하는 기준은 ‘우리 어머니’였다. “어머니 또래의 어르신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한글을 모르는 분들이 꽤 됩니다. 주요 버튼을 모두 알록달록 선명한 색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전화로 사용 방법 문의가 오면 ‘파란 버튼을 눌러보세요’하고 말씀드릴 수 있죠.”

◇건강한 백 세 인생, 불가능은 없다

인천광역시 서구청과 업무 협약을 맺었다. /임기채 대표 제공

서울 강남구, 인천 서구, 경기도 연천·부천, 충북 증평, 전남 화순, 경남 밀양·김해·창원, 대구 군위 등 11개 지자체와 시범 사업을 이어갔다. 지역별로 약 30대씩 총 400대를 보급했다. “지금껏 B2G(기업과 정부 간 거래)에만 집중했다면 이제 직접 소비자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년 출시를 앞둔 ‘케어데이’는 기존 나비의 약상자를 기본으로, 냉장모듈·모니터패드·스마트워치 등의 구성을 넣거나 뺄 수 있는 제품이에요.”

더인츠는 지난 8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하는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 무대에 올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약 오복용을 방지하는 원리, 약통 사용 패턴을 이용한 고독사 방지 시스템 등에 대한 특허도 7건 등록했다. “올해 제가 환갑입니다. ‘환갑 잔치’도 옛말이 됐어요. 장수했다고 하려면 100살은 넘겨야죠.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지내는 게 중요해요. 그 곁에 나비가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이영지 에디터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