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 스타트업 '라메디텍'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채혈하기 너무 무섭다.'
당뇨를 앓고 있는 환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제목이다. 식전·후마다 혈당을 확인하기 위해 채혈하는 당뇨 환자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살을 찔러야 한다는 두려움을 애써 외면해야 한다. 바늘로 찌르는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손 곳곳에 굳은살이 박인다.
한국 기업 라메디텍은 당뇨 환자의 불편함을 줄이고자 ‘레이저’를 이용한 채혈 의료기기 ‘핸디레이 라이트’를 개발했다. 바늘로 손가락을 푹 찌르지 않고 레이저로 미세한 상처를 내는 방식이다. 따끔한 통증이 거의 없고 상처나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다. 레이저에 살균 효과가 있어서, 상처에 의한 2차 감염 걱정도 덜하다.
여러 성과로 기술력을 증명하고 있다. 해외 15개국에 대리점 계약을 체결해 핸디레이 라이트를 수출하고 있다. 2024년 1월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 CES에서 레이저 채혈·혈당측정 관리 기기 ‘핸디레이-데스크’를 선보였다. 2013년부터 꾸준히 등록한 특허는 30건이 넘는다. 박병철 상무(51)는 라메디텍의 초기 멤버로 의료기기 인허가 전문가(RA)로 활약하고 있다. 박 상무를 만나 의료기기의 끝없는 여정을 들었다.
◇고통 없이 채혈하는 의료기기
핸디레이 라이트에 들어있는 레이저는 피부과에서 피부재생에 주로 쓰는 프락셔널 레이저다. 레이저를 쏘는 순간 100~180mJ(밀리줄) 범위의 에너지가 나오는데 몸에 흡수되면서 에너지의 대부분이 열로 변환된다. 0.00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주변 피부를 증발시켜 구멍을 내는 원리다.
바늘구멍보다도 더 작은 구멍을 내기 때문에 채혈 후 피가 빨리 멎는다. 채혈 직후 채혈 부위를 보면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처 부위가 적다. 바늘 대신 감염을 막기 위한 일회용 캡이 있다.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3등급 의료기기로 허가를 받았다. 의료기기는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도에 따라 1~4등급으로 분류한다. 3등급 의료기기는 중증도의 잠재적 위해성을 가진 의료기기로 분류되며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인공호흡기, 인공심장기, 심장박동분석기, 진단용 X선 투시 촬영장치 등이 3등급 의료기기의 대표적인 예다. 현재 온라인몰에서 한정 최저가 공동구매 행사를 하고 있다.
◇얌전한 고양이를 따라나서다
의료공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종합기술원 의료기기 사업부에 입사했다. 치과용 레이저 수술기 개발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2000년 당시엔 레이저 수술기가 모두 수입품이었습니다. 국내 첫 제품이었죠. 개발 후 인허가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와 주로 소통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RA란 직무가 없었지만 그때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RA는 국내외 의료기기 규제 전문가를 말한다. 의료기기의 기획·개발, 국내외 인증과 인허가, 생산·품질관리 등 전 과정에 관여한다. “일반 제품 개발의 전 과정을 담당하는 직무를 PM(프로젝트 매니저)이라고 하는데요. RA는 의료기기에 더 특화된 직무입니다. 수시로 바뀌는 법과 제도, 시행령 등에 대응해야 하죠.”
인허가 과정에서 수십편의 논문을 읽었다. “식약처 담당자와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해외 사례를 최대한 많이 수집했어요. 3개월간 회사 대신 식약처로 출퇴근하며 담당자를 붙들고 늘어졌죠. 결국 기기의 안전성과 무해성을 확인받고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삼성종합기술원 의료기기사업부가 분사해 나오면서 RA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2012년 동료 연구원의 창업 소식을 접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죠. 묵묵히 일만 하던 최종석(현 라메디텍 대표) 당시 연구원의 얘기를 들으니 괜히 더 솔깃하더군요. 레이저 장비의 광학 설계를 주로 담당했는데 병원에서만 쓰던 대형 장비를 소형화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단순 의료시장이 아니라 미용, 제조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성이 넓다고 판단했죠. 그렇게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분류조차 되지 않던 의료기기
2012년 1월 최 대표는 동료들과 함께 ‘라메디텍’을 세웠다. 3평 남짓의 사무실을 구해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첫 개발 제품은 병원용 레이저 채혈기 핸디레이(LMT-3000)입니다. 채혈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일회용 바늘을 ‘란셋’이라고 하는데요. 물리적인 상처를 내는 바늘 대신 ‘레이저’를 활용한 기기죠.”
1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개발 기간은 3배로 길어졌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RA인 제겐 식약처의 의료기기 허가 단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의료기기는 1~4등급까지 있는데요. 1등급은 신고, 2등급은 인증, 3~4등급은 허가를 통해 이뤄집니다. 3등급 의료기기 허가를 받겠다고 찾아갔지만 품목 분류조차 쉽지 않았어요. 대분류(기구·기계), 중분류(채혈 또는 수혈 및 생체 검사용 기구) 이후 소분류에 적합한 항목이 없었습니다.”
안전성과 타당성을 입증시키기 위해 자료를 꾸렸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수치화된 자료가 필요했어요. 대학병원과 9건의 임상 연구를 했습니다. 그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5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란셋 채혈과 레이저 채혈을 했을 때 아이들의 산소포화도를 측정해 통증 점수를 매겼습니다. 레이저로 채혈하면 통증이 75%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죠.”
2년 7개월 만에 핸디레이는 식약처의 3등급 의료기기 허가를 받았다. “통증 외 심미적인 부분에서 레이저 채혈기의 장점도 강조했습니다. 피부과에서 피부 재생을 위해 사용하는 프락셔널 레이저를 사용하기 때문에 상처가 빨리 아물고, 굳은살이 생기지 않죠. 바늘이 없기 때문에 2차 찔림이나 사고로 인한 2차 감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인정받아 라메디텍 레이저 채혈기를 위한 소분류(레이저 채혈기) 품목이 신설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쓰는 레이저 채혈기
라메디텍은 병원용 레이저 채혈기에 이어 가정용 레이저 채혈기 ‘핸디레이 라이트’도 개발했다. 이름처럼 집에서도 가볍게 쓸 수 있도록 만든 레이저 채혈기다. “앞서 병원용 기기를 허가받았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식약처 허가는 비교적 수월했습니다. 다만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유럽·미국 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현재 온라인몰에서 한정 최저가 공동구매 행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식약처에서 담당하는 일을 미국에선 식품의약국(FDA)이, 일본에선 후생성이, 브라질에선 위생감독청(ANVISA)이 담당한다. “핸디레이 라이트 기획 단계부터 각국의 의료기기 품질 관리 시스템 관련 제도를 점검했습니다. 유럽의 CE 인증이나 ISO13485(의료기기 품질경영시스템)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한창 조립 중일 때 ‘알고 보니 유럽에선 이 부품이 들어가면 안 된다더라’라는 허무한 실수가 있어선 안 됩니다. 지금도 3개월에 한 번씩 전 세계 각국의 의료기기 관련 법·규정·제도를 전수조사합니다.”
RA로서 가장 큰 고충은 수시로 바뀌는 법령이다. “수시로 모니터링을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있어요. 가령 유럽 CE에서 MDD(의료기기 지침)를 MDR(의료기기 규정)로 변경하면서 규제가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제품마다 사용자 적합성시험을 다시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이 최소 수천만원에 달하죠.”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핸디레이 라이트의 수출길을 열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해외 15개국에 대리점 계약을 체결해 공급 중입니다. 러시아, 폴란드, 미국, 유럽 등엔 의료기기 등록이 완료됐고 그 외 나라들도 필요한 서류를 모두 갖추고 인증·허가 절차를 밟고 있죠. 과거엔 의료기기를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했어요. 이젠 역으로 수출하는 나라로 성장했죠. 그 토대를 닦는 데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입니다.”
◇레이저 채혈기의 영역 확장
첨단 의료기기이지만 가격 부담은 줄였다. 핸디레이 라이트의 수명은 약 2만회다. 기기 값에 일회용 캡 비용까지 더하더라도 채혈 1회당 비용은 80원꼴이다. 기존 바늘 채혈의 회당 비용이 적게는 60원, 많게는 300원인 것과 비교해보면 합리적이다.
차후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전망이다. “2023년 2월 레이저 채혈기의 장점과 안전성, 유효성을 인정받아 보건산업진흥원의 보건신기술(NET) 인증을 받았습니다. 보건복지부의 신의료기술에도 등재됐죠. 이 말은 곧 보험수가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현재 관련 절차를 밟는 중이죠. 당뇨 환자들이 비용 지원을 받으면서 핸디레이 라이트를 사용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소비자의 목소리를 반영한 신제품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CS 역시 RA가 확인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제품에 문제는 없는지, 사용성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는 역할도 하죠. 핸디레이 라이트를 사용하던 분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얘기가 ‘혈당 측정기와 결합한 기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요청인데요. 이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 채혈과 측정을 함께 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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