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가 만든 자료 도대체 어딜 보는 거야?" 답답한 서울대생이 만든 것

더 비비드 2024. 6. 18. 17:35
B2B 세일즈·마케팅 솔루션 '세일즈클루' 개발한 페어리 허수빈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허수빈 대표, 최영재 개발자, 홍준웅 CPO. /더비비드

누구에게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돈, 시간, 체력 등의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선택해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 성과가 결정된다. 선택과 집중의 타이밍을 놓치면 불행히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도 있다.

세일즈·마케팅 분야에서는 특히 ‘선택’이 힘들다. 똑같은 상품소개서를 10명에게 배포했을 때 어떤 사람이 계약 성사 가능성이 높은 사람인지 알아낼 마땅한 방법이 없다. 그나마 직접 만났다면 표정이라도 읽을 텐데 비대면으로 자료만 전달했다면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허수빈 페어리 대표(26)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양한 솔루션을 개발했지만 알아주는 이를 찾을 길이 막막했다. 답답한 마음에 세일즈·마케팅 솔루션 ‘세일즈 클루’를 직접 개발했다. 허 대표와 홍준웅 CPO(30), 최영재 개발자(30)를 만나 영업에서 효율적인 선택과 집중 방법을 들었다.

◇뉴스레터에서 회의 솔루션까지

허 대표가 대학 재학시절 발행한 뉴스레터 예시 화면. /허수빈 대표 제공

허 대표와 홍 CPO는 서울대 동문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언론인을 꿈꾸던 허 대표가 뉴스레터 제작을 기획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위한 영문 뉴스레터였다. 한국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간추려서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 콘텐츠를 만들었고, 구독자에게 매주 1회 메일로 전송했다.

- 각자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허) “혼자 뉴스레터를 만들어보니 너무 못생기고 촌스러워 보이더라고요.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뉴스레터를 보기 좋게 만들어 줄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어요. 디자인학부에 다니던 홍 CPO를 만나 얘기하니 흔쾌히 참여해 줬습니다. 그 외에도 학내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나 언론사 경험이 있는 사람을 모아 콘텐츠의 양과 질을 끌어올렸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페어리 허수빈 대표. /더비비드

- 뉴스레터의 반응은 어땠나요.

(홍) “구독자 수가 발간 2달째에 300명에서 1년 뒤 2000명까지 늘었어요. ‘잘 보고 있다’는 연락을 꽤 자주 받았습니다. 한 미국인 구독자는 본인도 뉴스레터 제작에 참여하고 싶다며 기고하기도 했어요. 그분은 나중에 저희가 뉴스레터에 손을 뗄 때쯤 적극적으로 나서서 물려받았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죠.”

- 뉴스레터를 그만둔 이유는요.

(허) “너무 즐거웠지만 그 즐거움의 근원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다양한 인재를 모아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더 희열을 느꼈죠. 좀 더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2021년 4월 창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막연하게 IT 창업을 하고 싶었지만 개발엔 문외한이었어요. 다시 전문가를 찾아 나섰죠.”

(최) “그 무렵 개발 동아리에서 허 대표를 처음 만났어요. IT 분야로 창업을 하려고 한다며, 함께할 개발자를 모집한다고 당차게 발표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마침 지인 중 한 명이 허 대표와 아는 사이라더군요. 그렇게 소개를 받아 합류하게 됐습니다.”

창업 초기 개발한 솔루션을 홍보하기 위해 보냈던 메일 내역. 답변은 거의 받지 못했다. /허수빈 대표 제공


-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했나요.

(허) “처음엔 미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입시 도우미 앱을 기획했어요. 한국의 교육열이 미국에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습니다. 명문대를 바라보며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출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집 근처 주립 대학에 진학하려 하더군요. 다음으로 회의할 때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기획했습니다. 의미 없이 길어지는 회의 시간을 줄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돕겠다는 포부였죠.”

-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할 일이 많았겠어요.

(홍) “그게 문제였어요. 실컷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개발해 서비스를 만들어도 아무도 써주질 않으니 힘이 쭉 빠졌죠. 여러 기업 담당자들에게 서비스 소개서를 첨부한 메일을 보냈을 때 ‘수신 확인’까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은 알 길이 없었어요. ‘왜 메일을 보고도 연락이 없을까?’ 생각하며 궁금증만 키워가던 중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기획했죠.”


◇영업왕을 위한 힌트

세일즈 클루 화면을 보며 서비스에 대해 설명하는 허 대표. /더비비드

2022년 8월 ‘세일즈 클루’ 라는 이름의 새로운 아이템을 확정했다. 자료를 받아보는 사람의 반응을 기록해 보여주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어떤 페이지를 얼마나 오래 봤고, 자료 안에 있던 링크를 클릭했는지 여부 등을 데이터화해 발신자가 알 수 있도록 하는 솔루션이다. 사용자는 보내고 싶은 자료를 PDF 형식으로 업로드하기만 하면 된다. 수신자는 전용 뷰어를 통해 자료를 확인한다.

- 전용 뷰어를 만든 이유가 있나요.

(최) “PDF라는 확장자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기존 PDF 툴에선 한글을 지원하지 않아서 한글이 포함된 자료를 올리면 폰트가 깨지거나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줄 바꿈이 일어났어요. PDF 용량이 크면 속도가 느려진다는 점도 큰 한계였죠. 전용 뷰어를 만들고 PDF 자료를 변환하는 단계를 추가했습니다. 자료를 받으면 전체 내용을 이미지 파일로 바꾼 다음 하이퍼링크 등 내부적 동작 요소를 추가로 삽입했죠.”

세일즈 클루 웹 화면. /허수빈 대표 제공

- 어떤 기업에서 세일즈 클루를 쓰고 있나요.

(허) “2022년 11월 MVP(가설 검증 모델)을 만든 이후 7개월 만인 2023년 6월 정식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베타버전으로 사용하던 기업들 중 10개 회사가 유료로 전환했습니다. 오래된 소프트웨어 회사나 중견기업도 있어요. 오랫동안 세일즈 클루를 사용한 고객사 중엔 서비스의 보완점이나 개선 방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내주는 곳도 있죠.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분만큼 감사한 분이 없습니다. 솔루션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분들이죠.”

- 실제로 고객사의 피드백을 반영한 기능이 있나요.

(홍) “여러 고객사의 요청들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요청은 최대한 빨리 반영하려고 해요. 이를테면 ‘수신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고 싶다’거나 ‘어떤 산업군에서 자료를 많이 열람하는지 알고 싶다’는 요청들은 ‘리드(잠재고객 정보) 수집’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이죠. 그렇게 도입한 기능이 ‘양식(form)’입니다. 자료 내에 지정한 특정 페이지에서 ‘끝까지 보고 싶으면 이름과 연락처 등을 입력하라’는 창이 뜨면서 리드 수집을 유도하는 기능이죠.”

◇창업 선배가 알려준 내리사랑

페어리는 2023년 10월 디캠프 디데이 본선 무대에 올랐다. /디캠프

2023년 하반기에 만든 매출은 1500만~2000만원이다. 그 중엔 글로벌 유니콘 스타트업 딜(deel)과의 계약도 있다. 딜의 담당자는 “세일즈 클루를 통한 이북(e-book) 발간으로 한 달 동안 잡힌 미팅 개수가 2배로 늘었다”고 말한다. 콘텐츠를 열람하는 고객이 남기는 흔적을 바탕으로 다시 연락할 타이밍과 방법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페어리는 지난 10월 10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이 주관하는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 무대에 올라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 대학생에서 창업가가 된 소감이 어떤가요.

(허) “학생 창업은 장단점이 뚜렷합니다. 단계마다 부족함을 느껴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큰데 그걸 이루기엔 내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닐까 고민하죠. 직장생활이라고 한 번 해봤다면 비즈니스 생태계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과거를 돌릴 순 없죠. 앞으로 배울 것이 많다는 건 장점이기도 합니다. 창업이란 길을 먼저 간 선배들을 만나면 늘 가르쳐주거나 도와주려고 하세요. 저도 언젠가 그런 선배가 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세일즈 클루 웹 화면. /허수빈 대표 제공

- 앞으로의 계획은요.

(홍) “세일즈·마케팅 여정의 전 단계를 아우르고 싶어요. 콘텐츠를 통해 고객을 유치하는 과정은 보통 콘텐츠 제작·배포, 리드 수집, 팔로우업(후속 조치), 미팅, 계약 순으로 이뤄지는데요. 세일즈클루는 리드 수집과 팔로우업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죠. 앞으로는 잠재고객의 유형을 미리 분석해 타깃층을 위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까지 돕는 솔루션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안에 출시할 계획이에요.”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