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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 손을 거쳐간 한국 화장품이 몇 개나 되는 줄 아세요?

화장품 디자이너, 이런 일도 합니다

저 직업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저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궁금한 일이 있으셨나요. 직업별 궁금증을 해소하는 ‘그 일이 알고 싶다’ 시리즈. 이번 편에선 화장품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소개합니다.

피에이치하비의 제품을 총괄 디자인한 DNB 이다영 디자이너. /더비비드

화장품 성분 분석 앱의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 약 25만5000개의 화장품이 유통되고 있다. 있을 만한 성분, 제형, 색은 모두 나온 셈이다. 그런데도 한국 화장품 시장에 도전장을 내미는 신제품은 여전히 많다. 성분 분석부터 포장재 소재까지 확인하는 깐깐한 한국 소비자를 만족시키면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K-뷰티에 종사하는 이들도 일감이 늘며 바빠졌다. 화장품 디자인 기업 DNB의 이다영(47) 대표도 그렇다. 25년차 화장품 디자이너다. 연평균 40개 이상의 화장품 용기부터 포장재까지 디자인한다. 로레알 등 유명 글로벌 브랜드도 그녀에게 디자인을 맡긴다.

시간이 부족해 의뢰가 들어와도 거절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최근 한국 스타트업 ‘피에이치하비’의 기초 화장품을 디자인했다. 이 대표를 직접 만나 한국 스타트업의 제품을 눈여겨본 이유를 들었다.

◇화장품 디자인에 매력 느껴 30대에 빠르게 창업

화장품 디자인을 하며 해외출장을 자주 오갔다. /이다영 디자이너 제공

1997년 대학에서 산업디자인과를 전공하고 졸업 후 바로 화장품 기업에 입사했다. “당시 벤처붐이 일면서 동기들 사이에선 IT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어요. 하지만 전 평소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한불화장품에 지원했죠. 4년간 화장품 용기의 금형부터 포장재까지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디자인했어요. 제형별로 어떤 용기가 적합한지, 포장 소재의 트렌드는 어떤지 익힐 수 있었습니다.”

입사 4년차, 대기업 이직 기회가 찾아왔다. 2001년 LG생활건강으로 이직했다. “LG생활건강 디자인센터로 이직 후 신생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에 투입됐습니다. ‘숨37도’라는 브랜드의 콘셉트부터 네이밍, 용기 디자인까지 담당했죠. 단순히 겉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보다 발효화장품이라는 제품 특성을 디자인에 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디자인 시안 끝에 발효통이 연상되는 용기 디자인을 구현해냈죠.”

33세에 퇴사 후 디자인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사업 초기 사무실의 모습. /이다영 디자이너 제공
그녀의 화장품 디자인 작품은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이다영 디자이너 제공

2008년 퇴사 후 디자인 컨설팅 업체를 차렸다. “창업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습니다. 한 기업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기업의 제품들을 디자인해보고 싶었거든요. 30대에 창업해야 잘 안 풀려도 재취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렀습니다.”

우려와 달리 사업을 잘 키웠다. “사업이 체질이었어요. 한 제품을 도맡아 책임지고 완성하니 성취감이 컸죠. 국내 화장품 산업이 성장하던 시기에 사업도 탄력을 받아 잘 운영됐어요. 로레알, 신세계그룹, 비디비치, CJ 등 유명 기업의 제품 디자인 의뢰를 맡아가며 포트폴리오를 쌓아갔죠. 처음에는 화장품 브랜드의 로고(CI), 브랜드 이미지 통합 작업(BI)과 제품 용기, 포장재 디자인을 주로 했어요. 10년 넘게 꾸준히 화장품 업계에 있다 보니 이제는 화장품 제조사와 협력망이 갖춰졌죠. 지금은 화장품 ODM(제조업자 개발생산) 중개도 하고 있습니다.”

◇창업 후 만난 직장 상사

2021년 1월, 전 직장 상사에게 연락이 왔다. “LG생활건강에 재직할 때 여러 유관 부서와 협업할 일이 많았어요. 김 대표님은 당시 화장품 마케팅 부문장이셨어요. 대표님 방에 들어가면 시계를 거꾸로 걸어 두셨던 게 기억나요. 항상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제품을 바라보라는 말씀을 후배들한테 많이 하시는 걸로 유명하셨죠.”

창업을 할 건데 디자인을 전담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이미 여러 화장품 기업의 CEO 자리를 10년 넘게 하신 분이 또 화장품 제조 기업을 만드신다니요.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시길래 창업하시는지 궁금했죠.”

피에이치하비 김준배 대표가 제품 설명을 하는 모습. /더비비드

제품 구상을 듣곤 거절할 수 없었다. “선크림을 1회당 적정 사용량으로 소분한 제품을 계획하고 계시더군요. 34년간 화장품 업계에 있었지만 아무도 선크림의 적정 사용량을 명시한 기업이 없다면서요. 듣자마자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자이너의 밥그릇을 뺏는 발상이랄까요. 제품을 맡아 디자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죠.”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제품을 맡을 때마다 늘 하는 일이 있다. 기업 대표와의 인터뷰다. "브랜드에 대한 철학, 제품 발상과 개발 과정을 상세히 들어보죠. 화장품과 관련 없는 이야기도 나눠보면서 디자인 콘셉트를 잡아요. 김 대표님한테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제품에 대한 철학을 들었죠.”

창업 후 피에이치하비 김준배 대표와 다시 사업적 인연을 맺게 됐다. /더비비드

인터뷰에선 기획할 제품의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듣는다. “일종의 노하우입니다. 스스로 ‘소비자’라고 생각하고 제품에 대해 꼼꼼하게 물어보죠. 제품의 소구점이 충분히 매력적인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제품의 단점이 발견되면 다시 제품 개발로 돌아가 단점을 보완하거나, 디자인으로 단점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본격적인 디자인에 돌입했다. 브랜드를 이끌 핵심 콘셉트는 물론 로고부터 제품 디자인까지 책임졌다. 가장 중점을 둔 건 ‘신뢰감’이다. "대기업 출신 대표의 노하우와 약사, 화장품 연구 박사 등 고급 인력이 모여 만든 제품이니 브랜드 로고에도 신뢰감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브랜드 로고와 제품명을 세리프(serif: 활자 끝부분에 돌출선이 있는 글씨체)로 디자인했습니다. 서적이나 신문에 많이 쓰이는 글꼴이라 신뢰감을 주거든요.”

◇25년 노하우 그대로 담은 야심작

이다영 대표가 디자인한 피에이치하비 제품들. /피에이치하비

그녀가 디자인한 피에이치하지의 첫 제품은 2021년 3월 출시한 1그램 선크림이다. 국내 백화점과 약국에 입점해있다. 미국, 홍콩 등 수출도 진행한다. 국내 온라인 소비자 재구매율은 약 80%다.

직관적인 디자인 덕분에 ‘남녀노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선크림’으로 이미지를 굳혔다. “최대한 쉽게 디자인했습니다. 선크림의 적정 사용량을 제품명에 바로 넣었죠. 숫자 ‘1’과 질량 단위인 ‘g’을 강조해 디자인했고, 제품 특징을 외관 색상으로 구분했어요. 피부를 밝혀주는 베이스 기능이 있는 경우 분홍색 외관으로, 유분을 잡는 뽀송한 질감의 경우 파우더가 연상되는 아이보리색으로 디자인했죠.”

이다영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 쌀결크림 외관. /더비비드

2022년 1월, 새로운 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피에이치하비의 첫 기초 제품이다. “피부 결 개선과 관련된 특허 성분이 있는 크림과 에센스였어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쌀을 발효해 얻은 효소에 제주도 해수 속 미네랄을 배합한 ‘미네라이스’가 들어간다는 것 말고는 정해진 게 없었죠.”

제품명부터 정했다. 브랜드 디자인에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제품만의 특색이 담겨야 했다. 특허 성분에 들어 있는 ‘쌀’과 피부의 ‘결’ 개선 기능이 강조하기로 했다. "보통 업계에서는 쌀 성분 화장품에 ‘라이스(Rice)’라는 영문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민 끝에 ‘쌀’과 ‘결’을 붙여 ‘쌀결’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피부를 의미하는 ‘살결’이 떠오르면서도 동시에 쌀의 하얀 낟알이 연상되더군요. 또 수출도 염두에 둔 제품인데 제품명에 한글이 사용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제품명을 ‘쌀결’로 정했습니다. 대표님과 함께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유레카’를 외친 기억이 나요.”

제품에는 K-뷰티를 알리기 위해 쌀의 영문명인 'rice' 대신 'ssal'이라는 발음명을 붙였다. 당시 브랜드 소개 자료 중 일부. /피에이치하비

수출을 염두에 둔 상품이라 ‘ssal’이라는 영문명을 붙였다. “외국인은 ‘ssal’이 뭔지 모를 테니 영어의 줄임말로 접근했죠. 고민 끝에 피부 개선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의미하는 ‘Skincare Solution Alternative’로 정했습니다. 피부의 결을 개선한다는 건 피부 위에 수분이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해요. 수분벽이 피부를 보호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피부가 상처 입는 것을 막는 원리죠. 그걸 한국에선 피부 결이라고 표현하는 건데, 영어로는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어 줄임말에 최대한 피부 개선의 의미를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화장품 디자인은 예쁘기만 한 게 다가 아니다. 성분별 특징과 제품 제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필수다. “곡물 성분이 들어간 제품이라 갈색병으로 디자인한 것도 맞지만, 사실 갈색 유리병을 채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갈색 유리병의 차폐력(외부의 전자기장, 빛, 열의 영향을 차단하는 능력)이 가장 좋아요. 쌀결라인은 천연 원료의 비율이 높아 보관이 중요한데, 갈색병이 제품의 유효 성분이 변질되지 않는 데 큰 도움을 주죠.”

제형에 따라 용기의 디자인도 달리 한다. 최대한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는 데에 중점을 뒀다. /피에치하비

제품의 디자인은 곧 기업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놓치기 쉬운 부분도 꼼꼼히 살폈다. “제품에 담긴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제품 성능과 함께 기업 이미지까지 고려합니다. 아무리 효과가 좋은 제품이어도 기업이 비윤리적이라면 구매를 꺼리죠. 세태에 맞게 화장품 포장지는 표면을 코딩하지 않은 생분해 재료를 썼어요.”

제형에 따라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도 자제했다. “에센스는 물과 같은 제형이라 끈적하지 않아요. 사용성을 위해 펌프형 토출구를 제작하면 플라스틱을 더 사용하게 되는 셈이라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60세까지 현업에서 일하는 게 목표

올해 4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쌀결크림을 출시했다. 제품 기획 단계부터 출시까지 모두 이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쳤다. “피부 보습, 결 개선에 도움을 주는 특허 성분이 들어간 에센스와 크림입니다. 임상시험을 통해 제품 사용 후 20% 이상의 피부 결 개선 효과를 입증했죠.”

각종 미술품 전시회나 방산시장, 원단 시장에 가서 시각을 넓히며 공부하고 있다는 이다영 디자이너. /더비비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한 지 15년이 넘었다. 7명 남짓의 직원과 함께 일하지만 일을 직원에게만 맡기는 법이 없다. 60세까지 현업에 종사하는 것이 목표다. “디자인 업계는 보통 근속 연수가 짧아요. 젊은 감각이 소비자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이죠. 이제는 제가 시계를 거꾸로 걸어둡니다. 항상 새로운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죠. 제가 디자인하는 건 화장품이지만, 의식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계속 탐구해요. 각종 미술품 전시회나 방산시장, 원단 시장에 가서 시각을 넓히며 공부하고 있죠. 계속된 노력만이 이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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