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한국 헬스케어 스타트업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스타트업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가 핵심 인력 영입이다. 고액 연봉과 성과급, 스톡옵션까지 내건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할 때 연봉을 올리지 않으면 ‘실속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스타트업 SMD솔루션에서 일하는 정지영(49) 이사는 이 회사를 제발로 찾아 들어갔다. 15년 넘게 유명 의료기기 기업에서 인허가 업무를 하다 돌연 작은 회사로 이직했다. 연봉을 올려 받거나, 스톡옵션 조건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대표의 비전을 듣고 반했다고 한다. SMD솔루션은 2016년 서울대 치대 교수 김현정 대표가 창업한 헬스케어 스타트업이다. 서울대 기술지주 소속으로, 김현정 대표가 치대 교수 신분으로 구강세정기 ‘코모랄’을 개발한 곳이다. 정지영 이사를 만나 전문 인력의 이직 결정 기준을 들었다.
◇우연히 입문한 RA 직무, 천직이었다
코모랄은 직육면체 형태의 본체에 ‘워터렛’이라고 부르는 마우스피스를 연결해서 사용하는 구강 세정기다. 워터렛을 입에 문 뒤 기기를 작동하면, 워터렛의 사방에서 60개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구강 내 이물질과 치태를 제거한다.
코모랄의 핵심 기능은 ‘세정한 물을 기기가 자동으로 흡입해 배수통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튀지 않고 뱉을 필요도 없다. 워터렛을 물고 있는 것만으로 구강 세정이 끝나는 것이다. 양치가 어려운 장애인이나 고령층을 위해 개발됐는데, 잇몸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정 이사는 이 제품이 국내외 의료기기 인·허가를 받도록 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의료기기를 상품화해서 팔려면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 만국공통이다. 신체에 바로 영향을 주는 것이어서 인허가가 까다롭다.
이 때문에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회사엔 인허가를 담당하는 전문인력 ‘RA(Regulatory Affair)’가 필요하다. RA는 식약처가 인정하는 국가공인자격이다. 각 의료기기에 해당하는 규제를 전부 파악해 국가별 판매 제도에 부합하는지 증명한다. 제품 설계 단계부터 사후 관리까지 참여하는 핵심 인력이다. 각국의 의료법은 물론이고 담당하는 의료기기에 대한 배경지식과 임상 기관에 대한 정보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의료기기 분야 시장 성장세에 비해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 산업통산자원부의 산업기술인력 수요 자료를 보면 헬스케어 산업의 인력 부족률은 6.6%다. 최근 2년 동안 고용인원이 30% 증가했는데도 인력 부족률은 줄지 않고 있다. 기술력이 우수한데도 상품화가 지연되거나 수출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지영 이사는 우리나라 RA 1세대다. 부경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졸업 후 2000년 일본 의료기기를 수입하는 작은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 이사가 처음 이 일에 입문했을 때는 어떤 지침이나 안내서, 교육기관, 연줄도 없었다. 멘땅의 헤딩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일본어만 쓰면 되는 수입 업무 인줄 알았어요. 상상과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의료기기별, 국가별 규제나 수입 절차가 모두 달라 밤새면서 공부해야 했죠.”
힘들긴커녕 즐거웠다. “일이 적성에 맞았습니다. 계획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그런 사람이 하기 좋은 직무예요. 개발 중인 의료기기를 판매하려면 식약처에 언제 신고해야 하는지, 어떤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인증이 필요한지 등등 세부 규제를 모두 찾아봐야 해요. 각국 관리 기관 홈페이지, 의약품 설명서 등을 찾아봐 가면서요. 인허가 일정에 맞춰 계획을 짜고 의료기기 허가 절차를 빠짐없이 거쳐야 하죠. 의료기기의 매니저와 같은 겁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일을 그만뒀다가 출산 후 1개월 만에 규모가 더 큰 곳으로 이직하게 됐다. “임플란트 제조회사였어요. 제조에 주력하다가 소비재 판매를 시작하면서 의료기기를 수입할 RA 인력이 필요했던 거죠. 치과 관련 의료기기 인허가 과정을 담당하며 12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치과 설비부터 임플란트, 치아 보철, 치아 미백제, 골대체재, 인상재와 같은 기공 재료까지 거의 모든 치과 관련 기자재를 다뤄봤어요.”
◇매너리즘에 빠진 순간 발견한 채용 공고
10년 넘게 일하자 매너리즘에 빠졌다. “RA가 하는 일은 인허가와 사후 대응으로 나뉩니다. 시장에 나오지 않은 개발 단계 의료기기에 대한 인허가 과정을 맡는 것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수시로 바뀌는 법령에 기존 제품이 어긋난 부분이 없는지 모니터링하는 업무입니다. 저는 전자가 더 즐거웠는데, 전직장에서는 사업이 어느정도 성장한 이후부터 후자 업무만 했죠.”
2019년 스타트업 SMD솔루션의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서울대학교치과병원 김현정 교수가 창업한 회사로, 구강세정기 ‘코모랄’을 개발한 곳이다.
이 회사라면 계속해서 새로운 업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면접이나 봐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어요. 대표님과 인터뷰를 했는데, 보통은 면접자가 말을 더 많이 하는데, 대표님은 제게 회사의 프로젝트를 바로 설명해주시더군요. 잠시 당황했는데 들을 수록 빠지더라고요. 개발 중인 의료기기가 다양하고 참신했어요. 디지털 치료제, 생체신호 모니터링 기기, 구강 3D 프린터, 구강세정기 등 처음 접한 제품들이 많았죠. 여기라면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입사 후 첫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구강세정기 ‘코모랄’이었다. 처음 다루는 분야였다. “장애인 치과에서 진료했던 대표님의 경험을 살려 신체 취약자용 구강세정기를 개발하고 있더군요.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 관리가 끝나는 잇몸과 치아 관리 기기였어요. 치과 분야에 10년 넘게 일하면서 본 적 없는 제품이었죠.”
코모랄을 의료기기로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 과정을 밟는 일이 필요했다. “개발 초기에는 제품의 부피가 컸어요. 세면대 정도의 크기로 밑에 바퀴를 달아 이동식으로 사용하는 구조였죠. 가정에서 사용하기에는 좀 어렵고, 요양원이나 병원처럼 여러 환자를 한번에 돌보는 기관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제품이라고 판단했어요. 의료기관은 인허가를 받은 의료기기만 취급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인허가 과정을 거쳐야 했죠.”
◇의료기기 허가 난관에 떠올린 묘수
없던 제품인 만큼 의료기기로 입증하는 과정이 배로 힘들었다. “의료기기 인증에 앞서 의료기기의 정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식약처에 따르면 의료기기는 질병을 진단⋅치료⋅경감⋅처치 또는 예방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제품이어야 해요. 그리고 목적이 중요합니다. ‘의료 행위’에 사용돼야 하죠. 예를 들어 의료용 핀셋, 주사할 때 쓰는 압박용 고무줄 등은 의료 행위에 사용되는 제품이니 의료기기로 분류되는 식입니다.”
코모랄을 국내 의료기기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장벽에 부딪혔다. “국가마다 의료 행위를 해석하는 범위가 달라요. 한국은 ‘구강 세정’을 의료 행위로 보고 있지 않아요. 양치를 의료 행위로 인정하기 힘든 것과 같은 개념이죠. 치주 치료 효과가 있다 해도 의료 행위에 사용되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 받기 힘들었어요.”
미국 의료기기 등록 과정부터 마쳤다. “미국은 대부분의 구강세정기들이 클래스 1 의료기기로 인정받고 있어요. 코모랄의 제품개발 이력, 제품의 위험도 분석, 임상 평가 보고서, 생물학적 안전성 자료 등을 모두 구비해 FDA(미국 식품의약처) 의료기기로 등록했습니다.”
이후 국내 인증을 넘기 위한 분투에 들어갔다. 사내변호사가 된 기분이었다. “식약처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밥 먹듯이 드나들었어요. 매일 질의하고, 참고할만한 인증 사례를 찾았죠. 그런데 두 기관 모두 코모랄이 새로운 개념의 제품이다 보니,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디지털 치료제에 대한 가이드가 최근에야 생긴 것처럼 규제보다 제품의 발전 속도가 더 빨랐던 거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 “허가가 지연되는 동안, 먼저 공산품으로 제품을 선보일 방법은 없는지 연구했어요. 기존 코모랄을 가습기 부피 정도로 확 줄였죠. 그 정도면 가정의 화장실이나 부엌에 두기 편할테니까요. 사용성을 높여 우선 공산품으로 출시하는 전략입니다. 치아의 부식을 예방하는 통계 수치를 얻기 위해 미국 UCLA에서 임상 시험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공산품으로 등록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KC안전인증, 전파인증, 소재 안전성, 공장 시설 인증 등 모두 의료기기의 규격에 맞췄어요. 제조는 먼지가 없고 온⋅습도, 압력까지 조절되는 클린룸(청정실)에서 합니다. 입에 들어가는 제품인만큼 소재도 의료용 TPU(열가소성 폴리우레탄)를 이용하죠. 공산품 인증을 위해 새롭게 준비할 게 없었어요. 오버스펙(over-spec)’의 제품을 공산품으로 출시하는 셈이니까요.”
◇이직하기 좋은 직장은 어딜까
코모랄은 자동 구강세정기다. 마우스피스처럼 생긴 워터렛을 본체에 연결하고 입에 넣어 작동하면 60개 물줄기가 360도로 분사된다. 잇몸과 치아 사이를 세정하고, 물은 뱉을 필요 없이 기기가 자동 흡입한다. 물고 있는 것으로 치아 세정이 끝난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임상시험을 통해 코모랄 사용 후 치태 24% 감소 효과를 입증했다. 2020년 1월 대기업과 쟁쟁한 스타트업이 모인다는 CES(세계가전전시회)에서는 헬스케어 부문 혁신상을 받았다. 2021년 11월에는 산업기술진흥유공포상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받아 국내외로 눈도장을 찍었다.
정 이사가 말하는 좋은 직장은 계속해서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기업이다.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전통 기준에 맞춰 인허가받는 건 분명 어려워요. 하지만 그걸 성공했을 때는 뿌듯함을 주죠. 업계의 변화를 만든 기분입니다. 그게 이 직무의 매력 같아요. 일하다 막히는 순간 ‘이것 봐라?’하는 마음이 솟아요. 그 마음이 이 분야에서 20년씩 일할 수 있게 만들었죠. 오기 생기는 직업, 그게 스스로한테 잘 맞는 직무가 아닐까요.”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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