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건희 회장 지시로 태평양 건넜던 삼성맨의 26년 후 근황

더 비비드 2024. 6. 18. 15:20
디캠프 박영훈 신임 대표 인터뷰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이던 1996년 어느 날. 삼성그룹 전 계열사에서 내로라하는 직원들이 모여 미국 보스턴으로 출국했다. 미국에서 벤처캐피털을 중심으로 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펴보고 오라는 고(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지시였다.

실리콘밸리, 팔로알토, 보스턴에선 이미 기술 스타트업 회사가 쫙 깔려 있을 만큼 산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몇 주간의 미국 출장을 다녀온 삼성 직원들은 생전 처음 본 광경을 정리해 이 전 회장에게 보고했다. 머지않아 삼성그룹은 정식 벤처 투자팀을 꾸려 미국 보스턴으로 내보냈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유망 회사에 출자하고, 펀드를 만들어 투자하는 등 삼성벤처투자 기반을 다졌다.

지난 1일 취임한 박영훈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 대표도 당시 2년여간 미국에서 벤처회사에 투자하는 일을 했다. 박 대표는 “1993년 삼성물산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25년 넘게 스타트업과 인연을 맺어 오고 있다”고 했다.

디캠프는 은행권 19개 금융회사가 8450억원을 출연해 2012년 만든 창업 지원 조직이다. 그간 209개 기업에 직접 투자하고, 60개 펀드를 통해 수천 곳에 간접 투자했다. 설립 후 10년 동안 28조원이 넘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온 힘을 다한 디캠프가 박 대표 취임을 계기로 어떤 변화를 맞이할지, 박 대표에게 직접 들었다.

◇스타트업 생태계로 이끈 3번의 인연

박 대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삼성물산에 들어가 보스턴 컨설팅, 엑센츄어 컨설팅 등을 거쳐 GS리테일 부사장을 지냈다. 컨설팅사와 대기업 경력이 대부분이어서 스타트업과 인연이 없어 보이지만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3번의 인연이 있다.
첫 번째 인연은 삼성물산 시절 이건희 전 회장의 지시로 미국에 만든 스타트업 투자 펀드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면서 스타트업에 눈을 뜬 것이다. "이건희 회장님이 미국 출장 길에 비행기에서 존 도너반 MIT 공대 교수를 만났는데, 미국의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 육성 산업을 얘기하면서 ‘삼성도 이런 접근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요.”

스타트업의 발상지이자, 지금도 유수 글로벌 기업이 많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 /사진=게티

이미 스타트업은 미국 경제 역동성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고 있었다. “가서 보니 휴렛팩커드(hp), 인텔 등 여러 기술 스타트업이 미국 동부, 서부에 외곽 순환도로를 따라 널려 있었어요. 저희가 봤을 땐 새파랗게 젊은 창업자가 투자자 앞에서 아이디어를 얘기하고 투자 받는 모습이 충격이었죠. 이런 문화와 산업을 배우고, 실행하기 위해 저도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3개월, 6개월 단위로 잠시 머물던 미국 출장이 장기전이 됐다. 미국 현지 회사와 공동출자해 벤처캐피털 펀드를 만들었다. 삼성 CTG 펀드가 여러 회사에 투자하고, 경영에도 참여하게 됐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사업은 청산했지만, 국내에선 씨앗도 뿌리기 전인 스타트업 투자에 대해 경험하는 좋은 계기가 됐죠.”

두 번째는 2001년 스마트 단말기 업체 ‘셀빅(전 제이텔)’에 CEO(최고경영자)로 영입돼 2004년까지 대표를 지내다 코오롱에 회사를 매각한 경험이다.

셀빅의 슬라이드 휴대폰 PDA형 스마트폰. /나무위키 캡처

“회사가 생긴 지 3~4년 됐고 직원 수가 100명인 강소기업이었습니다. 제품도 두어 개 출시한 상황이라 초기를 지나 성장 단계로 접어드는 시기였어요. 새로 전략을 짜고, 로드맵을 구상하고, 사업을 개편하는 등의 일을 했죠. 국내에서 PDA를 처음 내놓고, 전화 기능을 더하는 등 사업을 지속했지만 삼성과 애플 중심으로 스마트폰 시장이 커지면서 입지가 좁아졌어요.” 이렇게 두 번째 인연을 통해 스타트업에서 투자뿐만 아니라 제조, R&D 유통까지 직접 경험한 셈이 됐다.

세 번째는 GS리테일에서 CVC(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를 설립해 스타트업 투자를 주도한 경험이다. CVC는 대기업이 출자한 벤처캐피털(VC)을 뜻한다. “셀빅에서 나온 후 엑센츄어 컨설팅으로 옮겼어요. GS 그룹과 LG그룹 계열이 분리될 때 프로젝트를 같이 한 인연으로 허태수 회장 제안을 받아 GS홈쇼핑에 합류한 상태였습니다.”

GS리테일 부사장 시절 모습. /디캠프

GS홈쇼핑은 다양한 온라인 커머스의 등장과 TV송출료 인상 등으로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 새 동력이 스타트업 투자였고 이를 박 대표가 주도했다. 지주회사 아래 CVC를 만든 건 GS가 처음이다. “원래 금산분리법에 따라 대기업 지주사는 금융회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었어요. 하지만 돈을 벌려는 금융업이 아니라, 혁신 도모를 위한 새로운 체제임을 정부에 강조했습니다. 수많은 논의를 거쳐 규제를 뚫고 CVC를 만들 수 있었어요.”

박 대표는 당시 GS리테일 부사장으로서 투자 규모 3000억원을 굴리며 인공지능(AI)부터 시작해 빅데이터, 콘텐츠, 식품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확보했다. “스타트업 투자에선 수익도 중요하지만, 사업 모델과 서비스·기술을 잘 흡수해서 내부화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게 혁신이 원천이기 때문이죠.”

◇성공 스타트업의 선순환 효과 도모

박 대표는 이번에 디캠프를 이끌게 되며 일종의 ‘숙명’임을 느꼈다고 했다. /디캠프

박 대표는 디캠프를 이끌게 되며 일종의 ‘숙명’임을 느꼈다고 한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우리 디캠프의 미션에 충실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국내 최대 스타트업 육성 단체로서 입지를 다지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선 앞으로 10년이 중요하다 봅니다.”

디캠프는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초기 스타트업이 아이디어와 기술을 겨루는 데모데이인 ‘디데이’를 매월 연다. 투자금과 일할 공간을 지원하고, 네트워크를 연결한다. 경영, 재무, 마케팅, 해외 진출, 지식재산권 등 회사 운영을 위한 모든 걸 배울 수 있도록 강연을 열거나 일대일 멘토링도 한다. 최근 경기 침체로 스타트업 투자 빙하기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나마 디캠프 같은 스타트업 지원 조직들이 자금이 마른 스타트업 업계에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디캠프가 매달 주제를 정해 열고 있는 스타트업 데모데이 '디데이' 행사. /디캠프

앞으로는 많은 회사를 창업하게 만드는 것보다 성공하는 창업팀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둘 계획이다. “디캠프는 그간 창업 생태계 조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지자체, 정부 조직, 대기업 모두 창업 생태계 이해가 높아졌죠. 이제 성숙기에 접어들 때라 봅니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 잘 성장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돈도 벌고 그런 성공 사례를 많이 만들어야죠.”

성공 스타트업을 많이 만들기 위한 과정에도 신경 쓸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탑다운(top-down, 모든 사안을 조직의 상부에서 결정해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이 아닌, 우리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컨센서스(일치된 의견)를 통해 만드는 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이연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