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면활성제 없이 물과 기름 섞는 퍼스트랩 황보민성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잘 섞이지 않는 사이를 두고 ‘물과 기름’에 비유한다. 물과 기름을 한 통에 넣고 열심히 흔들면 잠시 섞인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확하게 둘로 나뉜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는 물과 기름을 섞기 위해 비눗물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비눗물을 넣고 휘휘 저으면 선명했던 가로선이 사라지고 뿌연 액체만이 남는다.
비눗물은 일종의 계면활성제다. 물의 응집과 기름의 응집을 방해해 그 둘이 섞이도록 한다. 계면활성제는 화장품이나 의약품·페인트·이차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에 쓰인다. 다만 계면활성제는 인체나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황보민성 퍼스트랩 대표(41)는 초음파를 한군데로 모으는 기술로 계면활성제의 자리를 꿰찰 계획을 하고 있다. 이미 소형 장비를 출시해 국내외 대기업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황보 대표를 만나 초음파 집속 기술의 정체와 그 기술이 산업 현장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 들었다.
◇현실 남매가 함께하는 창업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컨벤션 회사에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뗐다. “고객사의 회의나 포럼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2년이 넘어가면서부터 좀 더 주도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어요. 서서히 회사와 권태기가 생길 때쯤 한국표준연구원(이하 표준연)에서 일하던 누나의 연구를 엿보게 됐는데요. 초음파를 이용해 물과 기름을 섞는 기술을 개발하더군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2015년 누나인 황보선애 박사(43)는 동료 선·후배 연구진과 함께 사업화를 계획했다. “여기에 기획경영 담당자로 합류했습니다.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매진했어요. 그러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쓰러져 한 달간 입원하기도 했죠. 누나와는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렸어요. 뼛속까지 연구원인 누나는 연구 성과를 내는 데에 관심을 놓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미세플라스틱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새 연구를 하겠다는 걸 몇 번이나 뜯어말렸어요. 일단 하던 일부터 하자면서요.”
하던 일은 ‘초음파 집속 기술을 이용한 유화’다. “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물질을 섞는 걸 ‘유화’라고 하죠. 둘을 분리하는 가장 큰 힘은 각각의 응집력입니다. 큰 방울이 작은 방울을 집어삼키는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물은 물끼리, 기름은 기름끼리 뭉쳐지죠. 여기에 특정 주파수의 초음파를 쏘면 입자가 100㎚ 이하로 쪼개집니다. 입자가 작고 균일할수록 응집을 방해하고 지연시켜요. 어찌 보면 초음파 집속 기술은 물과 기름을 섞는다기보다는 각 물질이 응집되는 속도를 아주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죠.”
실험은 늘 성공적이었다. 실험만 그랬다. “내부 테스트에선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타깃 물질을 나노 단위로 나눠 다시 응집하지 못하도록 했죠. 하지만 완성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양산형 장비로 개발하기까지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프로젝트는 흐지부지됐고 이 기술도 이대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함께 가면 빨라지는 속도
누나는 여전히 연구실에 머물러 있었다. 같은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특허도 냈다. “다시금 창업 가능성을 봤습니다. 다시 창업하자고 했더니 누나는 반대하더군요. ‘연구원이 사업해서 잘 되는 걸 못 봤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각자 잘하는 것만 하자며 누나를 설득했습니다. 하드웨어 개발, 양산 시스템 구축 등 전문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어요.”
명확히 짚고 갈 부분이 있었다. 기술 이전에 대한 문제다. “초음파 집속 기술은 표준연의 소유였고 이를 사업화하기 위해서는 기술 이전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연구소 내 최고의사결정권을 가진 연구원심의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대개 안건 당 1~2분 정도로 빠르게 논의하는데, 이 건에 대해서는 40분 넘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고 해요. 결국 퍼스트랩이 ‘연구소기업’이 되면서 표준연이 주주가 됐습니다. 표준연에 20%의 지분을 주는 조건으로 기술의 전용실시권을 가져왔죠.”
2022년 초음파 집속 기술과 ‘처음’이라는 뜻을 담아 ‘퍼스트랩’을 설립했다. 설립 직후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의 ‘산학연 협력 기술창업법인 육성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3차례에 걸쳐 21억원의 사업 지원금을 받는 스타트업 육성 프로젝트였어요. 선발 연락을 받고 사업화 가능성에 다시금 확신을 가졌죠.”
초음파 집속 장비가 없던 건 아니었다. “기존엔 배치(batch) 타입으로 바구니 형태였습니다. 바닥에서 초음파를 발생시켜 위로 쏘는 장식이죠. 또는 어떤 용기에 유화를 원하는 물질을 담은 다음 초음파가 나오는 봉을 투하하기도 했습니다.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대량 생산을 위해선 지하수도처럼 배관 형태여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배관 벽면에서 초음파를 안쪽으로 모아주기 위해선 압전 세라믹(물리적인 압력에 따라 응력·전계가 발생하는 세라믹)이 필요했습니다.”
포털 검색창에 ‘압전 세라믹’을 검색했다. 제일 상단에 뜨는 기업에 대뜸 전화를 걸었다. “그 회사가 바로 상장사인 전자부품 전문 기업 ‘동일기연’이었습니다. 영업사원에게 우리 기술에 대해 설명하며 하드웨어를 함께 제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그 얘기가 동일기연 회장님에게까지 보고가 됐더군요. 8~9개월간 함께 머리를 싸매고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기면 동일기연이,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생기면 퍼스트랩이 고쳐가며 소형 장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연구용 소형 장비가 완성되자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국내 제약·바이오·화장품 회사는 물론이고 미국의 P&G, 네덜란드의 스탈, 일본화약 등 글로벌 기업에서도 PoC(개념 검증)를 하고 싶어 했어요. 그만큼 기존에 사용하던 계면활성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컸던 거죠.”
그도 그럴 것이 계면활성제의 원리도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계면활성제 종류만 2000가지에 달합니다. 원료마다 성질이 달라서 어떤 물질에 어떤 계면활성제가 알맞은지 테스트하는 단계가 필요하죠. 또 계면활성제를 넣으면 점성이 높아진다는 점도 큰 단점입니다. 그만큼 주요 원료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죠. 이는 화장품뿐만 아니라 배터리를 만드는 2차 전지, 반도체 등 전 산업에서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특허 기술로 산업군 도장 깨기
퍼스트랩은 2023년 12월 연구용 소형 장비를 출시했다. 출시 직후 3건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지난 3월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하는 창업경진대회인 디데이에서 특허청장상을 받았다. “과학적인 성과를 상용화하는 데는 정말 긴 시간이 걸립니다. 모든 단계를 직접 하려고 했다면 아직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연구에 손을 놓은 건 아닙니다. 창업 이후에도 꾸준한 연구 개발을 통해 주파수 트레킹 등과 같은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앞으로도 초음파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초음파 기술은 1900년대 초에 등장했어요. 다만 그 개발 영역이 측정·세척 등으로 한정적이었죠. 제조업, 제약·바이오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초음파는 유화 외에 분해에도 탁월합니다. 독성이 너무 강해 분해하지 못하는 이른바 ‘좀비 화합물’이라 불리는 물질이 있는데요. 초음파로는 분해할 수 있습니다. 초음파 기술로 산업 영역을 하나씩 정복하고 싶어요.”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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