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직장 동료들이 만든 폐 건강 관리 기기 '불로(BULO)'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기침을 심하게 하면 목구멍에서 옅은 피 냄새가 난다. 폐 속 공기주머니인 폐포가 터지면서 발생하는 출혈 때문이다.
몇 번의 기침에 손상될 정도로 폐는 예민한 장기다. 사람의 몸에 두 개의 풍선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풍선이 얇은 바늘에 터지듯, 폐는 미량의 이물질에도 치명상을 입는다. 한번 손상되면 회복도 어렵다. 절제술과 장기 이식술 모두 다른 장기 대비 생존율이 가장 낮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없어 아프다고 티도 잘 안 낸다.
폐 질환을 얻기 전 폐를 미리 관리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알지만, 실천이 어렵다. 헬스케어 스타트업 ‘브레싱스’의 공동 창업자 윤기상(43) 이사는 폐 건강 관리기기 ‘불로’의 하드웨어를 설계했다. 불로는 미국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혁신상을 받고, 미국과 일본에 수출도 되고 있다. 윤기상 이사가 삼성 소속 의료기기 개발 기업 ‘삼성메디슨’의 책임 연구원 자리를 박차고 벌인 일의 결과물이다. 그를 만나 하드웨어 개발자로서 불로를 설계한 과정을 들었다.
◇들고 다니면서 ‘후’, 폐 건강 관리기기
불로는 66g의 무게로 한 손에 쥘 수 있는 원기둥 모양의 폐 건강 관리기기다. 마우스피스와 본체로 구성됐다. 전용 애플리케이션인 ‘불로 웰니스’를 내려받고 마우스피스에 숨을 힘껏 불어 사용한다. 폐활량, 폐 근력, 폐 지구력, 폐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앱에서 개인별 폐 건강 상태 확인과 함께 호흡근 운동법을 추천받을 수 있다. 헬스장에서 트레이너와 근력 운동을 하듯, 하루 세 번 5분씩 불로를 이용해 폐 주변 근육을 단련하면 된다. 2021년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혁신상을 받고 같은 해 4월 공식 출시해 5000대 넘게 팔았다.
최근에는 불로를 의료기기로 허가 받기 위한 ‘불로 M’ 개발에 한창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진단 폐활량계 의료기기 인증을 마쳤다. 올해 상반기 출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기존 불로가 폐 건강 관리, 폐 운동에 집중했다면 불로M은 의료 진단 기기로서 폐 기능 검사가 가능하다. 병원에 방문하지 않아도 폐 기능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해커톤 대회에서 만난 직장 동료와 공동 창업
윤 이사는 세종대학교 전자정보통신공학과 출신이다. 2013년부터 삼성메디슨에서 영상 의료기기를 연구했다. “초음파 의료기기 선행개발 연구원이었습니다. 초음파를 이용해 신체조직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탄성 영상 기업을 주로 다뤘죠. 태아를 확인하거나 근골격계를 촬영할 때 쓰이는 장비입니다. 병원의 영상의학과를 자주 드나들면서 폐 질환을 겪는 환자를 많이 마주쳤어요. 대부분 증상을 뒤늦게 느껴 CT 영상으로 질병을 확인하는 이들이었죠.”
아두이노나 납땜이 취미였을 정도로 타고난 개발자다. 2016년 그룹사 전체에서 열린 해커톤 대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개발자, 기획자가 팀을 꾸려 하나의 시제품을 완성하는 대회입니다. 그룹 계열사 전체에서 열리는 대회로, 기획자들이 아이디어를 낸 프로젝트에 자유롭게 참여해 제품을 만드는 대회죠.”
삼성전자의 이인표 연구원은 이때 만났다. 현재 브레싱스의 대표다. “삼성서울병원 의료진이 제시한 ‘가정용 폐 관리기기’ 아이디어에 같이 참여하면서 알게 됐어요. 알고 보니 가족이 폐 질환을 겪은 경험이 있어 폐 건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죠. 마음이 맞아 공동 창업을 결심했고, 곧바로 사내 창업 육성 프로그램 ‘씨랩’에 선정돼 제품을 함께 개발했죠.”
윤 이사에게 주어진 건 하드웨어 개발. 아이디어를 제품을 구현하는 역할이다. “휴대하면서 폐활량을 측정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였어요. 하드웨어 제품의 크기를 정하고, 본체의 내부 구성과 물리적 배열을 설계했습니다.”
‘본체는 최대한 가볍게, 마우스피스는 손에 쥐기 편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3D 프린터로 금형을 수십번도 더 만들었죠. 마우스피스 높이도 그냥 결정하지 않아요. 14cm라는 최적의 값이 나올 때까지 사용성 시험을 거치죠. 피실험자 84명에게 직접 마우스피스 시제품을 손에 쥐게 해보고 그립감이 가장 좋은 제품을 선정했습니다.”
5개월 만에 폼팩터 설계를 완성했다. 시제품으로 상품성을 실험할 차례다. “숨을 힘껏 불면 호흡의 양과 기류에 따라 ‘호흡파’가 생성됩니다. 불로는 이 호흡파를 센서로 인식해 폐의 건강 상태를 알아내요. 호흡파를 정밀하고 일관성 있게 측정하는 것이 관건이죠. 미국 흉부학회에서 공인한 표준 파형 생성기를 구비해 불로의 측정 성능을 실험했습니다. 마우스피스의 지름과 길이도 미세하게 조절해보고, 본체 무게나 형태도 다듬어가며 호흡파 측정 오차를 줄였죠.”
◇의료기기 시장 도전
불로를 성공적으로 시장에 선보인 후, 의료기기 ‘불로M’의 개발에 돌입했다. 공산품 불로와 달리 불로M은 ‘진단 폐활량계’다. “제품의 목적이 다를 뿐 성능 차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공산품 불로가 일상생활 속 호흡 운동에 특화돼있다면, 의료기기 불로는 폐 기능 진단에 초점을 뒀죠.”
병원에서 사용하는 큰 부피의 진단 폐활량계의 성능을 만족하면서 소형화한 것이 핵심이다. 마우스피스에 입을 대고 호흡하면 앱을 통해 폐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다. 체온계로 열을 재는 것처럼 불로M으로 폐의 상태를 가정에서 수시로 파악하는 것이다.
기존 불로가 가정용이었다면 의료기기인 불로M은 병원에서의 활용성도 염두에 뒀다. 실제로 병원에 찾아가 의료기기가 쓰일 환경부터 파악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진단 폐활량계들은 부피가 큽니다. 정밀 진단을 위해 밀실에서 측정해야 해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죠. 간이형이라고 해도 자동 혈압계처럼 책상에 두고 사용하거나 마우스피스와 본체가 유선으로 연결돼 의료진이 끌고 다녀야 합니다.”
불로M을 병원에서 활용하면 번거로운 상황을 줄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폐 질환으로 입원한 환자가 움직일 필요가 없어지죠. 의료진이 회진할 때 간편하게 폐 기능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환자 계정을 등록해두면 앱으로 폐 상태의 추이도 살필 수 있고요.”
기존 불로를 바탕으로 개조했다. 마우스피스를 일회용으로 설계한 것이 돋보인다. “병원에선 환자마다 마우스피스를 교체해야 하니 소재를 바꿨죠. 의료기기용 종이를 이용해 마우스피스를 만들었습니다. 얇고 두꺼운 휴지심처럼 생겼어요. 소재에 따라 호흡파 측정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시 표준 파형 생성기를 꺼내 실험해보며 종이의 두께와 길이를 조절했습니다. 식약처의 의료기기 허가 기준에 맞는 정밀도까지 오차범위를 줄였죠.”
불로M은 2등급 의료기기다. 직장 시절 익힌 의료기기 인허가 지식과 대구의 첨단 의료기기 개발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의료기기는 인체와 접촉하는 정도가 클수록 등급이 높아집니다. 폐활량 진단계는 신체 외부에 닿기 때문에 잠재적 위험성이 낮은 제품에 속하죠. 식약처 지정 시험 검사기관의 성적서, 의료기기용 제조 시설 등의 준비를 마치고 식약처에 신청하면 됩니다. 임상시험 자료가 필요한 제품은 아니지만 성능 검증을 위해 고대구로병원과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CES 혁신상, 미국·일본에도 수출
폐활량 진단계 불로M은 2023년 상반기 출시 예정이다. 폐활량을 키우기 위한 호흡 운동을 하고 싶다면 기존의 헬스케어용 불로를 이용하면 된다. 불로의 이용자가 늘면서 앱을 통해 기록된 호흡 데이터도 11만건이 넘었다. “사내 연구소 ‘비랩’이 호흡 데이터를 계속 분석하고 있습니다. 앱 업데이트를 통해 호흡량 평가 기준을 더 정밀화하고 호흡 운동 콘텐츠를 늘리고 있습니다.”
불로가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혁신상을 받은 덕에 해외 시장 진출도 순조로웠다. “이미 2021년부터 미국, 일본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요. 최근 몇몇 아세안 국가에서도 연락이 와 올해는 수출 시장이 더 커질 예정입니다. 불로M의 해외 진출도 계획돼있습니다. FDA(미국 식품의약국) 승인과 CE MDR(유럽 의료기기 인증 제도)을 준비하고 있죠.”
제품 개발자로서 공들인 제품이 시장에서 인정받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제품 하나를 시장에 내놓는 과정이 지난하지만 출시하는 순간 어려운 수학 문제가 풀린 것처럼 희열을 느껴요. 헬스케어 시장에는 아직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많습니다. 그만큼 도전할 과제도 많은 거죠. 불로를 이용한 디지털 치료제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직 물음표가 많지만,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세상을 또 놀라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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