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삼성전자 사표내고 월급 260만원 받으며 하는 일

더 비비드 2024. 6. 25. 10:20
양산화 가능한 나노 코팅 기술 개발한 딥스마텍 김호연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양산화 가능한 나노 코팅 기술 개발한 딥스마텍 김호연 대표. /더비비드

초등학생 시절 교과서를 받아오면 꼭 하는 일이 있다. 어머니와 함께 빳빳한 새 교과서에 책 꺼풀을 입히는 일이다. 투명한 셀로판지를 잘라 책 표지에 씌우고 나면 방탄조끼를 입힌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책 꺼풀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교과서에 생기는 얼룩을 모두 막아줬다.

투명한 코팅막을 씌우는 일은 다양한 산업군에서 활용되는 공정이다. 섬유업체에서는 원단 발수 처리를 위해 코팅을 활용하고, 반도체 공장에서는 열에 취약한 부품에 분리막을 씌운다. 기능성 나노 코팅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딥스마텍 김호연 대표(44)를 만나 코팅 기술의 미래를 들었다.

◇효성그룹 대체복무요원에서 삼성전자 김 과장으로

포항공대 재학시절 동해의 한 백사장에서. /김호연 대표 제공

1998년 포항공대 신소재공학과 입학했다.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기숙사는 친구들과 모여 놀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밤새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강의 시간을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당시 ‘벤처 기업’ 열풍이 불었는데요. ‘IT 벤처 기업을 만든다면’으로 시작한 상상은 끝없는 수다로 이어졌죠. 현실화하진 못했지만요.”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에서 재료공학전공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2008년 석사 학위를 받고 효성그룹 중앙연구원에 대체복무요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효성그룹에서 탄소 섬유(가볍고 변형이 잘되지 않는 섬유), 아라미드 섬유(총알도 뚫지 못하는 강도의 섬유) 등 신소재를 개발하고 있었어요. 소재 개발을 하면서 공장을 어디에 세울지, 타깃층은 누구로 할지 같은 전략을 세우는 일도 했습니다. 그 일이 ‘사업 기획’ 업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죠.”

효성그룹 재직시절 스위스 로잔공대와 미팅하는 모습. /김호연 대표 제공

전문연구요원 복무기간이 끝날 즈음 삼성그룹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스카우트 제안이었다. “사업기획과 연구개발(R&D)을 같이 할 사람을 찾고 있더라고요. 제가 적임자였죠. 2012년 삼성석유화학 기획팀 과장으로 입사해 신규 사업 개발 업무를 맡았습니다. 신기술을 개발해 삼성그룹 안에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적용하는 일이었죠.”

제조 공장이 있는 베트남에서 살다시피 했다. 체류 기간으로 따져보면 1년에 6개월이 넘는 시간을 베트남에서 보냈다. 불량률을 잡기 위해서다. "가장 큰 난관은 노즐(액체·기체를 빠르게 분출시키는 관)이었어요. 끈끈한 액을 노즐에 연결해 분사하다 보니 쉽게 막혔죠. 해결 방법을 고민하다 얇은 고분자 막을 씌우는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마찰을 줄일 수 있도록 노즐에 코팅제를 입혔더니 불량률이 크게 줄었습니다."

일반 섬유(오른쪽)와 폴리머 증착 기술로 초발수 코팅한 섬유(왼쪽). /김호연 대표 제공

폴리머(polymer·고분자 화합물) 증착 기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증착 과정이 정말 신기했어요. 코팅제의 씨앗이 되는 물질을 공중에서 뿌리면 코팅 물질이 대상 물체의 표면에 이끼처럼 자라나면서 코팅막이 씌워지는 원리죠. 전기전자 분야뿐만 아니라 의료기기나 섬유에도 활용할 수 있겠더군요. 다만 양산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죠. ‘이 한계만 극복한다면’이란 상상을 품고 2022년 7월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정말 순진했죠.”

◇레시피는 만들기 나름

경기 안산에 마련한 딥스마텍의 첫 사무실. 냉·난방 시설조차 없었다. /김호연 대표 제공

2022년 8월 딥스마텍(deepsmartech)을 설립했다. 한 기술에 깊이 몰입하겠다는 의미다. 경기도 안산에 20평(약 66㎡)짜리 공간을 빌렸다. 책상 두 개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니 주변에서 더 성화였어요. 오히려 저는 덤덤했습니다. 여차하면 배달이나 대리운전이라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각오로 스마트폰에 관련 앱을 깔아두고 이 일을 시작했어요.”

기존 폴리머 증착 기술의 한계를 잡으려면 온도를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해 9월 아이디어만 가진 상태에서 LG계열사의 아이디어 공모전에 출사표를 던졌다. 배터리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찾는 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의 단계에 맞춰 기술을 개발했다. “수개월간 아무것도 손에 쥔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이를테면 코팅의 원재료 격인 고분자를 만들 때 필요한 계측 장비조차 없었죠. 비율이 정확하지 않은데도 맞다 치고 넘어가기 일쑤였으니 변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김 대표는 공장 벽에 붙어있던 글귀를 보며 의지를 다졌다. /김호연 대표 제공

하다못해 냉난방 시설도 없었다. 전기난로를 틀면 금세 차단기가 내려가 버렸고, 손가락이 얼어서 키보드 타이핑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유치한 한 마디가 마음을 녹였습니다. 공장 벽면 귀퉁이에 ‘Don’t give up, the beginning is always the hardest. (포기하지마, 첫걸음이 항상 가장 어렵지)’란 글귀가 쓰여 있었거든요. 신기하게 이게 위로가 되더군요.”

이듬해 2월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삼성전자에서 알고 지냈던 연구원 2명이 합류하면서부터다. “함께한 세월이 있어서인지 금세 손발이 착착 맞더군요. 동료들과 함께 챔버(chamber) 타입의 폴리머 증착 장비 시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방 형태인데요. 코팅하려는 제품을 내부에 거치한 다음 액체로 된 고분자 물질을 기화시킵니다. 수증기가 물체의 표면에 맺히듯 기체가 된 고분자 물질이 대상 물체의 표면에 맺히면서 코팅되는 방식이죠. 두께는 10㎚(나노미터) 정도로 머리카락의 3000분의 1 수준입니다.”

초발수 코팅 공정을 거쳐 물을 흡수하지 않는 섬유. /김호연 대표 제공

초발수·초친수·고강성·항균·절연·전도 등 코팅의 목적에 따라 코팅제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코팅막을 원하는 만큼 층층이 쌓을 수 있고, 여러 기능성 물질을 섞어 한 층의 코팅막으로 여러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발수 기능에 항균 기능을 더해 코팅하면 오염물질이 달라붙지 않고 씻겨나가면서 바이러스도 죽이는 기능이 가능한 것이죠. 최대 4개의 기능까지 동시에 코팅해 봤어요.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조합이 많지만 레시피는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지난 6월 딥스마텍은 LGES 배터리챌린지 공모전에서 TOP10으로 선정됐다. 전체 10개 기업 중 국내 기업은 두 곳뿐이었는데 딥스마텍이 그 중 하나였다. 딥스마텍 폴리머 증착 기술은 친환경 공정으로 한 발짝 다가선 것이기도 하다.

"건식 공정으로는 대량 생산이 안 되니 습식 공정이 보편화됐습니다. 코팅하려는 물체를 용매에 담갔다가 꺼내 건조하는 방식이죠. 이때 폐액이 발생합니다. 건조할 땐 포름알데히드 같은 유해 물질이 나오죠. 딥스마텍 폴리머 증착 기술은 건식 공정으로 폐액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섬유업계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죠. 패브릭·필름처럼 롤에 말려있는 소재의 경우 풀어서 코팅한 다음 바로 다시 되감는 롤투롤(roll-to-roll)방식으로 코팅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설계도 마쳤어요.”

◇대표가 직원의 가족을 마주할 때

딥스마텍은 돈 보다 더 값진 성과를 내고 있다. /더비비드

삼성전자에서 퇴사할 때만 해도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수천만원의 성과급을 일시금으로 받은 적도 있었다. 반면 딥스마텍으로 받은 첫 월급은 260만원에 불과했다. 어려운 첫걸음이었지만 '정지'는 없다. 돈 보다 더 값진 성과를 내고 있는 덕이다. 딥스마텍은 LG 공모전에 이어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한 디데이 지역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창업 이후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직원의 가족을 마주쳤을 때다.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눴는데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뎠다간 나만 다치는 게 아니라 직원과 그 가족들의 삶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도 스트레스의 총량은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보다 크게 줄었어요. 모든 의사결정을 직접 내릴 수 있으니까요. 실패의 불안감보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더 큽니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