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35년 전 남편따라 낙향한 서울 아가씨의 달달한 포도 농사

더 비비드 2024. 6. 24. 15:20
경북 상주시 모서면 샤인머스캣 농장

상주시 모서면에서 샤인머스캣을 기르는 김명자 농부. /더비비드

“어렸을 때는 결혼하고 바로 낙향한 게 후회스러웠어요. 친구들이 멀끔한 옷 입고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땡볕의 밭에 나가 김매는 제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죠.”

35년전 멋모르고 남편의 고향으로 귀농한 새댁은 이제 과일 재배의 달인이 됐다. 김명자(59) 씨는 경북 상주시 모서면에서 7000평 규모의 포도밭을 운영한다. 농부가 된 것을 후회했다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포도를 향한 애정어린 눈빛이 내리쬐는 햇살처럼 뜨거웠다.

사과, 배, 복숭아, 캠벨 포도까지 안 길러본 과일이 없는 그는 5년 전 샤인머스캣 농사에 도전했다. 모서농협 샤인머스캣 공동선별출하회(이하 공선회) 소속 김명자 농부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와 샤인머스캣 재배법에 관해 들었다.

◇평균 당도 18브릭스 모서면 샤인머스캣

김명자 농부가 취재 당일 수확한 샤인머스캣의 모습. 껍질이 매끈하고 알이 단단했다. /더비비드

샤인머스캣은 일본에서 개발한 청포도 품종 중 하나다. 평균 당도는 16~22브릭스로, 보라색 껍질의 일반적인 캠벨 포도(평균 당도 13브릭스)보다 당도가 훨씬 높다. 열대과일 망고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달콤한 향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껍질은 매끈하고 밝은 연둣빛을 띤다. 포도알이 크고, 씨가 없어 먹기 편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샤인머스캣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2019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샤인머스캣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명절 제사상에 등장할 정도다.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영천시, 김천시가 샤인머스캣 주산지로 꼽힌다.

상주시 모서면은 모동·화동·화서면과 함께 ‘중화지역’으로 불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포도 재배지역이다. 해발 280m 이상의 고랭지로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크다. 상주 중화지역의 포도 재배 면적(1835ha) 중 50%가 샤인머스캣 재배지다. 현재 모서면에서만 매년 약 300억원어치의 샤인머스캣이 생산되고 있다.

◇회사 경리에서 열혈 농부로 전직

김명자 농부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남편따라 모서면으로 낙향했다. /더비비드

1964년생인 김명자 농부는 경기도 이천시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과수원집 아들을 만나 1989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남편의 고향인 상주시 모서면으로 내려왔다.

-농업에 뛰어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건설회사의 경리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남편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었는데요. 결혼 직후 시부모님의 권유로 낙향해 사과 과수원을 함께 운영하게 됐어요. 당시 재배 면적을 늘리고, 다양한 사과 품종 재배에 도전하던 시기라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시부모님의 일을 돕다가 자연스럽게 귀농했어요.”

샤인머스캣을 수확하는 김 농부의 모습. /더비비드

-어떤 작물을 길러보셨나요.

“사과, 배, 복숭아, 포도를 키워봤습니다. 시대별로 유행하는 과일 여러 종 재배를 시도해 보고, 내가 경작하는 지역의 기후와 토질에 맞는 품종을 정해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동안 기르는 겁니다. 같은 모서면에서 농사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잘 자라는 작물이 달라집니다. 기후가 점점 변하니까요. 제가 시집온 1989년 겨울에는 나뭇가지가 마르다 못해 갈라질 정도로 정말 추웠는데요. 이제는 모서면에서 눈 내리는 걸 못 본 지 10년도 넘었어요. 기후가 그만큼 온난해졌죠.”

-작물을 바꿀 때마다 묘목을 새로 사고, 밭을 정비하는데 큰돈이 드는 것 아닌가요.

“작목 전환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큰 손실이 날 수 있죠. 하지만 적절한 시기를 노리면 크게 손해 보지 않고 작목 변경을 할 수 있답니다. 예컨대 이미 기르고 있는 나무의 수령이 20년 이상으로 오래돼 수확량이 줄고 있다면, 나무를 베어버리는 김에 새로운 작물을 심어보는 거죠. 수해 피해로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쳤을 때도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길러보고 싶었던 작물을 심어 이듬해에 기대를 걸어보는 겁니다. 농사도 머리 굴려 가며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배짱도 있어야 하고요.”

◇주렁주렁 탐스럽게 익어가는 포도의 계절

김 농부의 과수원 규모는 약 7000평이다. /더비비드

현재 김 농부의 과수원 7000평 중 5000평에서 샤인머스캣이 생산되고 있다. 나머지 2000평에선 캠벨 포도를 키운다.

-샤인머스캣 농사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5년전 13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서 시작했어요. 캠벨포도를 기르던 곳이었는데 포도 나무의 뿌리 부분에 샤인머스캣 묘목을 접목해 시작했죠. 이듬해에는 가림막이 있는 하우스와 노지가 혼합된 밭 1300평에다 심었고, 또 그 다음 해에는 2000평 규모의 노지에 샤인머스캣 묘목을 심었습니다.”

샤인머스캣 재배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김 농부의 모습. 과수원 옆 농막에서 샤인머스캣을 맛보며 대화를 나눴다. /더비비드

-재배방식을 달리하는 이유가 있나요.

“일이 한번에 몰리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샤인머스캣은 포도 중에서 수확시기가 가장 늦은 품종입니다. 난방 시설 없는 맨땅에서 기르면 10월이나 돼서야 수확할 수 있죠. 그런데 5000평 전부를 한가지 방식으로 경작하면, 알 솎기, 봉지 작업 등의 작업 일정이 한번에 겹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전국 팔도의 놉(하루 단위로 품삯과 숙식을 받고 일하는 일꾼)을 동원해도 업무가 마비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재배방식을 달리해 작업의 시차를 두는 겁니다. 비닐하우스 수확이 끝나면 혼합형 밭, 노지에서 순서대로 수확 작업을 할 수 있도록요.”

-샤인머스캣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비닐하우스 재배를 기준으로, 매년 4월경 꽃이 핍니다. 꽃 밑에 포도송이 모양의 열매가 3.5cm 크기로 자랄 때쯤, ‘지베렐린’이라고 부르는 식물 성장 호르몬 용액에 열매를 한 송이씩 일일이 담가줍니다. 6월경에는 한 송이에 알이 너무 많이 달리지 않도록 알 솎기 작업을 해줍니다. 한 송이에 40~45알이 적당해요. 알 솎기를 마친 포도는 포장용 종이 봉투로 감쌉니다. 병충해를 막고, 햇빛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야 껍질이 검게 변하지 않죠. 이후 가지의 순을 치고 물을 주며 포도를 키우다 8월 중순부터 10월까지 수확합니다. 참고로 묘목을 심으면 3년차부터 열매가 잘 자랍니다. 묘목을 심은 해에는 수확할 수 없어요.”

샤인머스캣은 한 송이씩 당도를 측정하며 수확해야 한다. /더비비드

-재배 과정 중 가장 까다로운 작업은 무엇인가요.

“수확입니다. 애써 키운 샤인머스캣을 농협에 입고하려면 엄격한 품질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송이 하부 당도 16브릭스 이상, 중량 450g 이상’이라는 기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요. 기준에 맞지 않는 열매는 다시 농가로 반송되죠. 그래서 모든 송이가 품질 기준에 맞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수확 초기에는 당도가 미처 오르지 않은 열매들이 있어서 신중해야 해요. 비파괴 당도 측정기로 모든 송이의 당도를 측정하고 수확하죠.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포도나무의 키는 대략 1.5m 정도라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작업해야 해서 아주 힘들어요.”

-샤인머스캣은 비싼 과일로 알려져 있는데요. 재배에도 비용이 많이 드나요.

“5년전 13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조성하는데 땅값을 제외하고 2억원이 들었어요. 캠벨 포도도 기르고 있지만, 솔직히 비용 측면에서 샤인머스캣이 훨씬 많이 듭니다. 식물 성장 호르몬을 포함한 각종 자재부터, 들어가는 액상 비료의 양도 훨씬 많고요. 같은 면적을 경작해도 필요한 인력이 더 많습니다. 예컨대 송이당 40~45알 정도로 과실을 다듬는 알 솎기 작업을 하려면 1300평 기준으로 하루 20명 정도의 인력이 2~3일 동안 동원돼야 해요. 상품 기준이 엄격해 유통되지 못하는 과실의 비율도 높고요. 매출의 50% 이상이 제반 비용으로 들어갑니다.”

◇품질로 승부 보는 샤인머스캣의 세계

샤인머스캣 저온 저장고의 온도는 5.5도 였다. /더비비드
중량·당도 선별기를 지나는 샤인머스캣의 모습. /더비비드

김명자 농부는 1300평 비닐하우스를 기준으로 연간 약 8톤의 샤인머스캣을 생산한다. 혼합형 밭, 노지에서 기른 샤인머스캣은 묘목이 어려 지난해까지 열매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올해부터는 혼합형 밭에서 기르는 샤인머스캣도 농협에 입고할 계획이다.

-샤인머스캣의 선별·포장 과정이 궁금합니다.

“농가에서 오전에 수확한 샤인머스캣은 점심께 모서농협 산지유통센터(APC)로 입고됩니다. 입고된 샤인머스캣은 약 5~6시간 정도 그늘에 둡니다. 수분을 날려 저장 기간을 늘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후 5.5도로 유지되는 저온 창고에 보관했다가 거래처의 주문량에 맞게 꺼내서 크기 선별 후 포장합니다. 1.5kg 상자에 들어가는 송이의 수를 기준으로 2수, 3수로 크기를 구분합니다.”

선별된 샤인머스캣을 포장하는 모습. /더비비드

-상품 기준이 까다로워서 녹록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난해 샤인머스캣이 흉작이라 출하량이 전국적으로 턱없이 적었어요. 일부 지역에선 상품 기준에 못 미치는 샤인머스캣이 유통되는 바람에 ‘샤인머스캣의 맛은 복불복이다’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죠. 이런 인식을 완전히 불식시키기 위해 농가와 농협 모두 선별에 힘쓰고 있습니다. 포도는 하부의 당도가 가장 낮기 때문에 하부 당도를 기준으로 선별하는데요. ‘하부 당도 16브릭스 이상, 송이 중량 450g 이상, 포도알 중량 12g 이상’이라는 기준은 무조건 지킵니다.”

샤인머스캣은 거래처의 주문에 따라 컵과일, 2kg, 1.5kg 등 다양한 형태로 포장된다. /더비비드

-유통 준비를 마친 샤인머스캣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농협 하나로마트, 온라인 몰, 백화점 등 다양한 경로로 유통됩니다. 샤인머스캣은 추석 전후가 연중 최대 대목입니다. 이때 농가의 생산량도 가장 많고 거래처별 주문량도 가장 많죠. 명절 선물로 유통되는 최상급 샤인머스캣은 송이별 중량 500~750g, 포도알 중량 15g 이상으로 따로 선별하기도 합니다. 도매가는 시기별로 다르나 1.5kg에 2만5000원 ~ 3만원 정도입니다. 열대과일의 성지인 태국, 베트남 등으로 수출되기도 합니다. 연간 140억원어치의 샤인머스캣이 모서농협을 거쳐 유통되죠.”

◇농사하길 잘했다

귀농에 대한 후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35년간 농사일을 하니 작황이 안 좋은 해에도 다음 해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맛있는 샤인머스캣을 고르는 농부님만의 비법이 있나요.

“샤인머스캣을 둘러싼 오해를 하나 바로 잡고 싶어요. 송이가 무조건 크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700g 이상으로 너무 큰 송이는 오히려 당도가 떨어지죠. 너무 푸르지 않고 살짝 노란빛이 감돌아야 맛있고요. 알을 만졌을 때 흐물하지 않고 단단한 느낌이 드는 걸 추천합니다. 속이 비어 있지 않아 입안 가득 과즙이 터지는 식감을 즐길 수 있습니다. 샤인머스캣은 보관이 편해요. 저장 기간이 긴 작물이라 통기성 좋은 키친타월이나 종이로 감싸 서늘한 곳에 보관만 하면 한달도 거뜬합니다.”

샤인머스캣을 들고 웃어보이는 김명자 농부. /더비비드

-연 매출이 궁금합니다.

“자세한 매출은 말하기 어렵지만, 연 매출은 2억원 이상입니다. 제반 비용이 절반 이상이기 때문에 남편과 제 인건비를 생각하면 100% 만족하는 수익은 아닙니다. 의욕적으로 재배 면적을 늘릴 생각인 건 또 아니에요. 세 자녀 모두 대학 보내고 그 중 2명은 결혼도 시켰으니 욕심부릴 나이는 아니거든요. 나이가 있어 체력적 부침도 크고요. 고품질의 샤인머스캣을 길러 수매가를 더 높게 책정받고 싶다는 욕심은 있어요. 최근에는 액상 비료에 콜레스테롤 저하에 효과가 있는 사포닌을 넣어 열매의 영양가를 더 높이는 작업을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귀농에 도전하려는 이에게 농업의 장점을 소개한다면요.

“농사를 오래 하다 보니 세상의 이치를 배웁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큰 손해를 보고 무력감을 느끼다가도, 묵묵히 밭을 매다보면 솟아날 구멍이 보이죠. 땀 흘린 만큼의 보상은 받는 것 같아요. 값비싼 작물을 좋은 품질로 기를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기고요. 대신,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게 농사입니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것이 힘든 성격이라면 농업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섣부르게 귀농을 결정하진 마시고요. 본격적으로 귀농하기 전 소작 등의 방법으로 농업을 먼저 경험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