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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야구장 대활약 페트병 수거 로봇, 제가 만들었습니다"

다중투입방식 수거 로봇 모이지 개발한 잎스 박승권 대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다중투입방식 수거 로봇 모이지 개발한 잎스 박승권 대표. /더비비드

페트병, 의류 등 사용 후 버려지는 폐기물을 재처리해 원료로 다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유럽연합(EU)은 2025년부터 페트병 용기 소재의 25% 이상, 2030년부터는 30% 이상을 재생 원료로 제조할 것을 의무화했다. 재생 원료를 30%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유럽으로의 수출길이 막히는 셈이다.

한편에서는 재생 원료 공급이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플라스틱 폐기물의 관리·추적이 어려워 실질적으로 재생 원료로 활용되는 비율이 극히 낮다고 분석한다. 잎스 박승권 대표(44)는 재생 원료의 수요와 공급의 징검다리를 자처하고 나섰다. 재활용 쓰레기 수거 로봇 모이지(Mo-EZ)를 통해서다. 박 대표를 만나 재생 원료의 출발점이 되는 수거 환경에 대해 들었다.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박 대표(왼쪽)는 친구들과 훌쩍 떠나는 캠핑 여행을 즐겼다. /박승권 대표 제공

수원대 화학공학과 99학번이다. 대학 졸업 직후 아주대 환경공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첫 직장은 엉뚱하게도 TV CF를 주로 만드는 영상 프로덕션 회사였어요. 친척 어른들 중에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분이 많았거든요. 3~4년간 박봉에 시달리다 2008년 제약회사 영업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00만원도 안 되던 월급이 1000만원까지 껑충 뛰었죠.”

고된 직장생활을 버티게 해 주는 건 오랜 취미였던 ‘캠핑’이었다.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았어요. 아웃도어 전문 잡지사의 마케팅팀장을 거쳐 캠핑용품 스타트업에 새 둥지를 틀었죠. 급기야는 캠핑용품 제작 업체 ‘라온’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부족하더군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상품을 제작했다가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어요. 빚 3억원을 떠안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라돈 침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실내라돈저감협회 사무국장이었던 박 대표는 각종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인천일보tv 캡처

종합병원 간호사인 아내가 가장이 됐다. “아내와 쌍둥이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는 게 일상이 됐어요. 동시에 저 스스로도 재충전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1년 만에 다시 일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섰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실내라돈저감협회 사무국장직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협회였어요.”

2017년 12월 강원도 원주에서 라돈 측정 기계 고장 신고가 들어왔다. 측정 가능한 최고치를 넘어서서 생긴 오작동이었다. “그 신고가 ‘라돈 침대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무국장 자격으로 각종 언론 인터뷰는 물론 국정감사에도 출석했습니다.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나니 비슷한 문제를 꾸준히 다룰 필요성을 느꼈죠.”

◇라면 상자로 만든 목업

모이지 시제품을 테스트하는 모습. 투입구가 활짝 열려 있다. /박승권 대표 제공

2019년 8월 ‘잎스(EAPS)’를 창업했다. 라돈을 포함한 생활 방사능이나 각종 미세먼지 등 유해 물질을 관리하며 실내 공기질을 개선하는 것에 목표를 뒀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중심으로 영업했습니다. 4~5개월 만에 2억원이 넘는 매출을 냈죠. 이듬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위기를 맞았습니다. 공공시설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고 공기질 개선에 쓰일 예산은 모두 방역으로 전환됐죠.”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봤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예비 사회적 기업 사업화’ 프로그램에 대해 들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으로 실현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죠. 당시 수거 로봇 소프트웨어 기술을 가진 기업이 하드웨어 제작 업체를 찾지 못해 곤혹스러워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가진 기술로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며 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사무실 입구가 작아 시제품을 넣고 뺄 때마다 나사를 하나하나 풀어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했다. /박승권 대표 제공

돌이켜보면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라면 상자 수십 개를 주워다가 테이프로 칭칭 감아가며 목업(실물과 비슷하게 만든 시뮬레이션 도구)을 만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3개월 만에 그럴듯한 시제품을 완성했죠. 뿌듯함도 잠시 금세 민원이 쏟아졌습니다. 페트병을 한 번에 하나씩 넣다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불만이었죠.”

피봇(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나 사업 성격을 사업 방향을 바꾸는 것)을 결정하고 수거 로봇 개발에 집중적으로 힘을 쏟았다. “처음 떠올린 이미지는 방앗간이었습니다. 쌀, 고추를 포대째로 가져와서 다 털어 넣는 것처럼 페트병을 우르르 쏟아 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른바 ‘다중 투입 방식’을 고집했던 겁니다.”

라벨 제거 여부, 내부에 액체가 남아 있을 경우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센서를 개발했다. /박승권 대표 제공

다중 투입 방식의 수거 로봇을 만들기까지 두 가지 난관이 있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페트병을 정렬해야 하고 수거 가능한 페트병인지 확인해 줄 센서가 필요했다. “독자 기술로 해결했습니다. 수거한 페트병들을 드럼 세탁기처럼 퍼올려 한 줄로 세웠어요. 또 페트병에 빛을 쏘고 그 데이터를 2차원으로 변환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죠. 라벨 제거 여부, 내부에 액체가 남아 있을 경우 등 값을 설정하면 원하는 페트병만 수거할 수 있도록 했죠.”

2022년 11월 국내 최초 다중투입방식의 수거 로봇 ‘모이지’를 출시했다. 인천 SSG랜더스필드에 설치해 개념검증(PoC)을 했다. “설치하는 날, 청소업체 여사님들에게 뜻밖의 쓴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작년에도 환경 캠페인 한답시고 비슷한 기계 설치했다가 페트병 10개도 제대로 처리를 못 하더라’며 난색이었죠. 구석을 보니 그 기계가 먼지 쌓인 채 방치돼 있더군요.”

인천의 SSG랜더스 경기장에 모이지를 설치한 모습. 사람이 붐벼도 페트병 수거가 빠르게 이뤄졌다. /박승권 대표 제공

하지만 ‘모이지’는 달랐다. “다중 투입 방식 덕분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고 빠르게 페트병을 수거할 수 있었습니다. 33경기 동안 모이지 한 대로 2만개가 넘는 페트병을 수거했어요. 하루 평균 600개 정도를 수거했죠. 비슷한 크기인 타사의 수거 로봇이 한 달에 400여 개를 수거하는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성과였습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돈’이다. “타사에서는 월 이용료를 받습니다. 쓰레기 처리비용의 일환이죠. 모이지는 쓰레기를 수거해 온 사람에게 반대로 돈을 줍니다. 페트병 하나에 10원, 20원 정도를 책정해 공공기관에 설치하면, 용돈벌이 삼아 쓰레기를 줍는 어르신들에게 그 돈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를 위한 미래 환경 만들어가는 아빠

박 대표(왼쪽)와 잎스의 핵심 인력인 시니어 고문들. 제조·개발 관련 분야에서 각각 30~40년 경력을 자랑하는 고급 인력이다. /박승권 대표 제공

지난 7월 잎스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가 주최한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모아놓은 페트병을 한꺼번에 투입할 수 있고 분당 74개의 투명 페트병을 동시에 분리 배출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를 계기로 디캠프와 전라북도·전주시와 협업해 전주한옥마을에 모이지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수원시,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와 모이지 추가 설치를 활발히 논의 중이다.

잎스의 공장은 마치 작은 마을 같다. “평일엔 저와 직원들, 시니어 고문들이 함께 땀 흘려 일하고요. 주말엔 12살 된 쌍둥이 아이들이 놀러 와서 자전거를 타거나 배드민턴을 칩니다. 10대 아이들부터 60대까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죠. 환경 문제를 바라볼 땐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환경을 위해 아빠가 뭔가 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이 있어요. 저보다도 더 경험 많은 어른들과 함께 모여 모이지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 의미를 더한다고 생각합니다.”

페트병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박 대표. /더비비드

기후변화, 탄소중립, 재생 원료에 대한 이슈가 쏟아질 때마다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앞으로 버진 플라스틱(재활용된 물질 없이 원유나 천연가스를 이용해 직접 생산한 플라스틱)이 설 자리는 없을 겁니다. 머지않아 재생 원료가 모든 제조업의 중심이 될 텐데 그때 잎스가 한 축을 담당했으면 합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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