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0. 09:55ㆍ인터뷰
다국적 업사이클링 스타트업 창업 도전기
스타트업은 창업 3~5년차에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스타트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폐기 직전의 물품을 완전히 새로운 물건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업사이클링이라 한다. 단순 재사용을 뜻하는 리사이클링과 수준이 다르다.
병을 씻은 후 또 병으로 쓰는 게 리사이클링이라면, 업사이클링은 예쁜 디자인이나 활용도를 더해 원래 모습과 차원이 다른 새로운 가치의 물건으로 바꿔 놓는다. 22살 어린 나리에 폐 플라스틱 활용 컨설팅 업체 ‘모듈랩’을 창업한 윤신현 씨를 만났다. 기성 체제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창업까지 했다.
◇자사고 자퇴 후 한 선택
모듈랩은 폐플라스틱으로 독서링을 만든다. 왼손 엄지 손가락에 끼우고 책 안쪽을 누르면서, 동시에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책 바깥쪽을 받쳐 책 읽기에 가장 편한 자세를 만든다. 대중교통이나 카페 등 외부에서 책을 읽을 때 좋다. 흔들거리는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책을 쥘 수 있어서, 책을 떨어트리거나 구겨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책읽기를 멈출 때는 책갈피로 쓸 수 있다. 폐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의미도 살린 제품이다.
윤 대표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범생 길을 걸었다. 인천 지역 명문고인 포스코고를 다녔다. 2학년을 마치고 자퇴했다. 기존 교과 과정에 한계를 느껴서 한 결정이었다.
서울 혜화동에 있는 대안학교 ‘거꾸로캠퍼스’에 들어갔다. 미국 등에서 관심을 모은 ‘플립러닝(flipped learningㆍ거꾸로 수업)’에 뜻이 있는 교사와 활동가들이 2017년 만든 대안학교였다. “강의식ㆍ암기식 수업이 없었어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을 탐구하고, 프로젝트를 키워 나갔죠.”
-본인은 어떤 공부를 했나요.“미술 큐레이션에 몰두했어요. 관심 있는 주제 별로 프로젝트를 꾸려가면서 필요한 지식을 찾아보고,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자유롭게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세계 돌아다닌 대학 생활
거꾸로캠퍼스를 졸업(엑시트)을하고, 스페인 몬드라곤대 레인(LEINN)학부 국제과정에 입학했다. 기업가적 리더십과 혁신(Entrepreneurial Leadership and Innovation)을 가르치는 학부다. 스타트업 전문 교육기관으로 ‘다국가 무학제 프로젝트’로 운영된다. 중국 캠퍼스에서 3개월, 스페인 본교에서 1년, 미국 시애틀에서 6개월, 다시 중국에서 1년, 마지막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 현장에서 1년을 보내는 과정이다.
“창업과 취업을 해서 일정 수익을 내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4년 동안 1인당 15,000유로 이상의 매출, 10,000유로 이상의 순이익을 내야 하며, 졸업논문 대신 월 500유로 이상의 월급을 받는 800시간 이상 인턴을 해야 하죠.”
윤 대표는 스페인과 미국의 창업가를 대상으로 ‘비즈니스 툴킷’을 만들어 운영했다. 투자자와 접촉 방법, 대화의 기술, 비즈니스 팁 등을 정리한 매뉴얼이다. 권당 12유로에 책으로도 발매해, 인쇄한 800부를 완판했다.
2019년에는 바스크지방에서 한국 문화행사 ‘에우스코리아’를 진행했다. 한 쇼핑몰을 대관해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1300명이 모였다고 한다. 미국 시애틀에선 PR 겸 이벤트 대행사인 ‘고포비주얼(Goforvisual)’에서 재무책임자(CFO)로 일하기도 했다.
◇학교 동기와 다국적 스타트업 창업, 독서링 히트
이런 경험을 거쳐 만든 게 모듈랩이다. “플라스틱으로 (폐기물 발생 등) 문제를 겪는 회사를 대상으로 컨설팅ㆍ합병ㆍ합작 등 협업을 시도하는 회사입니다. 발생한 플라스틱 제품의 회수, 순환, 재활용 등의 시스템을 만들어 주죠. 수거한 폐플라스틱으로 액세서리를 만들어 판매도 합니다.”
폐플라스틱을 녹여 만든 독서링이 대표 제품이다. 엄지 손가락에 끼워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도구다. 출시 직후 B2B에서 좋은 성과가 났다. 최근 열린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P4Gㆍ환경분야 다자정상회의)를 기념해 교보문고에서 환경 서적 구매자를 대상으로 증정했다.
모듈랩은 윤 대표 외에 욘 아잔싸(22·Jon Azanza), 미구엘 아코스타(23·Miguel Acosta) 등 2명의 학교 동기가 함께 하고 있다. 윤 대표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코로나에 안전하고 창업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친구들을 설득해 데려왔다”고 했다. 인터뷰에 두 친구도 참여해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내 미래를 설계하고 싶어 몬드라곤대 레인학부에 입학했다. 일반적인 고교, 대학을 거쳐 직장에 다니는 안정적인 삶도 있겠지만, 내게는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미국과 중국 등에서 창업을 경험했는데, 그중 한국이 괜찮은 곳이다. 기회가 많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모국인 스페인과 비교해도 좋은 환경이다.”(아잔자)
“한국은 20년 전 실리콘밸리와 비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10~15년 뒤 서울의 사업 환경이 엄청나게 변해 있을 것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경제 성장도 대단하지만, 현재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는 환경을 감안하면 앞으로의 변화는 더 대단할 것이다. 쿠팡 같은 성공 사례도 많지 않나.”(아코스타)
◇산업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목표
흔히 업사이클링하면 환경 지킴 활동,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ESG 경영 등을 떠올린다. 이 보다는 산업적 접근을 하고 싶다는 것이 윤 대표의 포부다. “업사이클링은 예술 분야에서 출발한 단어에요. 산업적으로 수익화가 가능해야 지속가능합니다. 순환경제가 돈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플라스틱을 슬기롭게 버리는 법에 대해 물어봤다. “아파트에서 재활용품으로 배출되는 플라스틱이 진짜 재활용되는 비율은 18%에 불과합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페트병만 잘 버려도 도움이 됩니다. 플라스틱 뚜껑을 따로 모으지 않는 아파트라면, 생수병을 잘 세척해서 라벨을 벗기고 뚜껑을 닫아서 버리세요. 중간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세척하는데 돈이 더 들어갑니다. 투명한 페트병만 제대로 모아도 원자재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이현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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