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 스타의 전문 직업인 도전기
청년기와 노년기의 경유지인 중년기는 인생의 허리 같은 시기다. 다치기 쉬운데다 한 번 다치면 완전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건강하게 노년을 맞이하려면 이 시기에 기초체력을 잘 쌓아야 한다.
인기 드라마 <첫사랑>, <야인시대>, <용의 눈물> 등에서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쳤던 배우 황덕재(61) 씨는 한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암흑의 나날을 보냈다.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로 활동 중인 황 씨는 최근 한국폴리텍대학의 신중년특화과정을 통해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황 씨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찾는 과정에 대해 들었다.
◇광고 엑스트라로 데뷔한 공대생
인하대 전자공학과 79학번 소띠다. 강의실 대신 거리에서 청춘을 보냈다. “ 배우 천호진 씨가 대학 동기입니다. 그 시절 대학생 답게 데모하고 다니다 21살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생계를 위해 연기에 뛰어들었다가 푹 빠지게 됐다. “당시 해태음료의 ‘써니텐’ 광고 엑스트라를 뽑는 오디션이 열렸어요.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서정희 씨가 광고 모델이었죠. 오디션에서 발탁돼 서 씨 뒤에서 춤추는 역할을 했는데, 돈벌이가 되더라고요. 대학등록금이 115만원이었는데 광고 한 편 찍으면 15만~20만원이 들어왔거든요. 당시 방송 환경을 몰랐던 저는 쉴 새 없이 춤을 췄어요. ‘더 잘하고 싶다, 제대로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샘솟더군요.”
◇KBS 공채로 통해 브라운관 데뷔, 드라마 40여편 출연
1982년 서울예술전문학교(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1987년 KBS 공채 12기 탤런트가 됐다. “학생일 때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습니다. 그 유명한 리어왕에도 출연했죠. 연기 경력을 쌓다가 방송국 공채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MBC와 KBS를 오가며 면접 보던 시절이었는데요. 세 번 떨어지고 네 번 째에 붙더군요. KBS에 저와 제 동기들 이름이 적힌 벽보가 붙고 연예 매체에서 저희를 취재했어요.. 여의도가 내 것 같던 시절이었습니다.”
KBS <따뜻한 남쪽나라>라는 작품으로 브라운관에 데뷔해 40여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주연으로서 얼굴을 전면 내세운 적은 없지만 매력적인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출연한 광고는 400편이 넘는다. “많은 분들이 <야인시대>의 서대문 대장 ‘작두’로 기억해주시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배용준, 최수종 주연의 <첫사랑>입니다. 최지우, 이혜영 씨도 출연했고 순간 시청률이 75%까지 치솟았던 작품이었어요. TV채널과 매체가 많아진 요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때가 참 많이 생각납니다.”
◇우연한 기회로 산업계 뛰어들어…일과 연기 병행하기도
배우 생활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물의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몸 사리느라 일상 속에서 제약이 많았어요. 술 마실 때도 ‘취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단단히 붙잡았고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가족을 건사할 수준으로 벌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으니까요. 연기력이 뛰어나지만 각광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선후배들이 많았거든요.”
고군분투하는 동료들의 모습은 ‘연기자’라는 직업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배우는 인지도가 있다면 평생 직업이 될 수 있지만 그게 부족하면 대중에게 외면받기 쉬운 자리기도 했다. 연기자로서의 삶에 한계를 느낄 때 산업 전선에 뛰어들 기회가 생겼다. 2009년 아는 선배로부터 ‘서울합금’이라는 회사에서 일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현지 광산·공장을 관리했다. 억대 연봉을 받으며 해외 곳곳을 누볐다.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홍콩, 폴란드 등에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을 살았습니다. 뒤돌아볼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캄보디아에 체류할 땐 드라마 <근초고왕>을 촬영하느라 일주일에 두번씩 한국과 캄보디아를 오가기도 했어요. 이 생활을 몇 달해보니 너무 힘들었어요. 감독님께 말씀드려서 중도 하차하고 말았죠. 2016년 귀국 후 2019년까지 서울합금의 계열사 대표로 지냈습니다.”
◇가족 불화에 수 억원 사기 사건 겹치며 난항
10년 간 실업가로서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지만 내실은 엉망이었다. 가족과의 관계는 틀어졌고 몸과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다. “2013년쯤부터 어머니가 편찮으셨어요. 결국 한국에서 혼자 병간호하던 아내의 불만이 터졌습니다. 아내는 울면서 ‘왜 당신은 내가 힘들 때 옆에 없냐’ 하소연하더군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내와 별거를 했다. “첫 3년은 너무 힘들었어요. 가족을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 외로움까지 겹치며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체중은 7kg 가까이 줄었고요.”
설상가상 사기로 3억5000만원 거금을 잃었다. “사회생활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었어요. 택시 회사 과장이었는데, 제가 원자재 분야에서 일하는 걸 알고 구리 등 금속 투자를 권하더라고요. 투자 상황을 공유하는 사진까지 보내오길래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게 2000만원, 5000만원씩 줬는데 한 푼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놀음 하는데 제 돈을 다 썼더라고요. 법적 분쟁까지 갔을 때 판사에게 ‘이 사람은 밖에 내보내면 안 된다’고 울면서 호소했어요. 인생이 바닥을 찍는 느낌이었죠.”
◇폴리텍대 신중년특화과정으로 삶의 활기 찾아
번민에서 벗어난 건 최근이었다 . “‘돈에 연연하지 말자. 최악을 경험했으니까 이제 솟아오를 일만 남았다’ 되뇌며 마음을 다스렸어요. 내려놓는 법을 배운 거죠. ”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친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고등학교 동창이 3월 2일 폴리텍대학 남인천캠퍼스의 신중년특화과정에 입학했는데 그 날 바로 연락을 하더라고요. ‘너도 이 과정에 참여하면 좋겠다’고요. 아직 신청 기간이 남았을 때라 다음 날 면접을 보고 저도 신중년특화과정 자동차과에 입학했습니다. 새로운 걸 배우고 자식뻘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죠.”
신중년특화과정은 1년짜리 과정을 4개월으로 압축한 과정이다. 40대부터 60대 중반 연령대의 중년 25명이 이 과정을 수료 중이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화요일과 목요일은 오전 9시까지 5시 30분까지 밀도 높게 수업이 진행된다. “자동차과는 엔진을 뜯어서 스스로 수리할 수 있을 수준으로 교육을 받습니다. 실습 중심이라서 학교에 가면 작업복으로 갈아입어야 해요. 요즘 잠 자는 시간을 대폭 줄였습니다. 주말 행사를 나가느라 월요일 새벽에 지방에서 출발해 바로 학교에 간 적도 있어요.”
새로운 활력소만 찾아도 본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격증 취득 욕심이 스물 스물 기어오른다. “지게차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고 싶어요. 일도 구할 수 있고 나중에 전원주택을 지었을 때 직접 공사에 참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요. 녹슬어 가는 머리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실습하고 자격증 취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짧다면 짧은 과정이지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합니다.”
캠퍼스 생활의 최고 묘미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쉬는 시간이면 동기 25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각자 살아온 인생을 공유합니다. 그동안의 고충과 외로움이 해소되는 시간이죠. 캠퍼스 내 젊은 친구들과 호흡할 수 있는 점도 좋아요. 운동장에서 함께 어울려 족구를 한 적도 있죠. 아들뻘인 25살 친구에게 커피를 빼앗긴 적도 있답니다.”
◇외로움 느끼기 쉬운 중년, 행복한 에너지 전달하고파
황 씨는 입학 3개월만에 폴리텍대 신중년특화과정 전도사가 됐다. “기업 간부, 차관급 공무원 자리에 오른 친구들조차 조직을 떠난 후의 삶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정년을 앞둔 친구들에게 이 과정을 적극 권유하고 있습니다. 커리큘럼을 보고 적성에 맞는 게 있다면 도전해보라고요. 퇴직하고 마냥 쉬기만 하면 정상적인 템포를 놓치기 쉽잖아요. 직업 훈련의 목적도 있겠지만 제게 이 과정은 정신적 긴장감을 만들어주는 촉매제 같은 존재거든요.”
‘내일 죽을 것 같이 오늘을 살자’를 신조로 삶을 대하는 중이다. 연기와 안정적인 직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게 목표다. “시간을 쪼개서 타이트하게 살고 싶어요. 연기와 병행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습니다. 향후 경력이 쌓이고 자동차정비전문가가 된다면 폴리텍대에서 특강도 하고싶어요.
동시에 좋은 배우, 기억나는 배우로 남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 이덕화 선생님이 그랬거든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요. 사실 대중들은 연기자나 공인의 불행에 열광하곤 하는데, 불행담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의 삶은 행복한 바이러스를 퍼뜨리며 따뜻한 드라마를 쓰고 싶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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